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에서 한가로운 신선들
홍애선생은 중국 상고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헌원 황제의 신하였던 영윤이라고 한다. 나중에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으며 "홍애(洪崖)선생"으로 존경받었다. 요(堯)임금 때 이미 3,000세였다고 한다. 한나라 무제 때 한무제가 양백(梁伯)과 위도세(衛度世)를 화산(華山)에 파견하여 위도세의 부친인 신선 "위숙경"(衛叔卿)을 찾도록 하였다. 이때 위숙경은 운모(雲母)를 늘 상복하고 도를 얻어 신선이 되어 화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한다. 화산에 간 양백과 위도세는 산 전체를 뒤지다가 깎아지는 듯이 솟아있는 절벽지대를 발견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높다란 절벽 위에서 위숙경과 몇 분의 신선이 육박놀이(六搏: 도박의 일종으로 말은 흑백 각각 6개)를 하고 있었다.
자주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빙글빙글 돌면서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그곳에 놓여 있는 각종 그릇 등 기구들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러 명의 신선들이 손에 의장 깃발을 들고 뒤편에 서 있었다.
위도세는 부친인 위숙경에게 "아버님과 함께 앉아 계시는 분들은 누구이십니까?" 물었다. 이에 신선 위숙경은 "이분들은 홍애선생, 허유(許由), 소부(巢父), 태현공(太玄公), 비황자(飛黃子), 왕자진(王子晉), 설용(薛容)이다."라고 답했다.
이들은 모두 오래 전에 득도한 신선들이다. 신선에 관한 여러 기록을 보면 홍애선생은 신선들 중에서 지위가 비교적 높은 배분에 속한다.
항아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어
진(晉)때 곽박(郭璞)이 지은 "유선시"(遊仙詩)에서 홍애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져 온다.
左揖浮丘袂 좌읍부구몌
右拍洪崖肩 우박홍애견
姮娥揚妙音 항아양묘음
洪崖?其? 홍애함기이
좌로 "부구"의 소매를 끌면서
우로 "홍애"의 어깨를 친다
항아가 아름다운 소리를 드날리자
홍애가 턱을 끄덕인다
이 시는 곽박이 선경에서 두루 놀면서 지은 시로서, 왼손으로 신선 부구공(浮丘公)의 옷을 끌어당기면서 오른손으로 홍애(洪崖)선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항아(姮娥)가 높은 소리로 미묘한 노래를 부르자 홍애선생이 암암리에 박자를 맞춘다는 전경이다. 선인들이 즐기는 흥겨운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마치 신선도의 한 장면 같다. 이것으로 보아 홍애선생은 높은 음악 수양을 갖추었고 전설에서는 황제 때 음악을 다루던 관리(樂官)인 "영윤"으로 나타난다.
홍애선생은 후에 사천성 청성산(靑城山)에 머물렀다. 남조 도홍경(陶弘景)의 "진고"(眞誥)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홍애선생은 이때부터 청성동진(靑城洞眞: 청성 동부의 진인)이 되었다. 그래서 청성산 위에는 홍애선생의 자취(仙跡)가 남아 있다. 청성산 위에는 동부(洞府)가 있는데 주위가 2,000여리나 되었다." 홍애선생은 이곳에서 은거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줄곧 그를 청성진인(靑城眞人)이라 불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예장군(豫章郡) 서쪽에 홍애산(洪崖山)이 있는데 원래는 복룡산(伏龍山), 산원산(散原山) 등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홍애선생이 한 때 은거한 적이 있었다. 수(隨) 문제 개황(開皇) 9년(589년)에 홍애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예장(豫章)군을 홍주(洪州)군으로 개칭하고 복룡산을 홍애산(洪崖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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