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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전

구장춘 진인 丘長春 眞人, 구처기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5. 3.

구장춘 진인 丘長春 眞人, 구처기

 

 

 

징키스칸을 만나러 서역에 가다

丘處機구처기(1148∼1227)는 금나라와 원나라 초기의 도사이다. 도교의 한 갈래인 全眞道전진도 北七眞북칠진중의 한명이다. 자는 通密통밀이고 호는 長春子이다. 長春眞人장춘진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산동출신으로 19세 때 출가했다.

출가한 다음해에 왕중양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받들었다. 왕중양을 따라다니면서 玄機현기를 체득했다. 스승 왕중양이 우화등선 한 후 구처기는 섬서성 磻溪반계 동굴 속에서 6년을 머물며 고심 수도하였다. 후에 龍門山용문산에서 스스로 분발하여 성심을 다하여 7년을 닦았다.
明昌명창 원년(1190) 금나라 章宗장종이 "중생을 현혹하고 백성을 어지럽힌다(惑世誣民혹세무민)."는 구실로 조서를 내려 도교를 금지했다. 이에 구처기는 고향인 산동으로 돌아왔다.

貞祐정우 2년(1214) 가을 산동에서 일어난 楊安兒양안아 의군이 투항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금나라 조정과 남송이 앞 다투어 사자를 파견하여 초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원 태조 징기스칸이 구처기의 이름을 듣고 몽고에서 사자를 보내 초청했다. 장춘진인은 의연히 제자 18명을 거느리고 래주를 출발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리 길을 걸었다. 온갖 고난을 겪고 2년만에 서역 大雪山대설산에 도착했다.

징키스칸은 장춘진인에게 "어떻게 천하를 통치해야 하는가?(如何治理天下)"묻는다. 장춘진인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敬天愛人)을 근본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응답했다.

징키스칸이 또 "오래 살아 장구히 볼 수 있는 도(長生久視之道장생구시지도)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장춘진인은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적게 하는 것(淸心寡慾청심과욕)이 관건입니다. 천하를 통일하고자하면 살인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징키스칸은 그 말에 깊이 공감을 하였으며 장춘진인 일행을 융숭히 접대하고 장춘진인을 신선으로 존경하였다.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다

나중에 장춘진인의 제자 李志常이지상은 이때 스승을 따라 서역에 갔다 온 것을 기록하여 "長春眞人西遊記"장춘진인서유기를 남겼다. 장춘진인은 燕京연경(현 북경시)으로 돌아온 후 징키스칸은 범 모양의 兵符병부와 옥쇄가 찍힌 문서를 내려서 장춘진인이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관과 도사는 일체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래서 장춘진인은 출가증명서인 度牒도첩을 널리 발행하고 長春장춘, 靈寶영보 등에 도교모임 8개를 세웠다. 대량으로 도교의 宮觀궁관을 건립하였고 제단을 만들고 醮祭초제를 지냈다. 일시에 도교의 문호가 사방에 열렸고, 도사들이 구름처럼 모여 全眞道전진도가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원 태조 22년(1227) 장춘진인은 보현당에서 우화등선하였는데, 白雲觀백운관 處順堂처순당(현 북경 白雲觀백운관 丘祖殿구조전)에 영구를 안치했다. 원 세조 至元지원 6년(1269)에 "長春演道主敎眞人"장춘연도주교진인으로 봉했다. 원 무종 지대 3년(1310)에 다시 "長春全德神化明應眞君"장춘전덕신화명응진군으로 봉했다.

후세 사람들은 장춘진인이라 부른다. 장춘진인의 맥을 잇고 있는 龍門派용문파는 지금까지도 대만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전진교를 傳承전승한 주요한 교파이다.

이 용문파는 장춘진인이 隴縣농현 龍門洞용문동에 은거하여 수련하였으므로 얻게 된 이름이며 전진도 문하에서 영향이 가장 큰 道派도파이다. 용문파는 기본적으로 王重陽왕중양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淸心寡慾청심과욕이 수도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 기공과 기치유
글쓴이 : 조화도술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