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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도 인물

단학인물고 (12) - 연개소문(淵蓋蘇文)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5. 14.

연개소문(淵蓋蘇文) 연 대 : 7~666(보장왕 25) 성 : 淵 주요업적 : 唐 太宗의 大軍을 막아냄(道敎를 중흥시킴) 중국의 군림(君臨)과 방자(放恣)함에 대항하여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자주민족의 기개를 온 천하에 떨치어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고구려가 제28대 보장왕(AD668년)을 끝으로 우리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려 했을 때 하늘도 이를 애석하게 여겼음인지 한 인물을 보내어 고구려의 혼과 얼을 마음껏 떨치게 했으니 그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의 이름은 혹은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도 불리우는데 이는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가인 역사가 김부식(金富軾)이 당시에 중국의 당고조(唐高祖)의 이름이 연(淵)인 까닭에 이것을 꺼리어 그 뜻과 훈(訓)이 거의 같은 천(泉)으로 바꾸어 쓴 것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비위에 거슬릴까하여 고쳐 쓰거나 없애는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던 역사가들에 의해 찬란했던 우리의 역사는 송두리채 그 자취를 감추고 일부 뜻있는 사람 들에 의해 기록되었거나 구전되는 사실들마저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이유를 들어 배격하려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음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세족(世族)으로서 고구려 말에 대인(大人)의 계통을 받아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며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었다. 개소문은 그 몸집이 크고 의기가 뛰어났으며 그 영특함은 이미 15세 때부터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 직위를 계승할 때 뭇사람-친당(唐)파-들은 그를 경계하여 그의 직위 계승을 거부하였으나 그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직위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만일 옳지 못한 일을 할 경우 죽여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그 후에 국정에 참여되자 그는 당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동북으로는 부여성에서 남으로는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천여 리를 이은 장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갔다. 그는 장성을 쌓는데 있어 남자들은 성을 쌓게하고 부녀자들에게는 밭을 갈게 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이는 당나라가 수나라를 이어 건국한 나라인지라 수나라가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당한 패배의 고배에 대하여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리라 예견하였기 때문에 서둘러 성을 쌓은 것이요 성뿐 아니라 농사 또한 중요했으므로 밭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소문은 날이 갈수록 그의 타고난 위용과 수완으로 세력을 점점 넓히어 나갔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은 그의 세력에 겁을 먹고 몰래 영류왕과 의논하여 그를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밀의는 누설되어 개소문의 귀에 들어갔다. 어느날 개소문은 자기 휘하의 병사를 불러 성의 남쪽에 모이게 하고 술잔치를 벌여놓고 여러 대신들과 요인들을 청하였다. 대신들과 요인들은 개소문의 초청을 받고 연회석상에 출석하였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희생된 사람은 180여명이라고 한다. 곧이어 개소문은 궁궐에 들어가서 영류왕을 시해(弑害)하고 왕의 조카 보장(寶藏)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이 때부터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되어 병마권을 한 손에 쥐고 국사를 도맡아 처리해 나갔다. 그는 수염이 거창하고 항상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어 좌우의 사람들은 그의 위용에 눌려 감히 쳐다 보지도 못했다고 하며 거리에 나갈 때는 전위대가 앞장서서 큰 소리로 행인을 막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은 두려운 나머지 구렁텅이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한 손에 쥐자 가장 놀란 것은 당태종 이세민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휘하 무관을 모아놓고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막리지가 되어 그의 안중에는 당나라가 없으니 짐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지라 우리 대당(大唐)이 온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가면 이것을 빼앗아 버리기는 하루 아침의 일이기는 하나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 글안과 말갈같은 오랑캐들을 이용해서 치는 것이 어떠할까?”하고 물었다. 이때 여러 무관 중에서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일어나 “연개소문이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방비를 심히 굳게 하고 있다 하오니 폐하께옵서는 당분간 은인자중하시와 그 빈틈이 생기기를 기다려 쳐도 늦지 않을까 생각하나이다”하였다. 당태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정벌계획을 뒤로 미루었다 한다. 연개소문은 이처럼 국방을 튼튼히 하여 감히 당과 같은 나라마저도 침범할 생각조차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져 보장왕 2년(643)에 “삼교(三敎)는 세 발(鼎)과 같은 것이오니 어느 것이나 하나도 결하지 못할 것이오나, 이제 유교와 불교는 성행하온데 도교가 미약하니 학자를 당나라에서 구하여 이를 배워들임이 옳을까 하나이다”하고 아뢰었다. 왕은 연개소문의 말을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서 叔達 등 여덟 사람을 맞아 들였다. 이들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가지고 와서 그 동안 쇠(衰)해진 도교를 중흥하는데 힘썼고 연개소문은 이들이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보살펴 주었다. 이리하여 연개소문은 유?불?도의 삼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꾀하였다. 이때 백제는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좌평 성충(成忠)으로 하여금 신라를 치게하여 40여성을 빼앗고 그 서변의 요새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을 함락시켰던 때이다. 이에 신라는 사정이 급박해지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호소하는 한편 적으로 삼고 있던 고구려에까지 왕족 김춘추를 보내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 얘기하는 동안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 왕과 함께 신라가 전에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공취한 점을 들어 책하면서 그것을 돌려주지 않는 한 원병을 보낼 수 없다고 하고는 김춘추를 연금하였다가 되돌려 보낸 후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쳐서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았다. 이것은 신라와 당(唐)과의 교통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에 또 다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며 동맹국이 될 것을 호소하였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태종 이세민은 신라의 호소를 기회로 침입을 하고 싶었으나 전일에 수나라가 무참히 패배하고 나라마저 패망한 지가 얼마되지 아니한지라 선뜻 나서지 못하고 칙지(勅旨)를 보내어 신라 토벌을 중지하고 철병으로 화해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신에게 “우리와 신라의 원극(怨隙)은 지금에 이르러 생긴 것이 아니다. 수나라가 침입할 때 신라가 빼앗아간 오백 리의 우리 땅을 돌려 주지 않는 한 화해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사신 현장은 “지나간 일은 말해 무엇하오. 옛땅을 찾기로 말한다면 지금 귀국의 요동땅이 다 옛날 중국의 군현이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는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데 고구려만이 굳이 옛땅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크게 화를 내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우리 요하 이동의 땅을 옛날 중국 군현이라고 하는 것은 한적(漢賊) 유철(劉澈)이 옛땅을 도둑질하여 사군을 두었던 옛일을 말하는 모양이나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 당나라의 영주(營州)나 유주(幽州)같은 땅도 모두 옛날 우리의 군현이었으니 내가 살고있는 동안은 반드시 우리 선민(先民)들이 살던 옛 땅을 도로 찾고야 말겠소. 당신네 왕에게 이 말을 전하시오”라고 호통을 쳤다. 사신이 돌아가 당태종에게 이 말을 전하자 태종은 “연개소문이 제나라의 임금과 대신들을 죽이고 백성을 크게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또 이제 나의 말을 어기니 이를 쳐서 굴복시키지 않고는 안되겠다” 하고 장엄(藏儼)을 시켜 고구려의 염탐과 사신의 임무를 맡겨 연개소문을 만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신의 명분으로 온 장엄을 굴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당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 대신학살사건에 대한 문책 등을 표방하고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켜 고구려로 침입하여 들어왔다. 이들은 그 수효가 수나라의 내침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는 17만 대군으로 침입하였다고는 하나 모두 우수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당태종은 실전 경험이 많아 군사를 다루는 솜씨가 귀신과 같다는 평을 듣던 인물인지라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연개소문 또한 당태종 못지않은 지략을 가지고 있는지라 침착하게 적의 동정을 살피고 대처해 나갔다. 연개소문은 우선 먼길을 오느라 지친 당나라 군사가 스스로 피폐(疲弊)케 되기를 기다려 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하고 기회를 보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당군이 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워지면 성옆에 성보다 더 놓은 흙을 쌓아 올려 성안으로 침입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준비해둔 나무나 돌 등을 이용하여 무너진 담을 보수하여 수비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수적으로 압도적인 고로 요동성 및 일부 성은 함락되고 당군은 사기가 충전하여 안시성 을 공격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안시성은 가장 험난한 요지(要地)로서 당나라가 동진(東進)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성이었고 고구려가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중요한 성지(城地)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사력을 다해 방어해야 했다. 따라서 안시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연개소문은 북부누살(褥薩-都督) 고연수(高延壽)와 남부누살 고혜정(高惠貞) 에게 고구려, 말갈군사 15만을 주어 당나라 군사의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들이 성을 나와 40리 지점까지 오자 당태종은 정면 충돌을 피하고 깊은 곳으로 유인하여 갑자기 사면에서 공격하여 패하게 하였다. 이들 살(褥薩)의 항복은 고구려군의 사기를 저하 시켰을 뿐 아니라 연개소문까지도 실의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백전연마의 군사와 지용을 겸비한 안시성주 양만춘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웠다. 당태종은 공략이 여의치 않자 성의 동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 성을 넘으려는 계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올라갔다. 그러나 성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갔고 당나라 군사에 의해 누첩이 무너지면 목책을 세워 방어해 갔다. 이렇게 하는 동안 당나라 군사는 성 높이보다 높은 토산을 쌓고 토산 꼭대기에는 다섯 줄의 길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성보다 커서 성안을 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토산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성의 한 쪽 모서리가 터졌다. 고구려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무너진 성틈으로 사람이 쏟아져 나와 격전 끝에 그 토산을 빼앗고 토산 주위를 깍아 거기에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당나라 군사는 얼씬도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태종은 여러 장군에게 명하여 3일동안 성 탈환전을 계속하였으나 이미 사기가 저하되고 지쳐있던 당나라 군사들은 사기가 충전한 고구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안시성은 이와 같이 격전이 계속되어 당은 매일 6~7회씩 성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형세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더구나 때는 11월이라 한기가 닥쳐와 풀은 마르고 물은 얼어 붙어 군사와 말이 더 머물러 있기가 곤란했고 그동안 가지고 온 식량도 거의 다하여 당태종 한 사람의 야심만으로 전쟁을 끌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당태종은 퇴각하여 갔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는 퇴각해 돌아가는 당태종에게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으로 송별의 예를 표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비록 적이기는 하나 성주의 영웅적 전투에 감격하여 비단 백필을 보내고 그의 군주에 대한 충성을 찬탄했다. 당태종은 돌아가는 길에 이 원정을 깊이 뉘우치고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은 하지 못하게 하였으리라”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그동안 당나라의 군사와 군마, 물량의 손실은 막대하였으니 고구려군의 굳센 정신력과 연개소문의 사전 방어책의 힘이 얼마나 컸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안시성은 비록 조그마한 성이지만 만일 이 성을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었더라면 다른 성들은 차례로 무너지고 당나라 군사들은 기세등등하게 남으로 진격해 갔을 것이다. 안시성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당태종은 고구려의 공파(攻破)가 어려움을 깨닫고 단숨에 대거 공격하기 보다는 소부대를 자주 보내어 고구려로 하여금 피로케 한 후에 대대적인 원군을 감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보장왕 6년(647)과 7년(648)에 걸쳐 두 번이나 공격하였으나 이번 작전도 또한 실패였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이 거듭 실패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보장왕8년에 40만 대군을 제4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유조(遺詔)로 원정을 못하도록 하였다. 당태종은 그의 아버지 고조를 내세워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차지한 중국 역대 제왕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주(英主)였다. 그러니 세 차례나 연이은 고구려의 위용이 어떠했겠는가? 후일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안석(王安石)에게 “당태종이 고구려를 쳐 이기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었을 때 “연개소문이 비상인(非常人)이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한다. 이 말 한 마디만 보더라도 연개소문의 비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태종이 죽은 뒤에도 당나라는 당고종의 지휘로 몇 차례 공격을 감행하여 고구려를 괴롭혔다. 그러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당나라의 옥저 도총관(沃沮 都總管)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섬멸하고 소정방의 군대도 물리쳐 당고종의 침략 야욕을 꺽어 놓았다. 연개소문은 임종이 가까워 오자 아들 삼형제를 불러 유언으로 “너희 형제들은 어수(魚水)와 같이 화목하여 작위(爵位)를 다투지 마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웃 사람에게 조소를 받으리라”하였다. 그러나 이들 삼형제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2년도 채 못되어 나라를 패망의 끝으로 몰고갔고 고구려는 드디어 668년, 보장왕 27년에 멸망하였으니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다 그 민족자체에 있음을 새삼 말해 무엇하겠는가!

출처 : 태백선도
글쓴이 : 큰가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