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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전

선인 귀곡자 왕후 鬼谷子 王珝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3. 23.

신비의 귀곡선생

 

아득한 상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였다. 하남성 영천(潁川) 양성(陽城)이라는 곳에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그윽한 심산유곡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곳을 "귀곡(鬼谷)"이라고 불렀다. 이 "귀곡(鬼谷)"에는 도인(隱士) 한 사람이 은둔하여 살고 있었는데 스스로 "귀곡자(鬼谷자)"라 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은 이분을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 불렀다.

 

 

귀곡에서 천하정세를 꿰뚫고


귀곡선생은 학문이 깊어 세상을 덮을 만하였고, 말재주가 뛰어나 세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또한 천문지리(天文地理), 병법인 육도삼략(六韜三略) 그리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복술(卜術) 등등 정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널리 듣고 쌓은 지식으로 그가 살던 "귀곡"을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천하의 정세를 훤히 꿰차고 있었다.

 

 

천하의 준걸들이 몰려들고


귀곡선생은 귀곡에 조용히 은거하면서 선도를 닦고(修眞養性) 한편으로는 천하의 젊은이 중 쓸만한 사람을 골라 인재육성을 하였다. 귀곡에 학덕을 갖춘 기인이 있다는 소문이 천하에 알려지자, 앞을 다투어 그 문하에 몸을 맡긴 젊은이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하생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천하를 내 집같이 여기면서 전국시대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풍류준걸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많은 제자 중 귀곡선생의 학문의 정화를 제대로 물려받은 제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소진과 장의에게 선도(仙道)수련을 권하였으나...

 

귀곡자의 제자 중 천품과 자질이 극히 뛰어난 자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제자가 소진과 장의(각주 참조)이다. 이들 소진과 장의는 귀곡선생으로부터 허다한 학문과 재주를 물려받았다. 귀곡선생은 원래 소진과 장의에게 신선가의 비법을 가르쳐 수진(修眞)하게 하여 장래 함께 선경으로 돌아가려고(同歸仙境) 하였다. 그러나 소진과 장의는 세상에 나가 포부를 펼치고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하여 모두 서둘러 하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재주를 세상에 한번 펼치는 데만 몰두하였다.
귀곡선생은 자기의 도가 끊어지는 것을 깊이 아쉬워하면서 여러 차례 소진과 장의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소진과 장의는 종래 이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명리를 구하러 떠났다.

 

 

신발이 개로 변하여 길을 인도


귀곡선생은 소진과 장의를 붙잡아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이별할 때, 그들에게 신발 한 켤레를 주었는데 이 신발이 한 마리 개로 변하더니 그들을 진(秦)나라로 안내하였다고 한다. 후에 소진은 합종책(合縱策)을, 장의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원대한 계획을 천하에 펼치기 위해 암투를 벌리면서 지혜를 다투었다. 이때 아직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이어서 천하가 한바탕 시끄러웠다. 이들은 천하를 호령하면서 전국시대 6국의 재상이 되는 등, 웅변술과 외교술로 오늘까지 이들의 일화가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소진(蘇軫, ? ~ B.C. 317년) 및 장의(張儀 ? ~ B.C. 309년)
두 사람 모두 중국 전국시대 정치가, 유세객으로 젊어서 제나라의 "귀곡자"에게 배웠다. 소진은 서쪽 진나라에 대항하기위해 6국의 연합을 성공(合縱策)시켜 세로로 나란히 결속하여 연합전선을 지휘하며 6국의 재상을 겸하였다. 그러나 장의가 진나라로 가서 6개 나라로 돌아다니며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횡으로 동맹을 맺는 연횡책(連橫責)을 성공시켰다. 소진의 "합종책"이 깨지고 소진은 자객에게 피살되었으며, 장의는 진나라 재상이 되었으나 나중에 미움을 받아 위나라로 도피하였다가 죽었다. 두 사람 모두 말로가 좋지 않았는바 ,일찍이 귀곡에서 선도나 닦았더라면......

 

 

진시황이 가르침을 청하다


진시황 때, 대완(大宛)지방에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그때 한 무리 새들이 이름모를 이상한 풀을 물고 와서는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 떨어뜨리자 얼마 안 가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살아났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그곳의 관리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여겨 진시황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풀의 이름을 몰랐다. 진시황은 이 풀을 귀곡선생에게 보내 가르침을 청했다. 귀곡선생은 "큰바다 가운데에 10주(洲)가 있으니, 그 이름이 조(祖)주, 영(瀛)주, 현(玄)주, 염(炎)주, 장(長)주, 원(元)주, 류(流)주, 광생(光生)주, 봉린(鳳麟)주, 취굴(聚窟)주이다. 이 풀은 조(祖)주의 불사초이며, 경전(瓊田)에서 자라고 또 이름을 양신지(養神芝)라고 한다. 잎이 줄풀(菰)처럼 생겼고 무리지어 살지 않는다. 한 포기만 있어도 천명 이상의 생명을 가히 살릴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귀곡선생은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를 지키고(凝神守一) 순박함을 스스로 지켜 드러내지 않았다(樸而不露). 인간세상에서 수백 년을 보냈으나 나중에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에 "귀곡자는 소진과 장의의 스승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역사에 실존했던 사람들이다.

요즘에 와서는, 귀곡자는 실체가 없는 신비의 인물이 아니라 전국시대의 사상가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귀곡자의 전기를 작성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귀곡자의 성명이나 사적(事跡)에 관해서는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전설 등에서 골라 뽑은 것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귀곡자의 내력


귀곡자의 성씨는 왕(王)이며, 이름은 "리(利)", 혹은 "후(珝)"라고 한다. 출생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황제 헌원(軒轅)시대에 살았고, 상주(商周 즉 은나라와 주나라)에서 여러 대를 살았으며, 노자(老子)를 따라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간 적이 있고 동주(東周)시대에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와 한빈(漢濱) 귀곡산에 거주하면서 도를 전수했다고 한다. 혹자는 서주인(西周人)으로 청계의 귀곡에 살았으며 또는 진평공(晉平公)때 사람으로 귀곡에 은거했다거나 초(楚)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묵적(墨翟)과 운몽산(雲夢山)에서 같이 놀면서 약초를 캐고 수도했다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원수가 된 문하생


귀곡자는 스스로 세상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의 적지 않은 제자들이 세상에 나와 정치, 외교, 군사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여러 사실로 보아 소진과 장의뿐만 아니라 장군으로 전국시대를 풍미한 손빈(孫?)과 방연(龐涓)도 귀곡문하 출신이다. 방연이 귀곡자를 떠나 하산할 때 "너는 남을 속인 일로 하여 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방연은 출세에 눈이 멀어 졸렬한 속임수로 동문형제인 손빈을 음해하였다. 손빈은 무릎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불구가 되었다. 후에 손빈은 권토중래하여 장군이 되었고, 수레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면서 방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손빈의 계책으로 마릉(馬陵)전투에서 방연을 죽여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귀곡자의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다.

세상에는 귀곡자의 저서인 "귀곡자(鬼谷子)" 세 권이 전해진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귀곡자의 이름을 빌려 쓴 책이라는 둥 논란이 많다. 귀곡선생에 대한 전설과 관련 일화가 무척 많으나 시종 일관한 내용은 없다. 혹시 이 신비의 초인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면모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지도 모른다.
 

출처 : 기공과 기치유

 

글쓴이 : 조화도술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