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 삼신론 三身論
부처는 세 가지 몸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화신은 중생이 착한 일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그들이 지혜를 얻을 때 나타나며, 법신은 중생이 궁극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는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 몸이란 말은 단지 사람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중하의 세가지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부처를 화신불로 보고서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해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를 보신불로 생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처를 법신불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부처를 어떤 모양(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사람이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업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응보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이 사라짐과 함께 해탈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현이다.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말을 포기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현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곧 성현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라고 했다. 또 경에 일렀으되 "그대가 보는 모든 모양은 모양이 아니다. 그대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무수히 많으며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의 모양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중생은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배라 부를때도 굶주림을 걱정한다. 거기에는 커다란 불안이 항상 있다. 그러나 성현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도 매이지 않는다. 순간 순간 그들은 도를 따라 산다.
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어록의 첫머리에서 달마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신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 그는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이해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이해도가 깊고 얕음에 상관없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은 달마에게서 듣기 힘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주지 않는다. 그는 오직 진리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것을 듣고 있거나 읽을 사람들을 그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극서도 그의 자비심이다. 또한 아라한과 보살을 구분하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아라한은 결코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입을 연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라한들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매우 깊이 존경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궁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평범함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세속적인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진리를 초청하지 않는 한 진리는 그들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진리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 그것은 그저 떠오르기만 한다. 그것은 떠오르면서 그대의 대문을 두드리며 "내가 여기 있다. 이제 밤은 끝났으니 일어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의 둥지를 찾아가 "이제 내가 왔노니 노래할 시간이다."라고 말하거나, 꽃봉오리를 보고 "자, 이제 피어날 시간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만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아침이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깊이 잠든 사람은 알지 못한다. 밤이 끝났다는 것을 꿈속에서도 모른다. 그러나 태양은 그 사람의 꿈을 간섭하지 않는다. 아라한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잠들어 있다."라고 말한다면, 벌써 당신은 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은 위치에 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대는 말한다. "나는 깨어 있고 그대는 잠들어 있다. 나는 그대보다 더 성스럽고 차원이 높다. 나는 의식의 궁극적인 정상에 이르렀고, 그대는 아직도 어둠의 세계를 헤매고 다니면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이미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두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고, 그대는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바로 이 적극적인 자비심을 반대한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의 현존을 느끼고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까이 간다면, 그들의 존재는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목이 마를 때 흐르는 강물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강물로 목을 적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대에게 달린 문제이다. 강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대가 강물까지 와서 직접 강물을 떠 마셔야 한다. 하지만 보살의 길은 다르다. 달마 역시 보살이었다. 그는 그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대를 흔들어 깨운다. 그것 역시 아름다운 길이다. 보살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쏟는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한 사람 정도 될까 말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오해할 것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적을 만드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보살들을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득권들이 거짓에 기초를 두고 있다. 소위 종교나 국가라고 하는 것들도 교활한 마음들이 꾸며낸 것들이다. 진정한 종교적 인간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 인종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인간 자체인 것이다. 그는 교활한 마음이 꾸며낸 어떤 정치적 노선도 믿지 않는다. 그는 성직자들, 교황과 주교들, 샹카라차랴와 랍비들에 의해 분열되어진 사상들을 믿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이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안다. 그 연꽃은 영원한 것이다 .그 향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보살들은 이 사실을 알기에 여전히 모든 노력을 다 쏟는다. 그들은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수도 보살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보살이다. 알 힐라지 만수르도 보살이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 길이 십자가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그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이 두 가지 길이 모두 절대적으로 옳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현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들의 자비심을 나타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표현 방법은 각자의 고유한 개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처는 세 가지 몸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화신은 중생이 착한 일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그들이 지혜를 얻을 때 나타나며, 법신은 중생이 궁극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는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 몸이란 말은 단지 사람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중하의 세 가지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부처를 화신불로 보고서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해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를 보신불로 생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처를 법신불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부처를 어떤 모양(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여기에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을 오해할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이해력에 달린 문제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깨달은 자의 많은 부분을 그냥 지나칠 것이며, 진실에 대한 어떤 부분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닫혀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건만 그대의 방문은 닫혀 있고 창문은 가려져 있다. 그대는 태양 아래서 눈을 감고 서 있는 것이다. 하근기(下根機) 중생, 즉 이해력의 정도가 얕은 사람이 처음 인식하는 사실은 착한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은 존재계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짐 덩어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뭔가로 공헌하려고 한다. 존재계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들은 부처의 첫 번째 몸인 화신불을 볼 것이다. 그들은 부처 주위에 둘러쳐진 후광을 볼 것이다. 그대는 예수나 크리슈나나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에서 후광이 둘러쳐진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제적인 현상이며 이제 그것은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러시아의 위대한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칼리안(Kirlian)은 특수한 카메라와 고도로 민감한 필름을 계발해냈다. 그 필름은 얼마나 민감한지 그대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그 사진에 나타난다. 그는 그 사진에서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심지어는 나뭇잎까지도 '오라(aura)'라는 후광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오라는 나뭇잎 모습 주위에 일정한 넓이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사람의 오라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좀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일수록 그 오라가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번민이나 고통에 휩싸인 사람일수록 그 오라의 빛은 약하게 비쳤다. 한편 그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이 죽기 6개월 전부터 오라가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에서 죽을 사람의 오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매우 민감한 사람에게는 이 오라가 육안으로도 보여진다. 킬리안의 사진에 나타나듯이 말이다. 예수를 따랐던 예민한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와 사랑에 빠졌던 예민한 제자들은 그의 오라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존재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고, 수용적인 자세가 되면 될수록 더욱 민감해져서 부처의 실체는 그들에게 더욱 뚜렷해졌던 것이다.
부처를 만나는 첫 번째 경험은 그의 화신을 만나는 것이다. 엷은 빛으로 된 몸, 그것은 그대 몸 주위에 10센티 너비로 퍼져 있는 부드러운 빛이다. 이 몸이 바로 화신체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기 6개월 전에, 킬리안이 발견했듯이 그 빛으로 된 몸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점의 빛으로 응집된다. 그 기간이 6개월이 걸리는 것이다. 그의 몸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화신체를 한 점 빛으로 된다.
과학자들은 영혼이란 것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한가지 예로, 그들은 죽음 직전에 이르른 사람의 몸무게를 정확하게 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몸무게를 쟀다. 그러자 그 몸무게에는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다. 거의 절대적으로 같았다. 자연히 그들의 결론은 몸 속에서 빠져나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뭔가가 몸 속을 빠져나갔다면 몸무게는 다소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과학자들은 빛에는 무게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화신체는 한 점의 빛으로 응축되었고 그것이 몸밖으로 빠져나가더라도 몸무게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다. 빛은 무게가 없다. 그리고 화신체는 바로 순수한 빛이다. 그래서 이해력의 정도가 깊지 않은 사람은 화신체만을 경험한다. 그들은 미약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빛을 볼 수 있다. 이해력이 어느 정도에 이른 중근기의 사람들은 화신체보다 더 깊은 몸, 엷은 빛 뒤에 감추어진 두터운 빛의 몸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보신체라고 부른다. 그것은 명상을 많이 한 사람에게만 보여진다. 이 세상에서 침묵을 배우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위대한 보물과 훌륭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침묵의 몸이다. 그리고 부처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간 사람에게만 보여지는 몸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왔다. 첫 번째 사람은 깨달은 자에게 처음 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첫 번째 몸인 화신체를 볼 수 있다. 그는 아직 제자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단지 학생일 뿐이다. 두 번째 사람이 있다. 그는 학생이 아니다. 그는 제자이다. 부처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역시 부처와 같은 경지에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학생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데만 열중해 있다. 그러나 제자는 다르다. 제자는 존재의 변화를 원한다. 그는 마음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부처의 두 번째 몸인 보신체를 볼 수 있다. 보신체는 그대의 명상, 그대의 침묵을 알아주고 그대에게 꽃비를 내려주는 본격적인 존재이다. 존재계는 누군가 깨달음을 얻으면 대단히 기뻐한다. 한 사람의 깨달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열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수세기 동안 계속된다. 그것은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지금 세상에는 살아 있는 종교가 몇 개 안 된다. 그 몇 개 안 되는 종교 중에 선불교도 들어간다. 거기에는 석가모니 부처 당신의 꽃을 피웠던 생명력이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시공을 초월해서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너무나 깊어서 도저히 분리할 수가 없다. 이슬람교에서 살아 있는 종파는 오직 하나, 수피즘 뿐이다. 나머지 모든 종파들은 죽었다. 그러나 수피즘은 연쇄반응을 계속하고 있다.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고 있다. 유대교에서도 살아 있는 종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시디즘이다 .하시드들은 수십 세기 동안 그들의 횃불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왔다. 그들도 여전히 깨달은 사람을 배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힌두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그들은 어떤 살아 있는 스승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우 중요한 종교로 인정받고 있다. 힌두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이며, 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그러나 그 둘 다 완전히 죽어 버렸다. 그들은 인류에게 부담만 잔뜩 안겨주고 있다. 그들의 정원에는 어떤 꽃도 피지 않으며 그들의 등잔에는 불꽃이 없다.
인류 역사상 달마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디오게네스(Diogenes)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 만났다면 대단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벌거벗고 지냈다. 그만큼 그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옷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못생긴 몸은 옷 속에 감추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몸은 그 아름다움을 보기 원하는 사람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디오게네스도 가장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중의 하나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났을 때 그는 약간 당황했다. 그는 비록 정복자로서 제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디오게네스와 같이 있을 때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벌거벗은 몸에서는 풍요로움이 뿜어 나왔다. 디오게네스는 한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곤 했다. 그는 약간 미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미친 사람들 속에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그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그대는 디오게네스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면 등불을 들어올려서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렇게 물었다. "디오게네스여, 무엇을 하는가? 지금은 대낮이다. 당신은 등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면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이 등불에 불을 붙여야 한다. 아는 진정한 사람을 찾고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의 등불은 그 옆에 있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디오게네스여, 당신은 전생애를 통해서 진정한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람을 만났습니까?"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비록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의 등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음을 나는 신께 감사한다." 세상은 너무 교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등불을 구원하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디오게네스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등불을 높이 든 것은 그대를 쳐다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눈동자를 그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그대의 진정한 인간을 볼 수 있다. 그대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그대의 존재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을 것이다. 제자는 스승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는 스승의 눈에서 심오함을 발견한다. 제자는 스승이 하는 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스승의 존재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스승의 두 번째 몸을 보게 된다. 존재계 전체는 스승의 보신체를 온누리에 나타낸다. 그러나 여전히 세 번째 단계가 남아 있다.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이 세 번째 몸을 볼 수가 있다. 학생은 첫 번째 몸을 본다. 제자는 두 번째 몸을 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던져 완전히 헌신한 사람은 세 번째 몸을 본다. 이것이 진짜 몸이다. 부처의 진신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차원적 변이가 일어난다. 제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지만, 그 가까움도 하나의 거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내던진 사람은 스승 안에서 완전히 녹아 버린다. 자신은 사라져 버리고 스승과 하나가 된다. 이 하나됨 속에서 깨달은 사람의 진신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는 말한다. 이 세 가지 몸은 정상적인 마음의 세 가지 경험일 뿐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부처는 한 가지 몸도 없다고 말한다. 깨달은 사람은 이제 아무도 아니게 된다. 그는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아무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순수한 비어 있음이며 그저 푸른 하늘로서 어떤 경계선도 없다. 이러한 무한은 오직 부처가 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몸을 보는 헌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헌신자이다. 나는 완전히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생각이다. 바로 '나'라는 생각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승의 비어 있음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임제선사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제자는 오랜 세월을 수행해 왔고 스승은 그 과정을 쭉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태양이 지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나방이 촛불에 뛰어들기 직전처럼 그것은 거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매우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때 임제선사는 그 제자를 불러서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그간 수년 동안 그대를 때려 왔다." 그것은 선(禪)의 전통 중 일부분이다. 스승이 제자를 때릴 수 있는 곳은 선(禪) 밖에는 없다. 때리는 데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때리는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안다. 어떤 때는 틀린 답을 말해서 맞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잘못된 질문을 해서 맞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제자들은 그저 놀라기만 한다.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스승이 와서 때리면 제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너무합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안다. 우리는 그대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그대가 방에 들어가는 길을 안다. 그런데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먼저 그대는 말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는 때릴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하자. 말하려는 것이 이미 틀렸으므로 먼저 때린 것이다. 다시 가서 정답을 찾아보라." 제자가 정답을 찾았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올바른 답을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틀린 대답만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임제선사는 수시로 그 제자를 때렸다. 그리고 그 날도 갑자기 그를 불렀다. 제자는 정원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제자는 말했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방안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를 때리지 마십시오. 저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저를 부른 것입니다." 임제가 말했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대는 스스로 오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오늘 전적으로 다른 이유에서 그대를 때릴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라." 그 제자가 말했다. "이것은 너무합니다. 저는 당신이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때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규칙 위반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가까이 오라. 나는 그대를 때릴 것이다. 오늘 그대를 때리지 못하면 이제 다시는 그대를 때려 보지 못한다. 오늘 그대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그대를 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그러니 제발 한번만 기회를 달라. 내일은 그대가 나를 때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나의 마지막 기회이다." 그리하여 그는 제자를 때릴 수 있었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통이다. 너무나 큰 사랑이 듬뿍 담긴 전통인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자를 때렸다. 내일부터는 제자를 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자는 그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날 스승을 찾아왔다. 스승은 문을 닫아 버리고 말했다. "그대는 방 밖에서 말해도 된다. 나는 노인이다. 그대는 나를 때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제 이 문은 잠겨 있다. 그대는 방 밖에서 큰 소리로 말하라." 그 순간 제자는 '나'라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에게 '나'라는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아무도 아닌 것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처는 단순히 순수한 침묵이며, 비어 있음이며, 완전히 영(zero)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는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 몸이란 말은 단지 사람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중하의 세 가지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부처를 화신불로 보고서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해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를 보신불로 생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처를 법신불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부처를 어떤 모양(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사람이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우리가 이 어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업(Karma)'이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행위를 말한다. 행위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반응이며 또 하나는 대응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욕한다. 그대는 화가 난다. 그는 그대의 단추를 누른 것이다. 사실 그는 그대의 스승이다. 그대는 노예처럼 행동했다. 그는 그대 속에 있는 화를 조종한다. 민약 그가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면 "정말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상황은 완전히 바꾸어진다. 그대는 하나의 희생물일 뿐이다. 그대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다. 누군가 그대를 욕하면 그대는 즉시 그대의 과거 경험에 따라 반응하게 된다. 반응하는 것이 바로 업이다. 그것은 그대를 묶는 사슬이다. 그러나 대응이란 반응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대응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를 욕하고 비난한다. 그대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는 그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명상 중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그저 듣기만 할 뿐이다. 그는 좋다든지 싫다든지 무슨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는 무슨 말을 듣든지 그 말에 대해서 하나의 거울처럼 나타난다. 그의 깨어 있음이 바로 거울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과거의 습관도 묻어있지 않다. 오직 현재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대응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보고 욕심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그대를 보고 못생겼다고 말하고 더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가 침묵하고서 듣는다면 거기에는 어떤 화도 낼 필요가 없다. 사실 그의 말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옳다면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정말 자비심이 많습니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틀릴 때마다 항상 말해 주십시오 나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이 아닌 말에 대해서 왜 내가 반박해야 하겠습니까? 당신은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다시 만납시다. 내가 아는 한 그 말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거짓에 화를 낼 필요가 없지 않소?" 이런 식으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게오르그 구르지예프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대단히 각성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구르지예프를 불러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라.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그러나 명심해 둬라. 너는 곧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말을 잊지 않고 이 말을 따라서 행동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물려줄 것이 이 말 외에는 하나도 없다. 나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땅도 없다." 그는 방랑자였다. "나는 너를 나의 친구에게 맡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산이 한 가지 있다. 잘 들어라. 이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다." 60세 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너를 욕하면 너는 고요히 그리고 주의깊게 그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라. '당신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24시간 후에 나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24시간이 지나야 대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르지예프는 자신도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간단한 원리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4시간 동안 계속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없다. 24시간 동안 계속 생각해 보면 그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옳다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그대를 바꾸면 된다. 만약 그가 틀렸다면 마찬가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의 문제지 그대의 문제가 아니다."
완전히 깨어있는 사람은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반응이 아니라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깨끗한 거울처럼 상대방을 비추어 준다. 어떤 판단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현재 의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대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대를 업의 사슬에 얽매이게 한다.
동양에서는 만 년 전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리고 실험도 해왔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신을 속박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또다시 태어나게 하는 업을 만들지 않고,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행동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사람이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업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그대의 손에 달렸다. 그대는 그대 행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행동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다. 좋은 행동이건 나쁜 행동이건 그대는 행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동양에서는 한 개인에게 대단한 존엄성을 부여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이 바로 개인에게 있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동양에서 구세주가 필요 없다. 그대가 바로 구세주이다. 다른 누구도 그대를 구원해 줄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를 구원해 줄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로 추해지기 시작한다. 그대는 구원받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구원할 수 있다면, 누군가가 그대를 생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구세주를 믿는 모든 종교는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해 버렸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사람이 업을 만들었다고,
그대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국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둘 다 초월할 수도 있다. 둘 다 초월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기독교에 없는 사상이다. 그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에만 있다.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에서 하나의 가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은, 즉 모크샤(moksha)는 없다. 지옥은 고통을 나타내고 천국은 기쁨을 나타낸다. 그리고 기쁨도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면 지켜온 법이다. 하지만 서양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계속되는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지겨워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대는 그것을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단지 고통이라면 그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그대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을 것이다. 나는 두통과 우울증으로 거의 십 년 동안 고통을 받아온 한 남자를 알고 있다 내가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시절, 나는 자주 산으로 가곤 했는데 그도 역시 같은 대학의 교수였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과 함께 갈 수 있을까요?" 나는 도시의 바보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싫었다. 그는 바보일 뿐만 아니라 우울증에 편두통 환자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좋소. 당신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오. 하지만 절대 두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시오. 나는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말이오." 그가 말했다. "무슨 종류의 알레르기입니까?" 내가 말했다. "누가 그의 병에 관해서 말할 때, 나도 똑같은 병을 앓게 되는 알레르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런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듣고 안 듣고가 문제가 아니오. 내가 바로 그 표본이오. 책에 나오고 안 나오고는 문제가 아니오. 두통에 대해서 말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데리고 산으로 갔다. 그때는 망고의 계절이었다. 산은 온통 망고나무의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무에 올라가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나무에서 떨어졌고, 나의 아버지는 그때마다 나무에 그만 올라가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무에서 여러 번 떨어져 보아서 떨어져 보아서 떨어지는 데는 명수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초보자가 아니예요. 저는 떨어지는 방법을 갖고 떨어져요. 그러니 이렇게 되살아나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를 다 익은 망고가 있는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그 위에는 앵무새들이 있었다. 앵무새들은 망고 열매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했다. "당신도 나와 함께 망고나무 위로 올라갑시다." 그는 놀랐다. "뭐라고요?" 나는 다시 말했다. "나무 위로 올라가자니까요." 그가 말했다. "나는 한번도 나무 위로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한번 해보시오. 당신에게는 좋은 모험이 될 거요." 그는 나무 위로 올라다가다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이상합니다. 나는 계속 머리가 아팠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일 뿐이오. 그러면 두통 같은 것도 사라질 것이오." 일 주일이 지난 뒤 그는 나를 다시 찾아와서 말했다. "나는 내 두통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처음에는 당신이 두통 때문에 계속 불평을 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그리워한단 말이오?" 그가 말했다. "내가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통은 나의 모든 철학이었습니다. 두통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게 동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나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그 산으로 갑시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다가 다시 떨어져 보시오. 확신은 못하지만 아마 두통이 다시 찾아올 것이오." 그가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두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을 내가 견뎌낼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입니다." 다음날 그는 나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두통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십 년 동안 갖고 있었던 두통이 없어지니까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행동을 지켜본다면 그대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그 담배가 자신의 폐를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자기의 건강을 망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부에서는 담배갑에다 '흡연은 당신의 건강을 해칠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도록 법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담배 회사들이 그 법에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 문구가 들어가고 나서도 담배 판매량은 전혀 줄지 않았다. 매년 흡연 인구는 수백만 명씩 늘어갔다. 그 문구는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담배를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담배가 매우 위험하고 그것을 피우는 사람에게 죽음을 재촉하더라도 그대는 계속 담배를 피울 것이다. 차라리 암에 걸릴지라도 그대는 담배를 끊을 수 없다. 그러나 달마는 말하고 있다. 그대는 그대 운명의 주인이라고, 그대는 모든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대는 자신의 생각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그대의 이차적인 성질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킬 수 있다. 젊고 신선한, 더욱 깨어 있는, 더욱 큰 이해력을 가진, 더욱 축복스럽고 환희스러운 존재를 그대는 만들 수 있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응보도 받지 않는다. 누가 완전한 사람인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모든 무의식을 몰아낸 의식적인 사람만이 완전한 사람이다.
지금 당장에는 그대의 의식은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대 존재의 십분의 구는 무의식으로 차 있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 전체가 의식적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어떤 어둠도 없다. 그의 존재 깊숙한 곳에는 오직 빛과 평화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며 어떤 업에도 매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음 생을 받지 않으며 윤회의 사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완전한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의 의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연꽃잎에서 미끌어진 이슬방울이 바다에 떨어졌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다르마를 성취한다."고 했다. 완전히 의식적인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안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의 본질이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이 사라짐과 함께 해탈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현이다.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그대는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삶과 죽음을 계속한다. 그대가 생각할수록 그대는 더 많은 편집병을 일으킨다. 프로이트는 죽음은 성과 같다고 생각했다. 성은 삶의 한쪽 면이다. 그것은 삶의 시작이다. 죽음 역시 삶의 다른 쪽 면이다. 그것은 삶의 끝이다. 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과 죽음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남아프리카에는 이상한 거미가 있다. 그는 태어나서 딱 한 번 교미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미 도중에 암컷이 그를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사마귀도 마찬가지이다. 암놈은 먼저 머리를 먹어 버린다. 그래서 성행위는 계속된다 .오르가슴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암놈은 나머지 몸통을 먹어 치운다. 같은 종류의 모든 거미와 사마귀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두 똑같은 운명에 빠진다. 그 거미와 사마귀의 종에서는 성과 죽음이 매우 가깝다. 인간에게도 성과 죽음은 멀지 않다. 성은 죽음의 시작이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기 앞에서는 죽음에 대한 어떤 토론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수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선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에게 배운 사람들은 정신분석의 창시자로부터 직접 배웠다는 자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이트가 죽음을 몹시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죽음'이라는 말을 일생에서 단 세 번만 언급했다. 누군가가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의 임종 순간에도 그 말을 못하게 했다. 그는 묘지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그는 묘지에 갔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말을 포기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현이다. 죽음을 넘어선 삶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내던져 버리라.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지식은 단지 말뿐이다. 사실 그들의 머리 속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만약 그대가 누구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죽음을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선택하라. 그런 사람은 분명히 마음을 초월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는 것과 마음을 초월하는 것은 같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현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이 문장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는 2,500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거기에는 어떤 위험도 없다. 그래서 부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살아 있는 부처와 대면하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다. 그는 그대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2,500년 전에 죽은 부처를 숭배하는 것은 아무런 위험이 없다. 그대는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불상을 지니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상은 그대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살아 있는 부처와 만나야 한다. 그와 접촉하는 것은 계속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는 그대가 사라지는 곳을 향하여 그대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존재할 것이다. 에고로서가 아닌 단지 순수한 의식으로서 말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진정한 스승은 바로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에고를 죽일 것이다. 제자들을 하나의 무로 만들 것이다. 바보들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세계이다. 당시의 책에서는 예수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제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에 대해서 어떤 기록도 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인간들은 예수 같은 사람이 살아 있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절반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는 또 처형당할 것이다.
뉴욕에 있는 한 성당을 맡고있는 주교는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왔다. 모든 준비가 다 잘되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요일에만 종교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요일 주교였다. 주교가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그자가 곧 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맙소사, 왜 그는 이곳에 왔을까? 그는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했을까? 그가 다시 온다면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먼저 그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혹시 예수처럼 행복하게 보이는 히피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그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는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상한 질문이군. 그대는 이 땅에서 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교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바티칸에 있는 교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지금 예수께서 이곳 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교황이 말했다. "나는 지금 수만 가지 걱정거리로 정신이 없다. 그런데 그대가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왔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지? 먼저 경찰에 알려라. 그 다음에는 바쁜 것처럼 행동하라." 만약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는 처음에 왔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곧 다시 올 것이다."라고 약속한 것처럼 벌써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간지 2천 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말로 지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온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왔다. 그리고 똑같은 사람들이 세월이 지난 후 그를 성자로 숭배한다. 죽은 예언자, 죽은 메시아로 말이다. 적어도 석가모니 부처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 다섯 번이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제 그의 불상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동상보다 많다. 그리고 똑같은 사람들이 그를 다섯 번이나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현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무심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곧 성현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실체는 그대가 시간과 공간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없다. 그대는 그저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대는 깨달은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부처를 발견할 것이다. 2,500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럴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을 때 후진기어를 넣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대는 곧장 앞으로밖에 갈 수 없다. 뒤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헨리 포드조차도 맨 처음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 후진기어를 장치하지 않았다. 신이 잊어버릴 수 있다면 가엾은 헨리 포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처음 차에 타고서야 비로소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집 앞을 5미터만 지나가도 그는 시가지를 다시 한바퀴 돌아야 했다. 후진기어를 만든 점이야말로 헨리 포드의 천재성이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헨리 포드를 만났어야 했다. 그러면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나 마하비라나 크리슈나도 모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후진기어가 필요한 것임을 느끼더라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는가? 깨달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없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란 자신의 존재를 중생에서 불멸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경에 이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대가 어디서 그것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이해력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경전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만이 경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경전의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 자비로워지라. 모든 사람에게 경전을 설법하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가슴에 씨앗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봄이 오면 그것은 싹이 틀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그들은 이전에 그 말을 들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속에는 분명히 어떤 것이 들어 있다. 아니 깨달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거기에는 이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조금만 더 두드려 맞기만 하면 된다. 조금만 더 같은 말을 들으면 그들의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를 무자비하게 가르치거나 불친절하게 만드는 경전의 말은 듣지 말라.
또 경에 일렀으되 "그대가 보는 모든 모양은 모양이 아니다. 그대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그 모든 꿈과 환상과 사념들과 함께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깨어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다. 혹은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똑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대의 마음은 사라지는 순간, 신성한 어떤 것이 그대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된다. 수많은 잎과 열매를 가지고 말이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무수히 많으며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의 모양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중생은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도 굶주림을 걱정한다. 거기에는 커다란 불안이 항상 있다. 그러나 성현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도 매이지 않는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 역시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매 순간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어디에 집착하겠는가? 집착은 그대에게 불행만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러니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지 않았다. 그것이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순간 순간 그들은 도를 따라 산다. 이 한 문장이 감추어진 종교의 모든 비밀이다. 완전한 깨어 있음과 자발성 속에서 순간 순간 그들은 기쁘고 평화스럽게, 고요하고 완만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이해도 깊어진다. 그들의 인식이 최고봉에 이를 때 모든 순간들이 낙원으로 변한다. 그때 구름 속에 있는 낙원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때 낙원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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