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파하라! 불성에 이를 때까지
달마어록 혁파론 革破論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나무와 같다.
모든 과일과 꽃들, 그리고 모든 가지와 잎들이 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불순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동을 기뻐하며 불순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곧 성현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은 불순한 마음의 덫에 걸려서 자신의 업에 얽매여 있다. 그들이 곧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집착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의 불순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가리는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부서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오감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독 안의 빛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나와 남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깨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는 모든 미덕과 열반의 과실을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한다. 혁파하라! 불성에 이를 때까지...,
오늘 아침에 이야기할 어록은 달마가 혁파론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나는 '혁파(breakthrough)'라는 단어를 그대가 이해하기 원한다. 그대도 알다시피 '혁파'라는 단어와 비슷한 말로서 '파열(breakdown)'이란 단어가 있다. 마음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 긴장과 고통과 번민 속에서 마음은 파열될 수 있다. 그러나 파열은 혁파가 아니다. 파열은 그대가 마음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다. 그러나 혁파는 깊은 침묵 속에서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깨어 있음 속에서 말이다. 그때 그대는 마음을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넘어설 때만이 진짜 제정신을 차릴 수 있다. 마음은 항상 군중을 대표한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대 속에서 지성은 자라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면 지성은 그대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혁파이든지 파열이든지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그대는 마음을 벗어나게 된다. 깨달은 사람과 미찬 사람이 일종의 비슷한 점을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친 사람은 그의 마음이 파열 상태에 있다. 그는 마음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 역시 마음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혁파를 통한 것이다. 그는 마음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초월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맑은 상태를 경험한다. 그것은 위대한 지성이다. 마음은 그런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둘 다 마음을 벗어난 데 있어서는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마음은 깨달은 상태와 제정신이 아닌 상태 이 두 가지를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동양이나 서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양에서는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서양의 심리학은 어떤 혁파도 믿을 수가 없다. 마음을 벗어나는 것은 모두 미친 것이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많은 미친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으로 숭배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마음을 벗어나는 것을 혁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친 사람들을 몇 명 만나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신으로 숭배받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자발푸르(Jabalpur) 근처의 한 마을에는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주위에는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그의 존재에는 어떤 기쁨도 없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아서 그 남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곤 했다. 그는 거의 차만 마시고 살았다. 그가 차를 마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몸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을 겨우 반만 벌리고 차를 마셔야 했다. 더 이상은 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그가 흘린 침은 계속 차에 떨어졌다. 그것은 추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추종자들은 그가 남긴 차를 신의 선물로서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이 우스꽝스런 장면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어디에나 미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종종 미친 사람이 깨달은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깨달은 사람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된다. 서양의 심리학과 동양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조화로운 결합이 필요하다. 그것은 완전히 대칭적인 관계에 있다.
파열의 상태는 그대를 짐승의 상태로 이끈다. 그리고 혁파의 경지는 그대의 불성이 꽃피는 상태로 이끈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쉽게 구별될 수 있다. 혁파는 오직 명상자에게만 일어난다. 파열은 마음이 긴장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그들의 긴장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서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미친 상태에 이른다.
달마의 이 설법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동양은 수세기 전부터 미친 사람과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둘 다 마음을 벗어났지만, 하나는 마음을 초월하여 별을 향해 가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공간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혁파는 바로 명상의 과학이다.
이제 어록으로 들어가자.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을 인식하는 길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보는 것이 강해질수록 그대는 이미 자신이 마음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는 마음과 점점 멀어진다. 그대의 지켜봄은 햇빛이 밝게 비치는 봉우리 꼭대기 위에 있고, 그대의 마음은 어두운 골짜기 속에 있다. 그대는 계속 마음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대는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을 넘어서 있다. 제자가 또 질문한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나무와 같다. 모든 과일과 꽃들, 그리고 모든 가지와 잎들이 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 자신과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마지막 괄호 속 문장은 내가 덧붙인 말이다. 이제 달마가 말하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여기에 나온다. 만일 그대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해'란 말은 오해될 소지가 있는 말이다. 서양의 심리학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오늘날의 심리학은 서양의 심리학을 정설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의 심리학은 마음을 분석함으로써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그것은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한 층을 벗겨내면 또 다른 껍질이 나온다. 좀더 신선한 껍질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그것을 벗겨내면 또 다른 껍질이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보통 정신분석의 치료를 15년 간 계속 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요법에서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은 그 방법으로는 단 한 사람의 마음도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들 인정한다. 계속 정신분석을 해 나가다 보면 아무것도 거기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다. 마음은 결코 전체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분석할 동안 그것은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그대는 2주, 3주 동안을 계속 분석하지만 마음은 더 많은 생각들과 상상들, 더 많은 꿈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그대의 노력은 끝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대가 끝까지 이를 수 없다면 마음에 대한 그대의 이해는 매우 표면적인 것이 되고 만다.
동양에서는 분석을 믿지 않는다. 동양은 각성을 믿는다. 그것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분석에 있어서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의존 상태를 만들어낸다. 일종의 거의 새로운 부가물이다. 사람이 한번 정신분석에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무척 힘들다. 적어도 정신분석을 받는 일 주일에 두 번 정도는 긴장이 풀어지고 짐을 벗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마음이 긴장을 더욱 끌어 모으게 된다. 그대는 마음의 잎을 더욱 무성하게 키웠다. 그대가 하나의 잎사귀를 잘라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면 놀랄 것이다. 그대가 잘라낸 가지에서 세 장의 잎이 나온다. 나무는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대는 잎을 한 장씩 잘라내어서는 결코 그것을 없앨 수 없다. 그것 역시 살아 있는 존재다. 그것은 살아 남는 능력을 그대에게 보여준다. 그대가 더욱 무성한 잎을 원한다면 한 장씩 잘라 내어도 좋다. 그것은 잘라낼수록 더욱 무성해질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대가 정신분석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 약물중독처럼 그대가 점점 깊이 빠져들 때,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이 생겨날 때, 서양의 심리학자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빌려온 약물까지 사용하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그대는 한 사람의 정신 분석가에게 지겨움을 느낀다. 그러면 또 다른 치료자를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약물에 대한 면역성만 키우는 꼴이다. 점점 더 강하고 더 위험스런 약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약물에도 면역이 생긴다. 그것은 더 이상 그대에게 효험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면 그대는 다시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나는 라다크(Ladakh)에 있는 승원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코브라를 길들이고 있다. 인도에서는 약물을 통해 각성을 얻으려는 학교도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과학적인 것이다. 그것의 접근 방법은 매우 과학적이지만 또한 매우 위험하다. 사람은 한순간에 잘못될 수가 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 일은 스승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소량의 약물을 섭취해서 면역이 생긴 다음 더 강한 약물을 복용한다. 그러나 강한 약물조차도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약효도 내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시점에 이르면 코브라의 독은 약간의 효과를 미치게 된다. 그는 코브라의 독에 결코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진다. 아마 그대는 그 장면을 보면 놀랄 것이다. 보통 사람은 코브라에게 물리면 살아 남지 못한다. 그러나 라다크에서 내가 본 고행자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아삼(Assam)이나 나갈란드(Nagaland) 등지에도 많이 있었다. 코브라는 그들의 혀를 물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혀에 물려야 독이 빨리 퍼져서 약효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코브라가 그들에게 물려 죽은 모습을 보면 굉장히 놀랄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강한 독을 몸에 갖고 있다. 불쌍한 코브라를 죽일 만큼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통과 과정이다. 사람이 코브라에 물려 죽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코브라를 물어 죽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종류의 독에 대해 면역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의 기본적인 방침은 역시 참가자를 각성시키는 데 있다.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독도 그대에게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전 과정이 이상스런 학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대단한 각성을 얻게 된다. 정신분석은 부드러운 마약이다. 그대가 한번 익숙하게 되면 한 명의 정신 분석가에게 면역이 생긴다. 그러면 그대는 더 강한 사람을 찾아가게 된다. 그는 그대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첫 번째 사람이 못 찾아내던 장애물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것은 계속 된다. 정신분석은 거의 일 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그의 마음을 이해시켜 주지 못했다. 그것은 완전히 실패작이다. 깨어 있음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 속에 있던 새로운 힘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어떤 분석도 하지 않고, 어떤 판단이나 해석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마치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그대는 마음과 분리되어서 마음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이 분리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마음은 하나의 기생충이다. 그것은 그대의 피를 먹고산다. 그대의 에너지를 빨아먹고 생존하는 것이다. 그대가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갈 수 있다. 그대가 그것의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전 과정이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뿌리를 자르지 않는다.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계속 잎사귀만 잘라낸다. 그러면 그 가지와 잎들이 더 무성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들이 다른 전문의보다 미치는 확률이 네 배나 높은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직업보다 자살율이 네 배나 더 높다. 이것이 정신 분석가들의 상황이라면 그들의 환자들은 어떻겠는가? 환자들은 완전히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이 가장 높은 보수를 받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워한다는 농담이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을 만들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 덕분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목사와 성직자들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결코 자신들을 용서할 수 없다. 이제 가톨릭은 가장 부유한 종교 조직이다. 유대인들은 괜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으로 해서 엉뚱한 사람들이 돈벌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마르크스를 통해서 복수를 했다.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는 유대인이다. 만약 세계의 반이 기독교인이라면, 또 나머지 반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를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열세를 좀더 만회했다. 프로이트도 유대인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독교도 공산주의도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모든 존엄성을 파괴했다.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말살해 버렸다.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그대는 신의 손안에서 노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신이 그대로 하여금 춤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춤을 춘다. 신이 그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면 그대는 울어야 한다. 그대는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는 결국 정신분석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에게서 존엄성을 빼앗아 간다. 이제 전 세계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환자들이 정신과 의사들의 손안에 있다. 그리하여 환자들은 의사들을 아버지의 모습처럼 의존하고, 그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의사 자신들도 똑같은 병으로, 똑같은 정신분열증으로, 똑같은 이중 인격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동양에서 신비가들에 의해 제시된 치료 방법은 먼저 환자에게 존엄성을 심어 주는 것이다. 그에게 긍지를 심어 주고 그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대는 감추어진 각성의 원천을 갖고 있다. 단지 그것을 깨어나게만 하면 된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마음과 분리되어서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대가 그것과 분리되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의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정신분석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마음은 곧 말라죽을 것이다. 그러니 분석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달마가 각성과 지켜보는 것은 마음을 혁파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한번 그대가 마음을 넘어서는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 그대는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빛과 영원한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는 영적 완성과 자유를 얻게되며, 마음이 꿈도 꿀 수 없었던 엄청난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정신 분석가들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훈련하고 남도 치료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헛된 수고이다. 그것은 시간과 생명과 에너지의 낭비이다.
정신분석은 동양의 신비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에 커다란 변형이 일어나서 비로소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와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직업을 잃는 데에 있다. 많은 돈을 벌어온 수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그들의 직업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사실을 지성적으로 이해했다 해도 그는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축적해온 재산을 파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의 치료하는 환자가 낫기를 바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세상에서 환자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물론 그들은 환자들이 죽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죽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지 않고 완전히 건강하지도 않은 상태로 계속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돈도 많이 벌고 그들의 직업도 계속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무의식이다. 어떤 의사도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한 젊은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고, 그는 자신의 아들 역시 의사를 만든 것이다. 그 젊은이가 개업을 한 첫날 어떤 늙은 여자가 왔다. 그녀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다니던 환자였다. 그는 그녀가 아직도 낫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말했다. "이제 제가 여기에 있으니 아버지는 좀 쉬십시오. 제가 환자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서 그는 아버지에게 다시 말했다. "아마 놀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30년 동안 고치지 못했던 그 여자의 병을 제가 사흘만에 고쳤습니다." 그 아버지는 화가 나서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때렸다. "이 바보 녀석아, 그녀는 줄곧 네 교육비를 대 왔다. 그녀는 매우 부자란 말이다. 그러니 너의 두 동생도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녀는 계속 아파야 한단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튼튼하다. 쉽사리 죽지 않아. 그러니 너는 그녀를 계속 어느 정도 아프게 놔뒀어야 했단 말이다." 그 젊은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먼저 기본 법칙을 매워라. 만약 가난한 사람이 그대에게 오면 그를 빨리 고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가 오면 그때는 시간을 끌어서 천천히 고쳐 주도록 하라."
중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수천 년 동안 매우 다른 의료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체계가 미래 인류의 의료 체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의사가 환자로부터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 환자의 병이 회복되면 감사에 대한 사례를 받지 않는다. 병이 회복되면 감사에 대한 사례를 받을 뿐이다. 모든 의사들이 자신의 환자를 갖고 있고, 그 환자들은 건강을 회복했을 때 의사들에게 사례를 한다. 만약 그들의 병이 낫지 않으면 의사들은 대가를 받지 못한다. 의사는 자신의 비용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이것은 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도입되고 있다. 그리고 도입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모든 사람은 정해진 의사가 있다. 의사에게는 특정 구역이 정해진다. 만약 그 구역 사람들이 건강하면 그들은 의사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프면 그때는 의사 자신의 돈으로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히 의사들은 환자를 신속하게 치료할 것이고 아무도 아프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세계에서 어떤 다른 나라보다 건강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과 의사들도 그들의 환자가 완전히 낫게 될 때만 돈을 받아야 한다. 환자가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마음의 장난 속에 빠질 때는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의 부담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함을 의지하는 것은 그대에게 자유와 존엄성을 가져다 준다.
마음은 그 뿌리부터 잘라나갔기에 곧 그 가지들도 말라 버린다. 그리고 마음의 공간은 더 이상 다른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순수하게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실체이며 참 존재이다. 단지 나는 마지막 줄만큼은 달마에게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달마 자신의 말인지 제자들이 잘못 붙인 주석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말한 마지막 줄은 잘못되었음을 그대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인간 성장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것이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것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 자신을 찾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마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은 덧붙이지 않고서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마음이 미친 사람처럼 파열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도 마음을 정지시킬 수 있다. 사실 모든 것은 마음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그대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물거품이다. 그것은 모래성이다. 바람이 불어오거나 물결이 쓸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대는 그 허구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산다. 그것을 벗어나서 밖에서 지켜보라. 그러면 허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또 묻는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불순함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위대한 보살이 되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대는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러면 순수함과 불순함을 구별할 수 있다. 거기에 순수한 활동이 있고 순수하지 않은 활동이 있다. 그대는 사랑을 갖고 있다. 그대는 증오를 갖고 있으며 평화와 긴장을 갖고 있다. 그대는 자비심을 갖고 있고 잔인함도 갖고 있다. 그대는 창조성을 갖고 있고 파괴성도 갖고 있다. 굳이 위대한 보살이 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마음의 두 가지 면을 알 수 있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동을 기뻐하며 불순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곧 성현이다. 나는 또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를 불러올 것이다. 어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곧 성현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순수함에 물들어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성현에 대한 올바른 정의이다. 순수함이나 불순함이나 물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순수함에 물들어 있다면 불순함에 물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순수함이나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성현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은 불순한 마음의 덫에 걸려서 자신의 업에 얽매여 있다. 그들이 곧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집착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의 불순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가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대 자신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과 같다. 사실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러나 그 먹구름 때문에 그대는 태양을 볼 수 없다. 태양은 먹구름에 물들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단지 먹구름이 그것을 가리고 있어서 밤처럼 어두컴컴해 보일 뿐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부서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오감에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독 안의 빛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깨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했다.
마음으로부터 해탈은 순수함과 불순함으로부터 해탈, 선과 악으로부터 해탈, 신과 악마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이중성으로부터 해탈해서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선행은 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는 모든 미덕과 열반의 과실을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한다. 이 말을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도덕 론자나 청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왔다. "선행을 하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친절함을 배워라. 독신생활을 하고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라. 그대는 모든 선한 자질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달마는 내가 전생애 동안 말해 왔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훈련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것들은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그대는 자신 속에 더 많은 각성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그때 그것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훈련을 통해 그런 덕목을 갖추게 된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이다. 그것은 뿌리가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가면일 뿐이며 그대 본래의 면목을 바꿔 주지 못한다. 도덕 종교와 진정한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 도덕 종교는 그대에게 표면적인 것만 가르친다. 남들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신사가 되라. 폭력을 쓰지 말라. 자비로워져라. 잔인함이나 분노, 탐욕 같은 것을 모두 버려라.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지 말라. 그대는 이렇게 해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모든 종류의 바보들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성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려운 곳을 잠시 긁어 주는 것일 뿐이다. 갑자기 그대 속에서 야만성이 폭발하면 그대가 그동안 훈련해온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설교만을 계속 반복하는 기독교 성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항상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 속에서 나온 것이어야만이, 그대의 깨어 있음 속에서 나온 것이어야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훈련을 통해 얻은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루는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한 덜떨어진 친구가 그 성자가 정말로 다른 뺨을 돌려 대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보여 주십시오. 당신이 항상 우리에게 말한 것을 말입니다." 그 사람은 레슬링 선수였다. 그래서 그 성자는 무척 겁이 났다. 그 사람이 성자에게 다가와서 뺨을 한 대 쳤다. 그 성자는 자신의 말을 지켜야 했다. 다른 쪽 뺨을 돌려 대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 친구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틀림없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레슬러는 진짜 덜떨어진 친구였다.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다른 뺨도 내리쳤다. 그때 갑자기 그는 매우 놀랐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그 성자가 갑자기 그 레슬러에게 뛰어올라 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레슬러는 그 성자가 그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슨 짓을 하십니까?"라고만 물었다. 그 성자가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느냐고? 예수께서는 '다른 쪽 뺨을 대주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세 번째 뺨을 대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제 나는 그 가르침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그대에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보여 줄 것이다." 그것은 훈련하기 매우 쉬운 것이다. 훈련이란 단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매우 표면적인 것이다.
산야신 한 사람이 며칠 전에 나에게 와서 물었다. 그녀는 저녁 설교가 끝난 후에 숙소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뿌나에는 오토바이 족들이 있다. 그들은 그 가엾은 여자를 멈추게 하고는 한쪽 유방을 꽉 쥐었다. 그들은 그것을 '힌두 문화'라고 불렀다.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다른 쪽 유방도 내어줘야 합니까?" 사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심각한 문제를 던졌다. "당신은 그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까?"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수는 도덕론자가 아니다. 그대는 다른 뺨을 대어줄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다른 쪽 유방도 대어줄 필요가 없다. 반대로 그는 그 사내의 뺨을 될 수 있는 한 세게 올려붙여야 한다. 그들은 힌두교 광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이상한 에고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이곳이 문화의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뿌나는 죽은 도시다. 그것은 하나의 묘지나 마찬가지이다. 묘지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 유령들이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 유령들은 여자의 유방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살면서 오직 여자 유방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죽고 나서도 그 버릇이 계속되는 것이리라. 그녀의 질문은 나에게 한 정신과 의사들의 학회를 생각나게 했다. 한 늙은 정신과 의사가 학회에서 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제자였다. 그런데 맨 앞줄에 매우 젊고 매력적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정신과 의사였다. 그런데 그녀 옆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갑자기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도 매우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그 장면을 본 그는 논문을 읽어 내려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눈을 내리뜬 채 논문에만 고정시키고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 늙은 의사는 본격적으로 여의사의 젖가슴을 만졌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논문 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여자란 말인가?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지만 매우 못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성은 사람을 바꾸어 주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을 더욱 위선적으로 만들 뿐이다. 문 앞에는 깨끗이 색칠하고 성자의 그림을 걸어 놓지만, 문 뒤에는 갖가지 더러운 것이 숨어 있다. 그는 겨우 발표를 마쳤다. 그는 발표를 하는 동안 계속 그 여자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제대로 발표를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강단에서 내려와 바로 그녀에게 갔다. 그제서야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은 그녀의 젖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그 여의사에게 물었다. "내가 논문을 발표하는 동안 이 친구는 계속해서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를 내버려두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정신과 의사예요. 그것은 그의 문제예요. 그는 비록 늙었지만 정신연령은 아직 어려요. 그것이 문제예요. 그러니 당신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그는 약간 당황했다. 그 노인의 문제는 자기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도 논문을 발표하는 동안 계속 그녀의 유방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는 차라리 그 노인과 자리를 바꾸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소위 도덕군자들, 소위 설교가들, 정신분석가들, 철학자들, 그들은 모두 표면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복잡한 문제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마음을 뿌리째 잘라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황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모든 선행은 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는 모든 미덕과 열반의 과실을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한다. 달마의 이 말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는 모든 도덕론자들, 청교도들, 소위 성자들, 소위 착한 사람들을 초월한다. 그는 문제의 근원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그대에게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대의 모든 도덕성은 거짓이다. 그대의 모든 교양도 단지 표면적인 것이어서 누군가에 의해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그대의 도덕성이 훈련된 거시 아니라 그대의 각성, 그대의 깨어 있음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문제가 달라진다. 그때 그대는 모든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은 것이다. 깨어 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악한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음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아름다운 것이다. 옳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노력이나 훈련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잎과 가지를 자르는 것보다는 뿌리를 자르라. 그 방법밖에는 없다. 깨어 있는 것, 좀더 의식적으로 되는 것, 그대를 통해 나오는 모든 것이 존재계를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좀더 성숙하게, 좀더 신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의 각성은 그대만을 꽃피우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 향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깨어 있음은 신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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