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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전

주나라 창업 공신 강태공, 여상(呂尙)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4. 20.

주 문왕, 사냥에서 강태공을 얻다

姜太公강태공, 呂尙여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다. 일화도 많고 경세가, 병법가로 알려져 있으며 주나라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일등공신이다. 은나라 말기 東海동해 사람으로 四岳사악의 후손이다. 성은 姜강이고 이름은 尙상인데 그 윗대 조상들이 呂여 땅에 봉해졌으므로 呂尙여상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牙자아다.

때는 바야흐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폭정으로 은 왕국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은나라 서쪽에 자리한 제후국 周주는 당시 훌륭한 군주인 昌창이 다스리고 있었다. 천자인 주왕이 너무 포악해 인과 덕이 없고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현실을 보고 한숨을 내쉴 때가 많았다.

어느 날 西伯서백 창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이번 사냥에서 어떤 짐승이 잡힐 것인가 점을 쳐보았다. 역관이 산가지를 던지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백 창이 재차 "무엇이 잡히는가?"물었다. 이에 점술가는 "용도 아니고 뿔 없는 이무기도 아니며, 곰이나 범 따위의 짐승도 아닙니다. 사람이 잡힙니다. 천하의 으뜸가는 패왕의 보좌가 될 만한 인물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강태공, 위수에서 세월을 낚다

이날 사냥에서는 토끼 새끼 한 마리도 못 잡고 渭水위수 강가를 지나는데 낚시하는 노인 한 분이 강가에 호젓이 앉아 있었다. 그림같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이 노인이 누구인가? 바로 동쪽 바닷가에서 생계능력이 없다고 아내에게 구박받다가 마누라도 떠나고 본인도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 머물던 강상 노인이었다. 이때 강상의 나이가 거의 80세였다고 한다.

서백 창이 낚시하던 강상노인과 잠시 나눈 대화에서 그 인물을 알아보고 수레에 태워 돌아와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서백 창은 "일전에 우리 선고(先考 : 돌아가신 부친)이신 太公태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이치를 통달한 분이 주나라에 와서 우리 주나라가 그로인해 일어난다."고 하시더니, 선생께서 바로 그 분이 아니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공이 오랫동안 바랐던 사람이라는 뜻으로 太公望태공망이라 하면서 師父사부로 삼았기 때문에 師尙父사상보 또는 태공이라고 했다.

지금도 한가로이 낚시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낚시꾼을 姜太公강태공이라 한다.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다

강태공은 주 문왕 서백 창의 아들인 武王무왕을 도와 殷은의 주왕을 멸하고 천하를 얻게 했으며 그 공으로 濟제 땅에 봉해졌다. 강상을 시조로 하여 동쪽 산동성 일대 제나라는 800여 년의 역사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강태공이 벼슬하기 전 여러 가지 일화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강태공은 젊어서 仙道선도에 마음을 두어 32세 때 곤륜산에 입산하여 元始天尊원시천존의 문하에서 수도를 했으나, 道도를 이루지 못하고 72세 때 스승의 명에 따라 하산하였다. 40여 년 간 수도생활을 하다보니, 친척도 친구도 모두 없어지고 생계유지도 막연하였다. 생각 끝에 과거 결의형제를 맺었던, 殷은나라 수도인 朝歌조가에 살고 있는 宋異人송이인을 찾아 의지하게 되었다.

강태공의 홀아비 생활을 측은히 여긴 송이인은 馬氏마씨라는 여자를 소개하여 살도록 하였다. 강태공이 72세 때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꾸리고 송이인의 보살핌으로 1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나 마냥 남의 신세만 질수도 없는데 도만 닦던 사람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 생계가 막연하였다.

하는 일마다 실패, 마누라 성화 갈수록 태산

72세 때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하던 姜太公강태공은 1년간 생계수단이 없어 친구인 송이인의 도움을 받다가 친구보기도 미안하고 馬氏마씨 부인의 성화도 심하여 대조리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조리를 한 짐 지고 은나라 수도인 조가의 성안을 몇 바퀴 돌았으나 한 개도 팔지 못하였다. 강태공은 대나무만 축내고 다시 장사를 궁리하던 중 국수장사를 시작하였다.

국수전을 펴고 하루 종일 기다려도 사는 사람이 없어 성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국수 1전어치를 달라고 하였다. 막 국수 짐을 내려놓고 국수를 말려 하는데 때마침 군사훈련 중이던 군마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나면서 국수 짐을 밟고 지나가 버렸다. 국수 한 그릇 팔지 못하고 국수를 모두 버리고 만 강태공이 힘없이 집에 돌아오자, 부인 마씨가 또 남편의 무능력을 거론하여 한바탕 부부싸움을 하였다.

이때 친구 송이인이 찾아와 부부싸움을 말리면서 "내가 조가에 30개가 넘는 음식점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가게를 하루 빌려 줄 테니 한 번 해보시오."라고 하였다. 그 말에 힘을 얻은 강태공은 그 음식점이 평소에 팔리는 분량만큼 소와 돼지는 물론 밥과 만두 등을 충분히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큰 비가 쏟아져서 손님이 오지 않았다.

더욱이 음식점 근처에 군사훈련 교장이 있어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끝나면 음식을 사먹었는데, 폭우로 훈련이 취소되어 병사들마저도 오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더워서 장만해 놓은 음식이 다 상하고 말았다.

강태공, 몸만 간신히 도망하다

이번에도 본전까지 날린 강태공은 다시 송이인의 권유로 소, 돼지, 말 등을 잡아서 파는 고기장사를 시작하였다. 짐승을 잡아 조가에 내다 팔려고 시장으로 갔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그때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려고 禁酒令금주령과 禁肉令금육영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것을 모른 채 조가의 성안으로 들어갔던 강태공은 고기를 모두 압수당하고 몸만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전에 배운 선도를 활용하여 운명감정소를 차려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법술로 요괴를 잡게 됐다. 이것이 은나라 주왕의 귀에 들어가 下大夫하대부를 제수 받았다.

모처럼 만에 생활이 안정되었으나 鹿臺녹대의 공사감독을 맡은 강태공은 공사의 부당성을 간하다가 은나라 주왕의 비위를 거슬러 도망길에 올랐다. 이때 강태공이 마씨 부인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했으나 마씨 부인은 함께 도망가봐야 이전처럼 고생할 것이 뻔하다고 거절해서 각자 제갈 길로 갈라섰다.

팔십년은 곤궁하게, 팔십년은 영달을 누리다

하는 수 없이 혈혈단신으로 주나라 岐山기산 밑에까지 피신한 강태공은 渭水위수 강가에서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 그러다가 80 나이에 周주 文王문왕에게 발탁되어 주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문왕의 아들 武王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중국을 800 년 동안 다스릴 기반을 이루었으며, 강태공 자신은 三公삼공의 하나가 되어 濟제 땅에 봉해지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강태공은 16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강태공의 평생을 두고 "팔십년은 곤궁하게, 팔십년은 영달을 누렸다(窮八十, 達八十)"라고 한다.

列仙傳열선전에 따르면 강태공은 태어날 때부터 예지력을 지녀 생사존망을 미리 내다보았다고 한다. 200여 세가 되어 사망했는데 그 아들 呂伋여급이 장례를 치르려고 관 안을 살펴보았더니 유해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고 그 속에 저서인 "玉鈐옥검 6편"만 달랑 놓여 있었다고 한다.
 

출처 : 기공과 기치유
글쓴이 : 조화도술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