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달마어록 불종자론 佛種子論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 위에 있다. 그것은 아라한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열반을 보게 되면 그대는 마음 밖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 미혹된 것이다.
모든 고통은 부처(나, 我)의 씨앗이다. 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못한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더러운 땅, 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에 사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어떤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할 때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 그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그 침묵은 그대의 무지에 묶여 있다. 말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달마는 나에게 순금 같은 존재이다. 그가 주장하는 단 두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의 말은 이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는 그대 가슴에 가능한 한 깊이 새겨져야 할 존재이다. 그러나 단 두 가지 오류만은 그대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왜 달마의 동시대인 중에서 아무도 이 두 가지 오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다. 달마에게는 카리스마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앞에 오면 입이 저절로 닫혀 버리는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 그들을 압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마의 어록에 나온 두 가지 틀린 점이 너무나 명확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달마는 나름대로 궁국의 꽃을 피운 사람이다. 그는 집에 도착한 사람이다. 그는 단지 몇 가지 점에서 빗겨나갔을 뿐, 물론 그는 곧 되돌아왔다. 고대 동양에서는 어떤 사람이 아침에 도에서 빗나갔더라도 저녁이면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길을 잃는 적이 없다. 자유로운 사람들조차도 한번쯤 빗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로 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노도처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거기엔 어떤 지도도, 안내자도 없다. 그 강은 히말라야에서부터 시작되어 산과 골짜기를 지나 들판을 흘러간다. 그리고 이곳 저곳을 돌아서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거기엔 정해진 과정 같은 것은 없다. 몇 걸음 더 돌아서 갈 수도 있다. 한번 사람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 그는 거의 모든 과정을 잃어버린다. 그는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을 마쳤다는 기쁨에 모든 어려움을 잊어버린다. 아마 달마도 자신의 두 가지 오류를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 두 가지만 빼고는 그의 모든 말이 절대적으로 진지하고 진실하다. 그것들은 지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의 순수함에서 그저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그대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 어록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오류를 꼭 경고해야 한다. 먼저 한 가지는 그가 아라한에 대해 계속 편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마음에 관한 말이다. 그는 무심이란 뜻의 말을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것은 제자의 실수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실수는 그 어록을 대하는 사람에 의해서 고쳐지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왔다. 영어에는 마음이란 단어가 하나밖에 없다. '마음(mind)'이란 단어에 대해서 기발한 표현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mind'를 사용하고, 우주적인 마음, 즉 무심과 같은 의미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Mind'를 썼다. 그대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사라질 때 바로 무심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주적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달마의 어록을 완벽하게 바로잡고 싶다.
진리에 대해 말한 이토록 아름다운 어록에 있어서 조그만 티가 남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록은 말하고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 위에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철학적인 관점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달마는 말하고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를 체험하는 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나의 신념이 아니다. 나의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나의 경험이다. 그래서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는 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가 올바른 길에 있는 한 말이다. 이 말은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없는 한 그것은 그대가 올바른 길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강물은 사막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다로 흘러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계속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라한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달마의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코 아라한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중생들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임에는 확실하다. 그리고 중생이란 이번 생이 전부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추종자이며 흉내내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전통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길을 모든 가능한 방식들을 통해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가 오직 한번 태어난 역사적 인물로만 알고 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와 똑같은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부처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부처들은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고, 자신들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복제품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경전의 내용에 의해서 고정관념을 갖는다. 그런 관념은 죽은 생각이다.
그대는 경전에서 아름다운 장미를 발견하지만 이미 말라 버린 장미를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성서》에서, 《꾸란》에서, 《바가바드 기타》에서 그런 장미를 발견하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꽃이다. 내가있는 집 앞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나는 어디에 살든지 항상 그런 아름다운 정원 곁에 살았다―그리고 그 정원 가까이에는 사원이 두 개 있다. 그 사원에 오는 예배자들은 내 정원에 와서 신에게 바칠 꽃들을 꺾곤 한다. 인도에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꽃을 꺾는 사람의 행위를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나의 정원에서 꽃을 꺾지 못하게 한다. 내가 그들의 행위를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신에게 바칠 꽃을 꺾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는 것이 인도에서는 기정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반박조로 말한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예배자는 어디에서도 꽃을 꺾을 수 있습니다. 이 꽃들은 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정원에 있는 꽃들은 이미 신에게 바쳐진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의 행위를 허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살아서 태양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니 그대의 우상 때문에 그것들이 생명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꽃들은 살아 있는 신들이다. 그대는 그대의 죽은 신을 위해서 꽃들의 생명을 파괴하려고 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정원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가 허락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인을 위해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언제나 환영한다. 이 꽃들은 신성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꽃들을 꺾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신성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이 꽃들을 꺾는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하지만 그대들은 지금 이 꽃들을 죽은 우상에게, 돌조각에게 바치려고 한다. 그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소위 성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전에서 어떤 개념이나 수행 방법을 꺾어온다. 그것들은 죽은 꽃과 같다. 수천 년 동안 말라비틀어진 미라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향기도 없다. 이것은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살아 있는 스승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진정한 수행 방법이다. 살아 있는 스승의 가르침만이 올바른 개념이다. 살아 있는 스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단지 경전에서 따온 개념이나 계율이나 수행 방법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그것을 따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그대에게 고통과 번민을 줄 것이다. 죽은 것을 따르는 한 그대는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생각하는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은 거의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접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과 존재계 사이에 수천 가지 장애물들을 만들었고, 그것들은 그들은 진리나 수행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을 그들의 시야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나 중생들은 자신들의 불멸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라한들은 다르다. 아라한들은 보살과 같은 경지에 있다. 보살은 아라한보다 경지가 더 높지 않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 그들은 같은 봉우리에 이르른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봉우리는 항상 하나이다. 물론 거기에 이르는 길은 수천 가지가 될 수 있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이것이 이 어록의 두 번째 잘못이다. 마음은 결코 열반, 즉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마음은 니르바나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니르바나란 말 자체가 '마음의 정지'란 뜻이다 그대가 이해하기 쉽게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촛불이 꺼진' 상태이다. 마음은 의식의 작은 불꽃을 가진 하나의 촛불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불꽃이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타고르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의 부친은 매우 부유한 영주였다. 그의 영지는 수백 개의 마을을 포함해서 수천만 평이나 되었다. 그의 영지 가운데로 아름다운 강이 흐를 정도였다. 그래서 타고르는 배를 타고 몇 달씩 이 아름다운 강 위에서 살곤 했다. 그 강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빽빽한 숲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그는 이 배 위에서 크로체(Croce)의 시를 읽곤 했다. 크로체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관해서 그 어떤 철학자보다 깊이 생각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은 철학자였다. 그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름답지 못한 것은 진리일 수도, 선일 수도 없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타고르 역시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 자체를 미학적으로 살았다. 그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시였다. 그는 정말로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보름달이 뜬 어는 날 밤에 그는 나룻배 속에서 촛불을 켜 놓고 크로체의 작품을 읽었다. 밤이 깊은 시각에 크로체의 난해한 문장을 읽다가 그는 책을 덮고는 촛불을 껐다. 그리고는 배 위에서 잠을 청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보름달이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름달은 나룻배 안을 환한 광채로 가득 채웠다. 그 순간 타고르는 침묵에 빠졌다. 그것은 매우 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밖을 쳐다보았다. 고요한 밤, 고요한 숲 속에서 달빛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강물 역시 소리없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일기를 썼다. "아름다움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이 그 아름다움을 가로막고 있었다. 촛불의 빛 때문에 나는 달빛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르바나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대 에고의 작은 불빛 때문에, 마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생각의 촛불 때문에, 우주 전체가 그대 속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르바나는 그대의 촛불이 꺼졌을 때,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을 우주 전체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더 이상 잃어버린 탕자가 아니다. 그대는 처음으로 시들지 않는 무한정한 아름다움의 보물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선의 보물이며 진리의 보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무심만이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으며, 무심이 바로 니르바나인 것이다.
무심의 상태에서는 억지로 니르바나에 이를 필요는 없다. 무심이 바로 니르바나이다. 달마는 말한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바로잡았다. 무심이 열반이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무심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니르바나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는 니르바나를 볼 수 없다. 그대는 그대로부터 분리된 어떤 대상만 볼 수 있다.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눈동자가 그것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대가 열반을 보게 되면 그대는 마음 밖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 미혹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마음은 하나의 세계이며, 무심은 그 세계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마음은 불행이다. 그리고 무심은 불행의 끝이며 황홀경의 시작이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못한다. 달마의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에서 심오한 뜻을 지닌 말을 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행이 끝난다면 모든 종교도 그것을 따라서 끝날 것이다. 종교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불행이다." 그는 달마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무신론자였고, 모든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 또한 다른 이유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진화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종교 때문에 진정한 종교스러움이 설 땅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종교적 성격이 자라나는 데 해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종교적인 성격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궁극적인 꽃이다. 고통조차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달마의 말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처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그대는 결코 진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고통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초월하려는 무엇인가를 계속 찾게 된다. 고뇌와 번민은 그대로 하여금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잠에 빠질 것이다. 너무 편안해서 식물처럼 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고통이 필요하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이 말에서 달마는 그대의 육체와 마음과 그 고통에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그는 그대 삶의 모든 부분을 다 헤아리고 있다. 그는 어떤 것도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이것은 삶을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는 사람의 길이다.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근원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육체를 무시한다. 육체를 하나의 밭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대신에 그것을 고문한다. 육체는 부처가 사는 하나의 사원이다. 달마와 같은 사람은 고통이나 번민조차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고통과 번민은 그대를 각성시키고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대를 자극하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그대에게 도전한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에 사는 것이다. 사실은 천당과 지옥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삶 속에 들어 있다. 오직 그 구조만 바뀔 뿐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그대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대가 그것들을 벗어나는 순간 그대의 마음을 벗어난다. 그때 그대는 천당속에 있게 된다. 세상에는 죽은 뒤에 천당으로 간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에 가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죽은 뒤에 천당으로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절대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선한 사람은 이미 천당에 가 있다.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당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변형이다. 분노와 같은 에너지가 자비로 변할 때, 탐욕의 에너지가 나누어주는 것으로 변할 때, 어리석음의 에너지가 각성으로 변할 때, 그것이 바로 천당인 것이다. 그 에너지는 같다. 단지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그것의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의 기술인 것이다. 종교를 이와 다른 것으로 설교할 때 그것은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장님을 만들어 함께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그들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 만약 그것이 올바르다면 이간은 이미 부처이다. 그 에너지가 잘못 얽혀 있다면 그대는 그것의 멋진 교향악을 만들어낼 수가 없고 그대의 삶은 지옥으로 변한다. 그대는 천당과 지옥이 존재할 수 있는 마당이다. 자그마한 각성만 일어나도 그대는 지옥을 천당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그대로부터 떼어낼 것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통찰력이다.
이것은 인간을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만든다. 만약 그가 지옥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깨에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이것은 신의 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무의식이며 바로 나 자신이다.' 그대가 자신의 두 어깨에 책임을 지는 순간 그대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른 누구도 그대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가가 와서 그대를 변화시켜 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대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그대는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어떻게 그것들이 지옥을 만들며 불행을 만들어 내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그대는 어떤 순간에 침묵에 빠지는지, 어떤 순간에 기쁨이 밀려오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에너지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 보라. 그것들은 같은 에너지이며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만 하면 된다. 만약 누군가가 지옥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타고난 권리이다. 아무도 그를 방해할 권리가 없다. 그가 변화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구세주를, 예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를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대는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달마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여기서 달마는 이상한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전환이다. 이렇게 말하는 신비주의자를 나는 달마말고는 본 적이 없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어떤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때때로 그의 통찰력은 인간의 실체를 꿰뚫는다. 그것은 정말로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는 지금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하루 종일 떠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는 그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침묵의 상황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폭풍우 뒤에는 항상 정적이 감도는 것처럼 말이다. 스승이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출 때 갑자기 거대한 침묵이 거기에 생겨난다.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의 마음을 완전히 몰두시켜 갑자기 그대가 몰입되었다는 것을 보게 만든다. 그는 하나의 작은 틈을 만든 것이다. 그 틈 사이에서 초월의 불빛이 생겨난다. 달마의 말 역시 초월의 불빛이다. 말과 말 사이의 순간에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그 침묵의 순간에 스승의 존재가 그대의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42년 동안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언제든지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가 없다. 단지 그는 말과 말 사이에서 침묵을 통해 초월의 등잔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그는 침묵의 작은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작은 틈이야말로 그의 진짜 설법이다.
달마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 역시 말을 하지 않는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그저 가식일 뿐이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파벳의 글자 모양을 갖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알파벳 글자 모양들을 짜 맞추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면 그 옆에 앉아 있는 대변인 격인 제자가 입을 연다.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차라리 앉아서 타자기를 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것이 시간이 훨씬 덜 걸릴 것이다. 또 알파벳 글자 모양 같은 것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손동작만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그대는 그가 무슨 시늉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숙달된 제자만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주먹을 쥔다든지 손바닥을 편다든지 손가락 두 개만 편다든지 할 때 그 제자는 스승의 의사를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성자가 아니다. 그들은 코미디언일 뿐이다. 그들의 침묵은 절대적으로 난센스이다. 모든 종류의 멍청한 짓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영원히 포장된다.
내가 봄베이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유명한 성자로서 히말라야에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를 보기 위해 봄베이에 왔다. 보통 나는 그런 종류의 성자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다. 그들은 내가 만나보고 싶지 않은 바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매우 먼 길을 고생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말했다. "그대 나를 만나기 위해서 고생을 했으니, 나도 어는 정도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 만났다. 그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왔는데 그는 명상에 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명상 모임을 7일 동안 가질 예정이다. 그대는 잘 맞추어서 이곳에 왔다. 명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그러니 내일 아침 8시에 이곳에서 나와 함께 명상을 하자. 그리고 만약 질문이 있다면 개인적인 면담을 하라. 그때 그대는 뭐든지 의문나는 점을 내게 물을 수 있다." 그가 말했다. "내일 다시 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내가 말했다. "무슨 문제인가? 그대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나와 함께 온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내 제자인데 이 근처에 친척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가게 내버려 두라. 그대는 여기서 명상을 하면 되지 않는가?" 그가 말했다. "당신은 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돈을 만질 수 없습니다. 내 돈은 그가 갖고 다니면서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냅니다. 어디를 갈 때마다 나는 항상 그와 함께 다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그것은 그대의 돈인데 그가 항상 갖고 다닌다고? 그대는 돈을 만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지고, 이 불쌍한 친구는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단 말인가? 그는 그대 대신 돈을 만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저지른 업이 무엇인가? 자신의 돈을 만지는 것이 나쁘면 남의 돈을 만지는 것은 더 나쁘지 않은가?" 나는 계속 말했다. "이 불쌍한 친구를 좀 생각해 주게나. 만약 그것이 그대의 돈이면 그대가 그것을 만져라. 장갑을 사서 끼고 돈을 만져라. 그러면 돈은 그대 손에 닿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성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장갑을 끼고서 모든 종류의 돈을 만진다 해도 그대는 그를 성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돈을 만지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침묵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생각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동작을 통해서 말을 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그것은 통역해 주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의사표현이 전달되는 데는 완전히 통역자에게 달린 것이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통역자의 전달을 제지할 수가 없다. "그런 뜻이 아니다"란 말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통역이 어떻게 전달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허 바바(Meher Baba)의 비서 중에 아디 이라니(Adi Irani)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의 전생애를 메허 바바와 함께 살았다. 내가 아마드나가르에 갈 때마다 아디 이라니는 나를 보러오곤 했다. 그는 항상 메허 바바의 공책을 갖고 다녔고 메허 바바는 의사소통을 할 때에는 간단히 표시만 했다. 처음에 그는 작은 칠판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그는 칠판을 내다 버렸다. 사람들이 "요즘처럼 우주선이 달에 가는 시대에 이 무슨 난센스인가?"라고 말하며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허 바바는 아디 이라니를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손으로 몇 가지 동작을 했고, 그것을 받아 적는 아디 이라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디 이라니에게 물었다. "너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진짜로 알고 받아 적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적어도 당신한테는 말입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내가 적는 것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내가 상상하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아디 이라니는 메허 바바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알지 못했다. 메허 바바가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디 이라니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옳았다. 내가 물었다. "너는 정말로 그의 동작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가? 동작이란 여러 가지 뜻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배를 보여 주거나 목이 마를 때에는 손으로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할 수 있지만, 철학적인 말은 어떻게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나는 네가 그것들을 다 이해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아디 이라니는 그때까지 거의 50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그리고 한 권이 보통 500페이지에 달했다. 그것은 적은 양이 아니다. 나는 아디 이라니에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너의 상상력이다. 너는 훌륭한 작가이다. 그 책들은 메허 바바의 것이 아니라 모두 너의 작품이다. 네가 그럴싸하게 내용을 썼기 때문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말로 받아들였다." 사실 메허 바바는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아디 이라니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디 이라니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아무도 그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을 하고 싶다면 그대의 입술과 혀로 말하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입으로 말할 수 있으면서도 손가락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게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대의 입술과 혀도 손가락처럼 그대의 몸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말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대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가? 상징이란 위험한 것이다.
일본의 산야신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곤란한 문제를 겪었다. 몸동작에 있어서 일본은 완전히 다른 상징 체계를 갖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다른 식으로 그것을 발전시켰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이 세상 모든 민족 심지어는 원시인들조차도 '예스'의 표시로서 그들의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인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예스'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산야신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의아해서 물어 보았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왔는지 말이다. 그들의 몸동작은 매우 이상하게 발전되었다. 누군가 그것들을 조사해야 한다. 그렇게 다른 상징 체계를 가진 민족은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 통역을 사용해야 했다. 계속해서 의사 전달에 오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을 때 나는 '아니오'라고 이해했고, 그들이 '아니오'라고 말했을 때는 나는 '예'로 알아들었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만약 그대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침묵 속에 있다고 해서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침묵 속에서 산책을 할 수도 있고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내면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평화이며 내적 고요이다. 사실 침묵 속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도 그 침묵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침묵을 더 이상 마음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말은 자신의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듣는 그대의 가슴속에 깊숙이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침묵은 말과 상대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침묵은 어떤 좋은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경험이다. 그대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침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그대의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하다. 그것들은 순수한 가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말한 연꽃 낙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래는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그것은 진여(眞如)를 인식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삼매는 말과 침묵 사이의 균형이며 조화이다. 말과 침묵이 만나는 바로 그 중심이다. 그 중심은 둘 다를 초월한다. 그것은 더 이상 침묵도 아니며 말도 아니다. 그것은 노래와 함께 하는 침묵이며, 그 노래는 소리없는 노래이다. 그것은 음악이 있는 침묵이며, 그 음악은 어떤 악기로부터도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은 그대 존재 자체이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이것을 '옴카르(omkar)'라고 불렀다. 그것은 옴(om) 소리인데 그대가 반복해서 소리내는 옴이 아니라, 그대가 단순히 듣는 옴 소리이다. 그대가 깊은 침묵에 휩싸일 때, 그때 옴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옴은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것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소리를 표현한 알파벳이 아닌 단순한 상징으로만 쓰이는 유일한 알파벳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우파니샤드는 바로 이 옴과 함께 시작해서 옴과 함께 끝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침묵을 표현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옴이 아니라 샨티(shanit)를 세 번 반복하는 '옴 샨티 샨티 샨티'이다. 어떤 악기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바로 침묵이다. 그것은 또한 입으로도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하며 알파벳을 초월한다. 말을 초월하고 침묵마저 초월한다. 옴은 모든 존재가 생겨나게 된 본질이며 우주의 음악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할 때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 그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그 침묵은 묶여 있다. 말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 아니면 무심에 달려 있다. 만약 마음이 언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거짓을 만들어낸다. 환상을 말이다. 만약 무심이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도 같은 경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만들어낸다. 그대가 무엇을 만들어 내든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든지 무심이 작용하는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마음을 통해서 나온 것이면 그대는 중심을 놓친다. 마음의 간섭없이 존재계로 하여금 그대를 통해서 말하게 하면 언어는 진리의 순수한 표현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마음은 그대의 감옥이다. 무심은 그대의 자유이다. 마음은 그대의 무지이다. 무심은 그대의 깨달음이다. 마음에서 무심으로 옮겨가라. 이것이 전체의 길이며 궁극적인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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