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달마어록 관심론 觀心論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라한(Arhat)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이다. 부처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부처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 줄 필요가 없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출가자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들은 머리를 깎은 광신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단지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욕락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 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 두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스물 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내가 중국에 온 것도 단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의 이 즉각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을 가르치러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 떠남 없는 떠남, 보지 않는 봄, 웃지 않는 웃음, 듣지 않는 들음, 앎이 없는 앎, 즐거움 없는 즐거움, 걸음 없는 걸음, 머무름 없는 머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에 이르기를 "언어를 넘어서라. 생각을 넘어서라."라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이 설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달마의 어록 중에서 특히 이 부분은 심오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모든 구도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몇 가지 엉터리 문장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엉터리는 첫 부분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마 달마의 말을 오해한 제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달마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나는 어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해 두고자 한다.
첫째,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두 가지 종류의 구도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하나는 아라한(阿羅漢)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보살(菩薩)이라고 불려지는 존재들이다. 아라한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바치다가 한번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아라한들의 말에 따르면 자비심 같은 위대한 생각도 엄밀하게 말해서 집착이란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자비심이란 또 하나의 인간관계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욕망이다. 비록 그것이 좋은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차이가 없다. 아라한의 말에 따르면 욕망은 좋든 나쁘든 하나의 구속을 가져온다. 그것은 황금 사슬이냐 쇠사슬이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사슬은 사슬인 것이다. 자비심은 황금 사슬이다. 아라한들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은 애당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도울 수 있다. 보통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아라한들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선입관도 없이 본다면, 그들의 선언은 이 세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활 방식에, 운명에, 그의 미래에 간섭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어떤 자비심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욕망에 대한 아름다운 이름일 뿐이다. 왜 그대는 다른 사람이 깨닫는 것에 그토록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대의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 아라한은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다. 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아라한은 깨닫는 순간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법도 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도 남을 돕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황홀경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샘물에 목을 축이러 온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에게 샘물을 마시러 오라는 초대장 같은 것은 결코 보내지 않는다. 만약 그대 스스로가 그의 현존을 마신다면 그것은 그대의 일이다. 그대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그는 그대를 말리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은 개인의 자유에 절대적인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다. 그대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더라도 아라한들은 그저 잠잠히 기다리기만 한다. 만약 그의 현존이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그러나 그는 그대를 도우려고 일부러 손을 뻗어 그대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그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라는 말은 아라한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들의 제자들 중 몇몇 사람이 아라한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히나야나(Hinayana)라고 불렀다. 그것은 소승(小乘), 즉 작은 수레라는 뜻이다. 한 배에 한 사람만 타고서 강을 건너갈 수 있는 작은 배란 뜻이다. 그들은 큰 배를 만드는 번잡스러움을 피한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데에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 배는 두 사람도 탈 수 없다. 오직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홀로 수백만 번의 생을 거듭하다가 홀로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부처는 아라한의 길을 받아들였고 또 존경했다. 그러나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열망은 자신들의 기쁨을, 진리를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자비는 그들의 길이다. 그들은 역시 심오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설득시켜서 같은 경험을 맛보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쪽 언덕에서 가능한 많은 구도자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보살은 피안으로 건너가기를 자꾸만 연기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관점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아라한은 아라한이고 보살은 보살이다. 그들은 다른 운명을 갖고 있다. 물론 목적지는 동일하다.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보살들은 뱃사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라. 서두르지 말라. 나는 이쪽 언덕에서 충분히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 번뇌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해야 한다. 나는 절대적인 평화와 축복 속에 있다. 나에게는 피안이 필요 없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서 도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과 보살을 어떤 차별을 두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맞는 삶을 택하라고 했다. 그래서 보살들은 마하야나(Mahayana)라고 불린다. 그 말은 대승(大乘), 즉 큰 수레, 큰 배라는 뜻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후에 이 두 흐름은 2,500년 동안 서로 자신의 길이 옳다고 주장해 왔다. 달마는 보살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에게 반대하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이 두 흐름인 아라한과 보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비전을 갖고 있다. 나 자신만의 길이 따로 있다. 그래서 나는 달마의 모든 말에 동의할 의무가 없다. 특히 이 점에서 말이다. 아마 이 점에는 석가모니 부처도 동의할 의무가 없다. 특히 이 점에서 말이다. 아마 이 점에는 석가모니 부처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달마는 한쪽 노선만 따른 사람이다.
두 번째로 그는 매우 사나운 사람이며 매우 무서운 용모를 갖고 있다. 그대가 그의 초상화를 아이들에게 보여 준다면 아이들이 겁을 낼만큼 무섭게 생겼다. 그는 남인도 제국인 팔라바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의 사나움을, 맹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다. 그가 말하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그대가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대승불교라는 특정한 노선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라한과 보살을 똑같이 존경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어록으로 들어가자.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아난다는 특별한 경우이다. 그에 대해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사촌형이었다. 동양에서는 사촌이라도 형에 대한 예의는 엄격하다. 그래서 아난다가 석가모니 부처에게 제자로 입문하려 할 때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들어보아라, 싯다르타여, 나는 지금 그대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대는 나의 스승이 되고 나는 그대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직 나는 그대의 사촌형이다. 그러니 상황이 바뀌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무슨 조건인가요?" 아난다가 말했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나는 그대의 제자가 되고 나면 그대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때는 항상 나를 그곳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나를 밤이나 낮이나 그대 옆에 있으면서, 그대의 건강을 돌보며 시중을 들게 해 달라. 그때 그대는 나를 막아서는 안 된다. 이 약속은 내가 입문하는 순간부터 당장 지켜져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아난다의 사촌 동생이었고 동양에서는 사촌형의 말을 듣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대가 동양에 태어났다면 형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아난다가 또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은 내가 질문을 할 때에는, 그 질문이 비록 의미가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도 항상 그 즉시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절대로 '그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라든지, '내일 대답해 주겠다.'라는 말로 대답을 연기해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좋습니다." 또 아난다가 말했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누구를 데려오든지, 그대는 한밤중이라도 일어나서 내가 데려온 사람을 만나 주어야 한다. 그가 누구라도 말이다. 이것이 나의 조건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물었다. "그대는 왜 웃는가?"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지금은 아직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당신이 나에게 입문하고 나면 그때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그래야 계약이 완전히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날 이후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되었고, 42년 동안 밤이나 낮이나 항상 그의 옆에서 살았다. 봄이 오고 계절이 변하고 해가 가도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곁을 그림자처럼 쫓아 다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난다가 입문한 뒤에 입문을 했고 그들 중에서 깨달은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뒤로 온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었는데 왜 나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만큼 당신의 설법을 많이들은 사람도 없고, 나만큼 당신과 가까운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왜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그대는 처음 입문할 때 내가 웃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대의 조건이 바로 그대의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가 그대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나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의 사촌형이란 생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미묘한 에고가 되었다. 비록 그대가 어떤 누구보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한 모든 설교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지식, 그 기억 때문에 그대는 자신만의 경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내가 한 말을 20년 동안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사촌형이라는 사실이 미묘한 에고가 되어 깨달음을 얻는데 장벽이 되었다. 그대는 내가 죽을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42년이 지난 후 부처는 죽었다.
부처는 죽음이 가까이 오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의 육체는 이제 늙고 지쳤다. 나는 이제 궁국의 안식을 얻으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난다는 천 명의 제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다. 아난다는 비록 석가모니 부처보다 한두 살 위였지만 그의 오른편에 앉아서 아이들처럼 오열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아난다여, 왜 우는가? 나는 무지한 채로 죽음을 맞지 않는다. 나는 절대적으로 깨어 있음 속에서 죽는다. 그것은 보통의 깨달음이 아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없었던 깨달음이다. 한 스승이 이렇게 많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죽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그리고 나는 궁극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 아난다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나는 42년 동안 당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무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가시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당신 같은 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새벽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남겨 두고 떠납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번에는 그의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다시 웃었다. 아난다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서도 또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당신은 이상한 순간에 웃으시는군요."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24시간 안에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그대는 24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죽으면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사촌형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의 에고 역시 사라진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던 에고가 말이다."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났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죽고 난 지 24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었다. 사라(紗羅) 나무 아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옆으로 누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고, 그 곁에서 그는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아난다가 눈을 뜨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의 내면의 눈도 함께 열렸다. 그가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눈을 감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고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면의 눈도 함께 열려져서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먼저 그는 자신의 본성을 보려고 했다. 그때 그가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겠다는 결단과 함께 밤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24시간만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개성이었다.
달마가 아난다를 좋지 않게 말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아난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사실이다. 아라한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라한은 바로 자신이 부처가 된 사람이다. 그들이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기억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불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때 그들은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의 본성이나 보살의 본성은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찾아온다. 그전에는 알 수 없다. 그대가 깨달음을 얻은 뒤라야 그대는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자비에 대한 어떤 바람이 있겠는가? 아니면 바람이 없겠는가? 그대는 언제라도 이쪽 언덕을 즉시 떠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몇 사람을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이곳에 머물겠는가? 나는 '아라한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란 말이 그의 제자가 잘못 덧붙인 말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달마 자신의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보살이며, 보살과 아라한들 사이에서는 2,500년 동안 갈등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자비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보살은 자비심 없이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라한도 역시 깨달은 사람이 여전히 어떤 바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아직 무욕의 상태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그런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강제로 깨울 수 있단 말인가? 그때는 그들의 잠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듯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개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도 때가 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깨달음을 얻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람을 설득하거나 유혹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아라한은 보살을 이해할 수 없다. 보살 역시 아라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완전히 반대 극이다 .내가 이 문장에 제자의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실수는 달마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불교국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대승불교에 속한다. 그곳은 보살들의 땅이다. 그리고 스리랑카 같은 나라는 소승불교에 속한다. 그곳은 아라한들의 땅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전혀 선불교를 존경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스리랑카에 가서 달마를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웃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난다 같은 아라한을 일본에 가서 말한다면 그들은 그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달마가 아무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 양극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판디트들은, 학자들은, 지식인들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말은 완전히 옳다. 여기에 아라한을 집어넣으면 틀릴 뿐만 아니라, 광신도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것은 "오직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라한 대신 판디트, 학자, 지식인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이다. 부처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는 것이다. 이 말 역시 판디트나 학자들에게는 맞지만 아라한에게는 맞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란 말은 광신도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그의 추종자들이 덧붙인 말이 아니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따르면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아라한은 적어도 개미 한 마리보다는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러한 광기 때문에 달마의 초상화는 매우 사납게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그런 일로 신경 쓰지 않을 위인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알고 있으며 또 그 말을 능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대는 이 말을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결코 상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보살은 자신의 뜻을 직설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이제 그대는 '외도'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외도(外道)란 일차원적인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진리의 한쪽 단면만 보는 사람들이다. 이 외도에 대해서 마하비라와 자이나교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 즉 달인(達人)들은 상대어를 갖고 잇었다. 그들은 그것을 아니찬티카(anicchantika)라고 부른다. 진리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마하비라는 존재에 대해서 매우 다차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상대성이론을 말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것이 서양에 전달되는 데는 2,500년이 걸렸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다른 과정을 거쳐 이 상대성이론에 도달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과 과학이란 점에서 학문의 성질이 다를 뿐, 같은 메시지이다. 마하비라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상대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어떤 사물에 대해서 한마디의 말로 규정지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한마디의 말은 한쪽 면만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진리에 대해서 일곱 가지 면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대가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하면, 그는 일곱 가지 면으로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답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마하비라와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이야기하기 전보다 더 큰 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마하비라에게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아마'란 말을 사용해서 대답한다. '아마'란 말을 쓰지 않을 때는 광신적인 말이 된다. '아마'란 말은 그대를 열려 있게 해준다. 그 말은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고, 반대 의견도 옳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대를 깨어 있게 해주며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문을 닫아 버리지 않게 하는 말이다. 그대는 신에 대해서 묻는다. 기독교인들은 한가지 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신은 있다. 오직 한 분의 신만 있다" 그대가 이슬람교도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그들 역시 유일신만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 역시 진리를 한 면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이나교에서는 그들을 이찬티카(icchantika)라고 불렀다. 그들은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볼까봐 두려워한다. 그것은 오직 그들에게 한 신과 한 예언가만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에게는 두 명의 예언가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위험한 상태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가가 두 명이라면 그들은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도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슬람교도들은 혼란에 빠진다.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치는 바보가 될 수 없다. 오직 바보들만이 한 가지 생각으로 똘똘 뭉친다. 그래서 그들은 신도 하나고, 예언자도 하나며, 성스러운 《꾸란》도 하나이다. 다차원적인 실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진리는 그들의 머리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하비라 같은 사람들은 이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그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항상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말한다.
그대가 신에 대해서 마하비라에게 묻는다면 그는 일곱 가지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도대체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없다. 첫 번째로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마 신은 존재한다. 내 말은 절대적일 수가 없다. 그대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그의 대답은 이렇다. "아마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무신론자들이 맞을 수도 있다.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마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이 두 가지 대답을 들으면, 그대는 또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러면 신을 믿어야 합니까? 안 믿어야 합니까?" 그러면 그의 세 번째 대답이 나온다.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또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떻게 둘 다 옳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의 네 번째 대답이 나온다. "아마 둘 다 옳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일곱 번째까지 대답한다. 그대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비라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이 무엇을 뜻하든 상관하지 않고 마하비라의 인격 자체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그를 따를 수 있다.
마하비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항상 현존해 있으면서 어떤 관념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 나간 몇몇의 사람들이 그를 따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존재가 아름답고, 그의 현존이 빛났기 때문에 그를 따랐다. 그의 삶은 완전히 하나의 노래였다. 완전한 황홀경 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였던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에 개의치 말라. 그것은 그대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옳은 사람이다. 그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아마'란 말을 쓰지 않는가?
그러나 달마의 발언은 단호하다.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이찬티카들, 진리가 절대적일 때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따라 산다. 진리의 상대성을 믿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견해를 따라 산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살 권리가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확실한 것만 말했다. 그의 확실성과 진지함은 의심스러운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부정할 수 있지만, 그의 의도는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나 유태교인들을 죽여왔다.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도들을 죽여 왔다. 그리고 힌두교도들은 불교도들을 죽여왔다. 아무도 "가서 그대의 철학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여라."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전 세계에 걸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달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호했다. 그의 이해는 그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이며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괜찮다. 비록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다. 종교는 잔인하고 사납게 말하지는 않지만 행동은 그렇게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사랑과 존경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다. 모든 종교가 사람에게는 존엄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진리만 강조한다.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틀린 것으로 친다. 달마와 다른 종교가들이 틀린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달마는 말은 엄격하게 하지만 아무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대를 죽인다면, 그것은 그대의 에고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독재자들은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자기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죽이려고 추종자들을 선동해 왔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될 수 있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려고 결심하다 해도 그는 여전히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그의 결정이다. 그가 자신의 결정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아무도 그의 삶과 철학에 간섭할 수 없다. 자신의 무심을 아는 사람은 부처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줄 필요가 없다. 나는 달마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때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몸에 걸친다고 해서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진리를 찾는 것은 승려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속인이라도 그가 침묵할 수 있고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는 자기 집에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부처가 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포기하거나 수도원으로 가야 할 아무런 당위성이 없다. 이 점은 나 역시 강조하는 바이다. 세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대의 무의식이다. 그대의 무의식을 포기하라. 세상과 시름하지 말라. 세상이 그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궁전에서 살 수도 있다. 궁전이 그대의 깨달음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절대적인 빈곤 속에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빈곤이 깨달음을 도와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얼마만큼 깨어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오두막이건 궁전이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의 각성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그대는 부처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 무엇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출가자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들은 머리를 깎은 광신자일 뿐이다. 사람은 남의 눈에 들어 있는 작은 티라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안에 낙타가 들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는 절대로 지켜보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남을 바라보고 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는 매우 정확하고 예술적일 만큼 정교하다. 하지만 자신은 수천 가지 잘못된 점을 갖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인류의 단점이다.
제자는 달마에게 또 묻는다. "그렇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나는 전적으로 달마를 지지할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은 엄청나게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1,400년 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들러(Alfred Adler)도 먼 미래의 사람이다. 엘리스(Havelock Ellis)나 융(Carl Gustav Jung)이나 아사지올리(Assagioli) 같은 심리학의 거장들이 태어날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성적 관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지만 그것은 1,4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달마가 한 말은 매우 찬란히 빛난다.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정확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방면에 있어서 그를 원조로 삼고 싶다. 달마는 말한다. 나는 단지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위대한 통찰력이다. 불교의 가장 위대한 성자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성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꿈을 이루고있는 것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에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그대의 a여상이 성숙해질수록 그대는 점점 성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간다. 그대가 완전히 존재계와 일치를 이루는 날, 그대의 성욕은 아침 햇살에 말라 버리는 이슬방울처럼 사라질 것이다. 성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종류의 욕망에 탐닉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왜곡된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사디즘 마조히즘, 호모 섹스, 레즈비언, 수간 등등.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계속 발명해낸다. 그들의 종교가 성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 에너지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생물학을 초월하지 않는 한, 그대의 육체를 초월하지 않는 한, 마음을 넘어선 어떤 것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성은 그대 속에 남아 있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자연스런 상태로 놔두는 것이 더 좋다. 왜곡된 성은 나쁜 상태로 빠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성은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왜곡된 성은 승화되기가 매우 힘들다. 나는 동성연애자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성불구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실 성불구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독신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불구자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사실 성 에너지는 그 자체로서 그대의 깨달음으로 변형된다. 성불구자는 성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최악의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수 없다. 그에게는 태양을 가로지르는 독수리의 비상하는 에너지가 없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달마는 성은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대의 본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생겨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이 말은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온 매우 중요한 말이다. 그대에게 어떤 습관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대에게 어떤 해악도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대에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나는 깨달은 사람이 담배 때문에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깨달음이 방해받는 것을 본적이 없다. 깨달음은 흡연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 습관들이 그대의 깨달음을 방해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달마는 여기서 굉장한 자비심과 이해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거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것을 알면, 그때는 모든 것이 그대에게 허용된다. 그때 그대는 무엇이 자신에게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 고토록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사소한 습관의 차이가 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마호메트는 밤중에 식사를 하곤 했다. 사실 이슬라교도들은 라마단(Ramadan)에는 낮에는 금식을 하고 밤에만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자이나교도들은 밝을 때만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대가 밤에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이나교도들은 단식할 때 물을 마신다. 하지만 그것도 낮에만 가능하다. 밤이 되면 물조차 먹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살아왔던 상황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막의 종교이다. 사막에서는 낮의 기온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낮에는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밤이되면 선선해지고 식사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그리고 별들이 가득 찬 사막의 밤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다. 그러나 낮에는 활활 타오르기만 할 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생선을 즐겨 먹는다. 그래서 자이나교도들은 그가 도저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떻게 깨달은 사람이 생선을 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대가 달마의 말을 이해한다면 라마크리슈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벵골에 사는 사람들의 오래된 관습이다. 그들은 쌀과 생선이 주식이었다. 그 외에는 먹을 만한 것이 특별히 없었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먹었다. 그가 깨달았을 때도 그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미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상은 각자가 처한 상황들이 모두 다르다. 기후가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곳은 매우 춥다. 그대의 피를 얼어붙게 할 만큼 말이다. 그래서 몸을 녹여 줄 알코올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정말로 이해심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 다른 환경, 다른 지리적 여건들을 이해한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이 깨달음과 같은 위대한 경험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 그대가 오욕락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의식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본래 소멸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 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일본에서 한 사람의 백정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임금의 식사를 위해서 짐승을 잡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왕조차도 그를 존경했다. 그 후 왕은 왕궁 뒤에서 짐승들도 도살하는 그를 보았을 때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이제 당신은 옛 직업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자비심을 갖고 짐승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더 큰 사랑과 은총으로 말입니다. 어쨌든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대신 맡길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나만큼 자비심을 갖고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다시 내가 그 일을 하든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의 깨달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소멸될 수 없습니다. 나의 내면의 하늘은 다시는 구름에 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이것은 나의 직업입니다." 그는 그 후 20년을 깨달은 백정으로 살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는 가축을 도살했고 저녁이면 깨달음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자신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몇 명의 제자들까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달마의 말이 옳다. 그대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안 이상, 자신의 본성을 본 이상 그대는 그대가 백정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제자가 물었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본성을 본 이상 그 어떤 것도 그대의 발목을 붙잡지 못한다. 그대의 자유는 이제 불멸의 것이다. 그대 자신도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인도에서는 스물 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내가 중국에 온 것도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의 이 즉각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무심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 떠남 없는 떠남, 보지 않는 봄, 웃지 않는 웃음, 듣지 않는 들음, 앎이 없는 앎, 즐거움 없는 즐거움, 걸음 없는 걸음, 머무름 없는 머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에 이르기를 "언어를 넘어서라. 생각을 넘어서라."라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이 설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걸음 없는 걸음, 듣지 않는 들음, 말하지 않는 말……. 하지만 그대에게 작은 이해력만 있어도 이 말들은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대가 자발적으로 말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즉각적으로 말할 때, 그대는 말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발적인 행동은 그에게 속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서 존재계 자체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당장 나는 말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달마의 어록에 내 전존재가 대응하도록 나를 열어 놓고 있다. 나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 나는 단지 그것을 듣는대로 말한다. 그대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 의자는 텅 비어 있다. 그대가 준비를 갖추어서 말을 할 때, 순간 순간 깨어 있음을 통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 그대는 마치 앵무새가 미리 학습된 대로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중 하나는 깨어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나오는 것, 미리 준비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서 말하고 행동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절대적으로 그대의 행동과 말의 덫에서 빠져 나와 있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지켜보는 이'가 된다. 그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대는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고 있는 자이다. 이 지켜봄, 이 관찰성은 종교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궁극의 비밀이다. 그것은 초월의 삶, 영적인 삶, 깨달음의 삶, 불성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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