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운 꿈덧(잠꼬대)이니 신중하고 신중할 지어다.
죽음을 보고 발심 發心한 거리
불과 20여세로 동학사에서 강사로 이름을 떨치던 경허 스님은
경전에 막힌 것이 없는데다 장자 곧 남화경 南華經을 숙독 熟讀하여
문장으로서도 석학으로 당대를 주름 잡고 있었으니,
사방에서 구름 같이 몰려 드는 학인들로 강원 講院은 초만원이었다.
강사 8년으로 30대에 접어든 경허 스님은 청계사에서 모시던 은사 계허 桂虛스님이 생각이 나서
계허 스님을 뵈려고 경기도 안양 安養 근교로 향하였다.
1879년 여름으로 길을 가던 중에 천안 天安 근처에서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덮히면서
천둥 벽력에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어느 초가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집 주인이 나타나더니
송장 치우기에 기운이 다 했는데 누가 또 와 있담 !
죽더라도 내 집에서 나가서 죽으시오 어서 ,.
하고 혀를 차며 스님의 등을 밀어 집에서 쫓아 냈다.
할 수 없이 경허 스님은 다른 집으로 가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찬가지로 쫓겨 났다.
역병으로 사람들이 다 죽어 가는 판에 무엇하러 이 곳에 왔소,.
이 곳에 왔으니 스님도 살아 가기는 틀렸구먼 제발 내 집에서 떠나시오 !
집집마다 호열자에 걸려 쓰러진 주검들이 즐비 하였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불치병 콜레라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폭풍우 속에서 마을을 벗어난 모습은 초라하고 현기증이 나서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 나 또한 전염병에 걸리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저 송장들과 다를 것이 무언가 ?
나 역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지 않는가 ?
살고 죽는 문제 하나 수습할 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며 철 없이 중 노릇을 하다니,
교리문자 敎理文字가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 나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길로 중생을 인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도다.
이제라도 스스로가 생사 生死를 영단 永斷하는 길이 있다면 오직 참선 參禪하는 길 밖에 더 있겠는가 ? "
자못 뜨거운 자각 自覺속에서 스님은 가던 길을 되돌아 동학사로 오면서 일천칠백 공안 公安 화두 話頭를
헤아려 보았으나 의운 疑雲은 좀처럼 걷히지 않아 캄캄 절벽이었다.
암중모색 暗中摸索중에 갑자기 화두 하나가 떠 올랐다.
려사미거 마사도래 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들이 닦치는 구나.
의심의 구름은 더 크게 일어나
한 생각에 몰두한 경허 스님은 동학사로 돌아 오자 강원을 폐하고 학인들을 돌려 보냈다.
조실방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단정히 앉아 용맹정진 勇猛精進에 들어 갔다.
영운선사 靈雲禪師의 화두 "나귀의 일 말의 일"을 두고 선 삼매에 들어 졸음을 물리치고자
날카로운 송곳을 턱 밑에 세워 놓고 있었으며
정진하다 졸면 이마에는 선혈 鮮血이 낭자 하였으니
살이 찔리고 피가 엉겨 붙어 얼굴이 흡사 두꺼비 같았다.
마침내 수마 睡魔의 항복을 받고 화두의 의심 덩어리가 샘 솟듯이 한 생각이 똘똘 뭉쳐 은산철벽 銀山鐵壁처럼
용맹정진하여 나아갔다.
참선 석 달 만의 어느 날이었다.
동짓달 보름께 학명도일 學明道一 스님이 아랫 마을에 출타 하였다가 이진사 李進士라는 처사 한 분을 만났다.
스님 요즘 중노릇은 어떻습니까 ?
경전 읽고 염불하며 주력 呪力하고 가람 伽藍 수호 하는 일과가 연속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중 노릇 하다가는 소가 되고 맙니다,.
아이구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소가 안됩니까 ?
산승 山僧의 말에 이진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콧 구멍이 없다고 해야지요.
고삐 뚫을 콧 구멍이 없는 소 ?
그 뜻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학명 스님이나 그 옆에 있던 동은 東隱 사미승이나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은 사미는 바로 선비 이처사의 아들 이원규 李元奎로 마침 동학사에서 행자 수업을 하고 있었다.
학명 스님과 동은 사미는 무슨 뜻인지 몰라 동학사로 올라 와서 여러 대중에게 물어 보았다.
중 노릇을 잘 못하면 소가 된다는 이치를 아시오 ?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콧 구멍이 없다는 뜻이 무었이오 ?
그러나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였다.
학명 스님은 조실방으로 찾아가 경허 스님에게 고삐 뚫을 콧 구멍 없는 소에 대해서 물었다.
바로 그 순간 이었다.
경허 스님은 이 한마디에 활연대오 豁然大悟 하였다.
때는 1879년 11월 15일 보름이었다.
한국 근대선 近代禪의 세기적 개안 開眼의 순간 !
천하대지가 송두리째 녹아 내려 함몰하여 빠지고
물아 物我가 함께 공 空하여
백천법문 百千法門과 무량묘의 無量妙意가 이 한 생각에 없어저 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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