시자의 죽음 경허선사 鏡虛禪師
흰 구름 고개위에 한가로이 떠 있고 맑은 물 개울에서 유유히 흐르네,.
경허스님께서 영주라는 한 시봉을 데리고 어느날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양화里 연천봉에 올라 갔다가 내려 오게 되었다.
연천봉은 계룡산의 한 봉우리로 동학사에서 직선거리로 십리가 채 못되는 한 쪽에 정상을 이루고 있다.
한 칸 초옥의 등운암이 연천봉 위에 자리 잡았고 그 곳에서 십리쯤 내려가서 양화리에 시원사 신원寺라는 절이 있었다.
경허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영주사미는 스님과 함께 연천봉에서 신원사를 향해 산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날 동학사까지 가려고 하였다.
시봉이 멘 스님의 걸망이 퍽이나 두둑해 보였다.
그 때 아래쪽에서 웬 젊은이들이 떼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동학사에서 심부름도 하고 잡일을 도와 주던 양화 金도령이라 불리는 젊은이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그를 몰랐다.
양화 김도령은 먼저 시봉이 멘 두둑한 걸망을 훑어 보았는데 영주사미가 그를 알아 보았다.
아니 양화 김도령이 아니유 ?
하고 말을 건넸으나 그들은 아무 말없이 걸망을 진 시봉에게 접근하였다.
양화 김도령이라는 자가 경허스님을 보고 말했다.
저는 이 사람과 긴밀히 할 애기가 좀 있구먼요.잠깐이면 되니까 스님께서는 먼저 내려가 계세요 이 사람도 곧 뒤 따라 갈테니까요,.
경허스님은 시봉이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 줄만 알고
그 래 할 말이 있으면 하고 곧 내려오지,.
하고 별 의심없이 천천히 산 길을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 오다가 뒤를 돌아 보아도 시봉의 기척이 없었다.
의아스러운 경허스님은 다시 산을 향해 양화 김도령이라는 자를 만난 곳까지 가 보았다.
시봉과 양화 김도령은 물론 일행도 이미 없었다.
한편 양화 김도령을 필두로 한 산적들은 경허스님이 하산하여 시야를 벗어나자 어린 영주사미의 걸망부터 가로채고는
있는 돈 다 내놔?
하면서 윽박질렀다.
가진거라고는 그 것 밖에 없는데요.
잔 말 말아 돈을 내놓지 않으면 네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 ?
강도 일당에게 두 손 모아 빌면서 시봉은
양화 김도령 필요한 돈은 다음에 만들어 드릴테니 어서 저 큰 스님을 따라가게 해주세요.
하고 애원하였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빼앗은 걸망을 헤쳐 보았으나 그 속에는 노수 몇푼 있을 뿐 헌 옷가지와 책 몇권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강도 일당은 푼돈만 챙기고 닥치는데로 헌 옷가지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시봉의 몸까지 샅샅이 뒤지고 가진 돈이 더 이상 없자 사정없이 발길로 걷어차고 저만치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숨진 시봉의 목을 후미진 숲 속 나무에 걸어 놓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만에 시봉을 남겨 두었던 곳에 다시 올라 와 본 경허스님은 강도 살인의 기막힌 참경이 벌어진 현장을 보지 못하고
허 참 괴이하구나 다른 길로 간 모양이군,.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하산 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히 동학사까지 혼자 넘어 온 경허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갑사에 사람을 시켜 시봉 영주가 혹 갑사에 오지 않았는가 편지를 보냈다.
그 절의 스님은 편지를 받고 영주사미를 찾아 보았으나 아무데도 없었다.
이 처럼 종적이 묘연해지자 이상히 여겨 여러 날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나무꾼이 깊은 산골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나무에 메달린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동안 찾았던 영주의 시체였다.
경찰이 현장을 조사해 보니 바랑이 옆에 있고 발갱이로 목을 졸라 죽여 나무에 메달아 놓았다.
그 발갱이와 바랑을 알아본 결과 경허스님의 소지품이었다.
더 이상 단서가 잡히지 않자
이는 필시 스님이 살인을 했나보다,.
하고 수사진은 일단 이렇게 추리해볼 뿐이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곧 바로 경상도로 향해 해인사 학명스님을 찾았다.
그 얼마 뒤 죽은 시봉에 대한 소문이 그 곳 해인사까지 전해졌다.
동학사에서 문석이라는 비구니가 해인사에 다니러 와서 계룡산 일대의 소문을 퍼뜨렸다.
경허당이 시봉을 목메 달아 죽였대요,.
그러나 상당한 시일이 지나 경허스님의 결백이 공주 경찰서에서 우연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한 끔찍한 강도 사건이 일어난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경허스님은 그만 살인의 누명을 뒤집어 쓴채 단 한 마디 변명도 없었다.
그 당시 경찰의 수사방법도 철저하지도 못한 원시적인 상태였다.
경찰이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처음에 진범을 달리 알아볼 도리가 없었던 까닭에 그러면 스님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겠느냐고 경허스님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경허스님으로서는 당신을 그처럼 존경하고 시봉을 잘해주는 시자를 해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막상 단정을 짓지 못하고 진범을 추적중에 있었는데 마침내 산적떼를 일망타진하게 되었다.
잡혀온 산적들은 범행조사를 받던 중에 갑사의 행자 영주라는 사미를 죽였다고 자백하게 되었다.
이유는 어떤 원한관계가 아니라 자기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전히 산적떼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메고 가던 바랑 속의 여비는 빼앗고 그 속에 들어 있던 발갱이로 목을 졸라 맷는데 그것이 경허스님의 발갱이였고 바랑은 경허스님의 소지품으로 스님을 시봉하기 위한 도구까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김도령등 진범들이 그 사건의 진상을 자백함으로 경허스님의 혐의는 자연히 벗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종래 한 마디 변명이나 그 사건에 대해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 본 일이 없이 일생을 보냈다.
그 후로도 경허스님을 험담하는 일부에서는
무애행을 일삼던 경허스님이 심지어 사람까지 죽였다,.
이를 회피하려고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일도 있었다.
****경허선사께서는 불쌍하고 억울하게 죽은 영주라는 사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재미난 것은 영주라는 사미의 이름이 성철스님의 출가전의 이름과 같은 것이고 하여
늘 마음에 남았다.
특이한 것은 성철스님이 1912년 2월에 출생한 것이고
경허선사께서 1912년 4월에 열반에 드셨다는 것이다.
경허선사께서 영주라는 사미를 환생시키시고 열반에 드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두번 다시 보기 어려운 선지식 성철스님을 출현시킨 것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