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달마대사어록達摩大師語錄

달마어록 각성론 覺醒論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3. 19.

 

 

달마어록 각성론 覺醒論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고 나쁜 운명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따라서 그런 능력으로 인해서 그는 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업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는 그것을 초월한다. 천상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에 빠져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를 만날 때 그대의 의식은 잘 집중이 되지 안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꿈이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모두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대가 밤의 어둠 속에서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날 때 그대는 놀라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거든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대의 각성을 가리는 구름일 뿐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가 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각성을 기르고 삶이 가져다 주는 것을 받아들여라.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게 되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각성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당장에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그대가 도를 진정으로 찾고 싶다면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한번 그대가 업에서 벗어나 그대의 각성을 기르기 시작하면 모든 집착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참된 이해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부처가 말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성현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염불하고 경전을 독송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쫓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달마는 이 세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분별에 반대했다. 우주는 하나의 전체적인 유기체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어떤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그대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가 의식적이지 못할 때, 그대는 하나의 중생이다. 그대가 의식적일 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대가 무의식적일 때, 그대는 세상을 하나의 속된 것으로 본다. 성스러운 것은 이 세상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가 의식적일 때, 각성해 있을 때, 부처가 되었을 때, 그때는 어떤 것도 성스럽거나 속되다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이 하나됨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분별심은 우리의 표면 의식이나 무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안목이다. 태양 아래에서 눈을 감고 서 있으면서 어둡다고 생각한다. 어둠은 그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밖은 찬란하고 싱그러운 빛이 비치는 아침이다.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태양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그런 아침이다. 그러나 장님에게는 그런 찬란한 색채도, 꽃도, 태양도 없다. 그의 눈이 시력을 회복하는 순간 갑자기 어둠의 세계가 빛의 세계로 바뀐다. 그는 그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 변화는 그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존재계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달마는 엄청나게 중요한 말을 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철학자와 종교가들의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나누어 놓았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해 놓았다. 그들이 존재계를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고,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구분하는 사람은 항상 내부의 갈등으로 시달린다. 그들의 전 에너지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말라 버린다. 그런 사람은 그 에너지를 자신의 꽃을 피우는 데 사용할 수 없다. 봄이 오건만 꽃을 피울 어떤 에너지도 그에게는 없다. 그는 이미 지쳐 있다.

 

세상에서 축적된 부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피곤에 지치게 만든다. 그들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재산을 유지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써 버리도록 만드는데, 그것은 넘쳐나는 에너지로 인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쳐 버린 사람은 더 이상 불의나 거짓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기본적인 갈등이 시대를 따라 항상 이어져 왔다.

 

분별, 그것은 모든 통치자들의 기본 규칙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정치가보다 그것을 더 사랑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분별하는 것이었다. 나누어지지 않는 개인의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는다. 분별은 일종의 카스트(caste)제도와 같다.

 

멍에가 없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황소를 보라. 그대는 그 황소로 하여금 그대의 수레를 끌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히 자유로워서 그대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힘세고 자유로워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것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암소를 만나면 자유롭게 노닌다. 그러나 멍에에 매여 있는 소는 얼마나 불쌍한가? 그대의 수레를 끌고 그대가 원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 소의 아름다움과 에너지와 자유로움을 파괴해 버렸다. 똑같은 소이지만 멍에를 매고 매지 않은 것은 그만큼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대의 아름다움과 힘과 잠재력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대는 하나의 노예로 변한다. 왜 인간이 모든 종류의 노예 제도를 참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과 싸우도록 교육받았다. 그대가 자신과 싸우는 동안 그대는 완전히 자신을 파괴시킨다.

 

달마의 가르침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알라고 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나누어질 수 없다. 물질이나 정신으로, 성스러움과 속됨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분별을, 모든 이중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대 속에 있는 이 초월성이 바로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존재의 꽃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자신을 부자연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는 고통과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부자연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대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거기에 또다른 지옥이나 천국은 없다. 자신의 본성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어록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띠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지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온 그대의 모든 행동은 지극히 아름답고 선하다. 그것은 억지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장미 넝쿨에서 장미가 피어나듯이,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면 모든 아름다움과 선이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이것은 존재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앎이다.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초월의 의미를 그대는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이중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존재계와 하나됨이라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은 불필요하게 중생이 된다. 그때 거기에는 삶에 반대하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정신에 반대하는 육체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양극으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하게 된다. 거기에 증오에 반대하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기억하라. 양극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사랑은 미움이 될 수 있고, 미움은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친구가 적으로 바뀔 수 있고, 적이 친구로 변한다. 그대는 행복이 슬픔으로, 슬픔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음을 잘 안다. 비록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이지만 그것들은 쌍둥이와 같다.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그것들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래서 그대는 초월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존재계는 모두 이 초월에 속해 있다. 그것을 나누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 이중성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는 좋고 나쁜 운명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성공이나 실패란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가 잘 알고 있든지 절대적으로 모르고 있든지, 그가 누구이든지 혹은 아무것도 아니든지, 이 모든 이중성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의 각성은 가장 위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가졌을 때 그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그대는 대통령이나 수상이 될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어린아이들이, 덜 떨어진 사람들이 벌이는 장난이다. 야망을 쫓아서 끝없이 달리는 사람들은 축구선수보다도 더 지성적이지 못하다. 그들의 게임은 이름이 다를 뿐 실상은 똑같다. 그들은 계속해서 고통을 맛본다. 성공해도 고통스럽다. 내일이면 그 자리를 놓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이제는 성공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잡고 매달리기 때문에 또 고통스럽다. 권력의 자리에 앉는 것은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손을, 어떤 사람은 그대의 발을,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대의 머리를 잡아당길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그대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소위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평화롭게 살 수 없다. 그대가 성공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대는 가장 큰 실패감을 맛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시절이라고 과거에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대가 나빴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오히려 좋은 시절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똑같다. 성공도 지나가고 실패도 지나간다. 그대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봉우리처럼 남아 있다. 홀로 우뚝 솟음,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초월적인 본성이다. 아무것도 그대를 긁을 수 없다.

 

인도의 신비가인 까비르(Kabir)가 하루는 "죤 키 티온 다르 디니 차다리야(Jyon Ki tyon dhar dinhi chadariya)'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나는 이제 신께 돌아왔다."란 뜻이다. 그리고 "신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입으라고 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고 처음 받을 때처럼 깨끗하게 다시 돌려드린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경험이다. 그는 칠흑 같은 밤에도 침묵 속에서 살았고 대낮에도 침묵 속에서 살았다. 그는 아무런 분별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분별을 초월한 자리에서 머물렀고 분별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능력으로 인해서 그는 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업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은 그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야 할 말이다.

 

그대는 그리스 왕 미다스(Midas)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전생애를 살면서 항상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하게 해주소서." 신은 매일 졸라대는 그의 억지에 지쳤다. 사실 신에게 드리는 그대의 기도는 졸라대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가엾게도 신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백만 년 동안 졸라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자살해 버리지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아마 그렇게 졸라대면 아무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결국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대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이제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무의식적인 인간은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그대의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대는 가장 지독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말 옳았다. 그대의 기도는 그대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신이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어 그대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왜 내가 그런 기도를 했던가?"라고 후회할 것이다. 같은 상황이 미다스 왕에게도 똑같이 벌어졌다.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자 그는 식사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도 마실 수 없었다. 그가 물에 손을 대는 순간 물도 역시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과 아이들은 그를 피해서 달아났다. 그의 친구들도 더 이상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의 하인들마저 그를 경계했다. 그의 왕국은 삽시간에 그를 버렸고,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외어서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기간도 별로 길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기도를 취소하려고 다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굶어 죽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황금으로 변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궁전과 모든 가구들을 황금으로 변하게 한 것만이 사실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만큼 고통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대는 '녹색 엄지(green thumb)'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위대한 정원사들이 그런 별명을 갖고 있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모두 푸르게 변했다. 미다스 왕은 황금의 손가락을 가졌다. 그가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과 친구를 잃었으며, 나라와 모든 것을 잃었다. 비록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였지만 말이다. 깨어 있는 사람, 부처 역시 그런 힘을 갖고 있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축복의 상태로 변한다. 불행이 찾아와도 그는 축복으로 바꾼다. 슬픔이 찾아와도 그는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쁨으로 바꾼다. 그는 초월적인 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찾아와도 그는 그 속에서 불멸을 찾아낸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뀐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가졌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본질을 아는 힘이다.

 

밤은 낮처럼 아름답게 변하고, 죽음은 생명처럼 축제 분위기로 변한다. 초월적인 사람은 그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왔다가 지나가고, 죽음도 왔다가 지나간다. 그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항상 초월해 있다. 초월해 있을 수 있는 자질을 얻는 것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달마는 언젠가 "천국과 지옥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나 같은 사람에게 달려 있단 말인가? 달마는 말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 깨어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며,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대는 항상 그대의 무의식 속에 지옥을 갖고 다닌다. 그대는 그대의 의식 속에 천국을 갖고 다닌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 존재의 상태이다.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 그대는 지옥의 악몽을 꾼다. 그대가 깨어나면 천국에 있는 것이고 모든 고통은 그친다. 천상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크(Edmund Burke)의 생애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일화가 생각난다. 그는 영국의 대주교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영국의 대주교는 영국 국교에서 따지자면 교황과 같은 존재이다. 대주교는 예수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버크와 대주교는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대주교는 때때로 버크의 철학 강의를 듣곤 했다. 그러나 버크는 결코 대주교의 설교를 들으러 가지 않았다. 그래서 대주교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번 일요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와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대주교는 자기의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를 준비했다. 그는 버크가 자신의 설교에 감명을 받기를 원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대주교는 맨 앞자리에 버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설교를 해나가면서 그는 버크의 표정만 살폈다. 그런데 대주교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버크의 얼굴에는 전혀 감동하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강단을 내리쳐도 버크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설교가 끝나자 그들은 같은 차에 탔다. 여전히 버크는 침묵하고 있었다. 대주교는 그가 곧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버크에게 물었다. "자네는 나의 설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네. 무슨 말이든 해 보게. 내용이 좋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하게.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생각이 어떤지 계속 궁금할 것일세." 버크가 말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어. 그것은 그저 멍청할 뿐이었어. 자네는 그토록 바보 같은 말만 하는데, 나는 자네의 지성이 그것밖에 안 되는 줄은 미처 몰랐어." 대주교가 물었다. "어떤 대목이 그렇게 멍청했는가?" 버크가 말했다.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과 악을 행하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했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는가?" 대주교가 말했다. "글세. 나는 왜 그 말이 바보 같은 말인지 아직 모르겠는데?" 버크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가르쳐 주지.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선을 행한다면, 그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악을 행하면, 그 역시 어디로 가는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한다는 말이 기준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저 붙인 말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기준인가? 그러면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은 그저 심심해서 붙인 말인가?" 대주교는 그 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마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점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정말로 종교적인 사람은 어떤 정교를 믿지 않아도 그의 삶은 지혜롭고 선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예언자나 어떤 구세주나 믿을 필요가 없다. 그 반대로 신이나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기도 한다. 대주교는 말했다. "그 문제는 너무나 어렵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나에게 일 주일만 시간을 달라. 다음 설교 시간에 그 대답을 해주겠다. 그러니 자네는 한번만 더 와 주게. 나는 자네 앞에서 내 설교를 평가받고 싶다네." 버크는 그에게 일 주일의 시간을 주었고, 그 일 주일은 대주교에게 무척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그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해답을 찾았지만 도저히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의 기준점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선이나 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모든 도덕성은 그만 시궁창에 빠져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도덕성이 하나의 사기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도 시궁창에 처박히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그는 둘 다를 함께 조화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일 주일 동안 꼬박 밤을 새웠다. 문제점이 계속 제기되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간이 다 지나서 다시 일요일이 되었다. 그는 일찍 교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해답도 찾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문제를 물어 보자. 사람들이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당신께서 이 문제에 해답을 내려 주십시오. 나는 도저히 이 문제에서 헤어나는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결론짓는 것은 무엇이든지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곤란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그러나 그는 너무 피곤했다. 일 주일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만 예수의 십자가상 앞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 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기차를 타고 사람들과 멀리 어디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말했다. "당신은 모릅니까? 이 기차는 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맙소사! 주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구나.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기차는 어떤 역에 멈추었다. 그곳은 매우 황량한 곳으로서 단지 '천국'이란 팻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그는 천국이 이런 곳이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또 물었다. 그들은 이곳이 천국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로 들어가 보았다. 거리는 온통 더러운 쓰레기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거기서 몇몇의 성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거의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뿐인 나무 아래 앉아서 그들은 할렐루야를 계속 외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곳이 진짜 천국입니까?" 그들이 말했다.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면 어디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모두 위대한 성자이며 천국을 차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는 또 물었다. "이곳은 꽃 한 송이도 피어 있지 않은 이상한 천국이군요. 고타마 붓다도 이곳에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도 이곳에 있습니까?" 물론 그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기에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성자가 말했다. "그런 사람들의 이름은 이곳에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선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들은 선 그 자체이다. 그는 다시 역으로 달려가서 물었다. "이곳에는 지옥으로 가는 기차도 있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이제 곧 그 기차가 도착할 것이다. 플렛폼에 서서 기다려 보라." 그리하여 그는 지옥행 열차를 타고 지옥에 들어갔다. 기차가 지옥 역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자신이 생각했던 천국 같은 곳이었다. 각종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밝았으며, 아름다운 음악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축제일 같은 분위기였다.

 

같은 상황이 미다스 왕에게도 똑같이 벌어졌다.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자 그는 식사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도 마실 수 없었다. 그가 물에 손을 대는 순간 물도 역시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과 아이들은 그를 피해서 달아났다. 그의 친구들도 더 이상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의 하인들마저 그를 경계했다. 그의 왕국은 삽시간에 그를 버렸고,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외어서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기간도 별로 길지 못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기도를 취소하려고 다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굶어 죽었다.

 

 

출처 : 지천명(知天命)

 

글쓴이 : 달마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