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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어록達摩大師語錄

달마어록 선도론 禪道論 진정한 이해는 무심에서 비롯된다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3. 17.

6. 진정한 이해는 무심에서 비롯된다

 

달마어록 선도론 禪道論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가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예배하면 안 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보살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신앙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지 말라.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그대의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그 부처는 도(道)이다. 도는 바로 선(禪)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단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뿐,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자만이 도를 찾을 수 있다. 그가 한 구절의 경전도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부처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동작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에야 그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의 맛은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을 뿐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에 떨어진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안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경전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이 오직 밝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궁극적인 도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 역시 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은 꿈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꿈에 보물과 궁궐을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해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머뭇거리는 순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해서 그 무엇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미혹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대는 헛되이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낀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대가 한번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진정한 이해는 무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의식에 대한 비밀을 캐내어 간 달마의 통찰력은 너무나 심오해서 그의 이해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거기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그는 마치 우체국에서 전보를 치듯 가장 본질적인 말만 사용했다. 그대는 한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진 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이 어록에서 볼 수 있다. 달마는 그것을 가장 가깝게 표현했다.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잘못이다. 달마와 같은 스승을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모든 스승들에 대한 전설이 있지만 달마에 관한 이야기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깊은 통찰력과 정확한 표현력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란 이 우주가 생긴 이래 처음이다. 그는 어떤 비유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도 아니며 신학자도 아니다. 그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용한 말은 화살처럼 날아가 그대의 심장에 꽂힌다. 그대가 할 일은 그에게 가슴을 활짝 여는 것뿐이다. 그대가 초청하지 않는 한 그는 그대 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는 한 그는 확실히 그대의 심장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대의 수용성은 궁극에 이르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 저녁, 그의 제자에 의해 잘못 표현된 몇 가지만 수정하면 이 어록은 달마가 남긴 가르침의 진수를 보여 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달마의 말에 의하자면 모든 사람은 본래가 부처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따로 부처를 상상하거나 예배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그대 자신에게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된다. 그것은 그대가 가르침의 기본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예배해야 하거나 부러워해야 할 사람은 없다. 그대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뜻은 너무나 깊어서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지 못했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유일신 사상을 부정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신처럼 존경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의 수만큼이나 신도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잠 속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무지가 그들의 본성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모든 사원과 회당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신 역시 과소평가하고 있다. 신은 다른 신으로부터 예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본래 그는 불멸의 존재였지만 자신의 오해 때문에 스스로를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으로 과소 평가해 왔다. 그대 내면에 있는 생명과 의식은 불멸이며 영원한 것이지만 그대는 계속해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해 왔다. 매일 그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그대 자신의 죽음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시인들은 노래한다.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는지 결코 묻지 말라. 그대를 위해 종이 울린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사람들이 죽으면 교회의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마을 사람 전부에게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러면 일터에 나가있던 사람들은 교회로 모여서 죽은 사람의 집을 찾아간다. 그래서 시인은 그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모든 죽음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그대 역시 죽음의 문턱 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매일 그대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간다. 사실 그대가 태어나는 그 날부터 그대는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대가 매년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죽음을 더 가까이 맞이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동물도 죽고, 나무도 죽고, 새도 죽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죽음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내일, 아니면 오늘 오후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시간 문제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아는 자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죽음은 환상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자신이 죽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볼 때 그대는 정말 그가 죽는 것을 보았는가? 아마도 의학적인 사실들만 보았을 것이다. 숨을 멈추고 심장의 고동이 더 이상 뛰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한다.

 

며칠 전에 파키스탄에 점령된 카슈미르 지역에서 한 사람이 그의 친구와 가족을 세 번 속인 일이 일어났다. 그의 나이는 135세인데 그는 세 번이나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세 번째 죽을 때는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두 번이나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의 심장이 멈추고 의사는 그가 완전히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런 상태에서 두 번이나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웃으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 번째 그가 죽었을 때 매우 신중했다. 의사 역시 그가 진짜로 죽었는지 단정할 수가 없었다. 앞의 두 번도 확실히 그가 죽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람들은 의사에게 말했다. "아마 앞의 두 번은 그가 당신은 속였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죽었을 것입니다. 의학적 상식에서 보는 한 이번에는 확실히 죽었습니다." 세 명의 의사들이 그에게 사망 진단서를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눈을 뜨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번에 내가 죽을 때는 진짜로 죽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한 번만 더 살아나자고 생각했다." 그 지역은 인간의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120세가 보통 평균 수명일 정도였다. 150세가 되는 사람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180세가 넘은 사람도 몇 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밭에 나가서 일을 할 정도로 건강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자 세계 각 국에서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세 번이나 사망진단서를 받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의학적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육체가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나의 호흡이 아니다. 나의 심장이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나는 단지 그것들을 빠져나온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정지하면 그대들은 모두 바보가 된다. 그때 나는 내 육체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호흡이 살아난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은 농부였다. 그는 요가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렸을 때, 일곱 살이 채 못 되었을 때이다. 그는 어떤 수피를 만나서 죽음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순진해서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수피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몸을 빠져나오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몸 안에서 그것을 지켜 보라. 그러면 갑자기 네가 몸밖으로 빠져나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몸을 떠나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갈 것이다. 마음을 지켜보면 마음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너는 그저 지켜보는 자로 남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너는 육체를 빠져나올 것이고 마음을 빠져나올 것이며, 너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 되돌아가는 길은 그 반대로 하면 된다. 너는 육체에게 말하라. 나는 육체다. 나는 마음이다. 나는 호흡이다. 나는 심장의 고동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즉시 너는 몸과 점점 가까워져서 몸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면 그대는 육체가 된다. 그때 그대는 한 사람의 중생이 된다. 그때 거기에 죽음의 공포가 있다. 그대의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으면 그대는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대는 순수한 의식이 되며 무심이 된다. 거기에는 죽음도 없고 질병도 없으며 늙음도 없다. 그대가 지켜보는 한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 새로운 젊음 속에 산다. 진정한 종교는 그대에게 숭배를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종교는 그대의 불멸성을 가르친다. 그대 안에 신이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바로 달마가 그렇게 말했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그의 충고는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는 어떤 모양과도 동일시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육체도 모양이며 마음도 모양이며 세상도 모양이다. 절대로 모양이 아닌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대 의식이다.

 

모양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변한다. 그러므로 그대를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라. 그대는 변치 않는 신성이다. 그래서 달마는 말한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가지 무심이 될 것이다. 본래 어록에는 그대가 부처와 한 가지 마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달마의 어록에 주석을 단 사람의 오해에서 나온 말이다. 마음이란 말은 무심이란 말로 바꾸어져야 한다. 마음으로는 부처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매우 깊은 뜻이 있다. 만약 그대 속에 있는 모든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그 마음의 숫자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침묵한다면,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는 무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교육을 받았건 안 받았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간에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마음이 초월하는 순간에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모든 구분은 마음에 의해 생겨난다. 마음을 넘어설 때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그 하늘을 사념의 구름을 넘어선 광대 무변한 침묵의 하늘이다. 그 공간 안에서 그대는 존재계와 하나가 된다. 그대는 전체와 하나이다. 나는 전체와 하나되는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스러운 것이라고 부른다.

 

제자는 달마에게 묻는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예배하면 안 됩니까?" 그 제자는 세속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달마는 이미 그 물음에 대답했다. 그리고 답이라고 나온 다음의 구절은 결코 달마의 말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달마는 어리석지 않다. 그래서 먼저 나는 제자가 쓴 어록부터 말하고 그 다음에 달마의 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한다.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보살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신앙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지 말라. 마귀들이 부처를 가장하기 때문에 부처를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그 제자는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예배한다면 그 모습은 부처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 뒤에는 마귀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달마의 대답이 될 수 없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악마도 믿을 수 없다. 신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도 부정할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할 것도 없이 달마의 대답은 이러할 것이다. "그대는 어떤 부처도 예배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부처를 숭배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또 다른 선사 한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아마 달마와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달마의 직계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어느 겨울날 밤에 한 절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절의 주지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 절에 머물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밖으로 나와보니 선사가 자는 방 아궁이 앞에 불이 붙고 있었다. 불이 난 줄 알고 당황한 주지가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어젯밤에 온 선사가 아궁이에다 나무로 된 불상을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선사는 불구경을 하면서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놀란 주지는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제정신입니까? 불상을 태우게 말입니다." 그런데도 선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불상이 타 버리고 난 잿더미를 지팡이로 뒤적거리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주지가 다시 물었다. "지금 뭘 찾고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대답했다. "나는 지금 사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자 주지는 그 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을 태워서 매우 화가 났지만 하도 기가 막혀서 웃어 버렸다. "당신은 정말 미쳤군요.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입니까?"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리가 안 나오면 이것은 진짜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조각된 나무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것에 속지 말라. 나는 긴 여행에 매우 지쳤는데 밤은 길고 너무 추워서 불을 지폈다. 그러니 나를 도와주려면 불상 두 개만 더 갖다 달라. 아직도 그대에게는 불상이 세 개나 있지 않은가? 예불을 하는 데는 하나면 충분하다. 나머지 두 개는 내게 줄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밤은 매우 춥고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다. 살아 있는 부처를 위해서 나무로 된 부처를 불태우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그 말은 들은 주지는 갑자기 이 사람이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내가 잠이 들고나면 아마 절에 있는 불상을 다 태워 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깨워서 그 선사를 절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 선사는 쫓겨나가면서도 계속 말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들어 보라. 그대는 정말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대는 나무로 된 부처를 구하려고 살아 있는 부처를 추운 겨울날 밤에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제정신인가?" 주지가 말했다. "나는 지금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미쳤습니다. 그러니 나가 주십시오." 아침에 주지는 그 선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대문을 열어 보았다. 그는 길 한쪽에 앉아서 시든 들꽃 몇 송이를 들고 있다가 바위 위에 그 꽃을 올려놓고는 예불을 드리기 시작했다. 주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선사에게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진짜로 미친 사람이구나. 어젯밤에는 그 비싼 불상을 태우더니 이제는 바위를 부처로 잘못 알고 예불까지 올리는구나." 이윽고 주지는 그 선사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뭘하고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아침 예불을 올리고 있는 중이라네." 주지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매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어젯밤에는 내 불상을 태우더니 이제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표석에 대고 절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부처는 내 눈에만 보인다. 만약 그대가 이것이 부처로 보이면 그것은 부처이다. 그대가 나뭇조각을 부처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사실 나는 예불 같은 것은 드리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도 그대가 잘못된 생각을 고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절을 받는 목불이 부처가 아니라, 절을 하는 그대가 바로 부처다. 그러니 내가 오늘밤 다시 절에서 잘 수 있겠는가?" 주지가 말했다. "안 됩니다. 당신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내 생각이 틀렸겠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높은 차원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서 다른 절을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절은 가난합니다. 당신은 벌서 우리 절에서 제일 좋은 불상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당신을 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나는 그대가 이제야 올바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대는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눈에서 이해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그대 속에 있다." 2년 뒤에 그 주지는 선사에게 사과를 드리러 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절에 있던 나머지 세 개의 불상도 갖고 와서는 선사에게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이것마저 태우셔도 좋습니다. 나는 어젯밤 드디어 이해했습니다. 그때까지 사실 한순간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우아한 자태, 당신의 평화, 그리고 당신의 침묵과 그 노력들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내가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밤에 당신을 밖으로 내쫓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음날 아침까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제 나는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절 앞에 있는 바위나 법당 안에 있는 불상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말입니다."

 

처음 인도에 영국 정부가 들어와서 길을 닦고 이정표를 세울 때, 그들은 이정표를 붉은 색으로 칠했다. 붉은 색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특히 푸른 숲과 들판과 대조해서 붉은 색은 다른 색보다 훨씬 눈에 선뜻 들어왔다. 영국 기술자들은 공사를 하다가 매우 놀랐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정표로 세운 돌에다 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누만(Hanuman)의 석상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들은 매우 난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단지 이정표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들은 당신들에게는 이정표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매우 아름답고 신성하게 보인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예배한다고 해서 당신들에게 무슨 해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그것들을 예배할 것이다." 영국 기술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당신들에게는 이정표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누만의 석상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인도인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달마의 대답은 여기에 나온 그 제자의 말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는 오직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불성을 기억하라. 그것을 각성하라. 그러면 그대는 무심이 되어 부처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예배해야 한다. 그대가 사원이며 그대가 예배자이며, 그대가 예배를 받는 자이다."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그대의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그 부처도 도(道)이다. 도는 바로 선(禪)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단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뿐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젠(zen: 禪)'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것의 어원이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드얀(dhyan)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는 당시 그의 제자들에게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것은 팔리어로 쯔안(zh'an)이었다. 그리고 쯔안은 중국에 와서 찬(ch'an)으로 변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젠(zen)이 되었다. 그래서 젠은 본래 일본어가 아니다. 찬 역시 중국어가 아니다. 그래서 젠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겠지만 그것의 어원을 알게 되면 간단히 알게 된다. 그 말의 어원인 드얀은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면 간단히 알게 된다. 그 말의 어원인 드얀은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념의 흐름을 넘어선다는 뜻이며, 완전한 침묵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 침묵은 어떤 것도 방해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허공이다. 바로 이 공간이 젠이며 명상이다.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어리둥절해질 필요가 없다. 젠, 즉 선의 본래 뜻은 바로 이곳 인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인도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그 뿌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드얀'이라는 꽃은 일본에서 그 궁극의 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불행하게도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도 정부는 세계 각 국의 인도 대사관에다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라도 인도에 명상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광 비자도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명상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정치가들은 명상가가 될 수 없다. 명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욕심이나 야심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려고 하지 않는 마음에서 바로 명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정치가는 명상가가 될 수 없다. 인도는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나라이지만, 인도의 대학은 명상을 가르치는 학파가 하나도 없다. 인도에 와서 명상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인도 대사관에 의해서 제재를 받았다. 그들은 단지 타지마할(Taj Mahal)이나 카주라호(Khajuraho)를 구경하러 간다고 말해야 비자를 내주었다. 혹은 카슈미르로 밀월여행을 떠난다거나 어떤 바보같은 이유로 인도를 간다고 해야지 명상을 배우러 간다고 말하면 절대로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일어난 가장 불행한 사건 중의 하나다.

 

인도는 가장 위대한 명상가들을 배출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인도로부터 명상을 배웠다. 그것들은 여전히 일본이나 한국의 사원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더 이상 어떤 발전도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명상에 대해서는 알파벳도 모르는 형편인 것이다. 그들은 긴장되고 걱정이 가득 찬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단지 다리만 꼬고 앉아서는 교활함과 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권력을 잡는 것에만 있다. 명상은 이런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겸손해지는 길이며 단순한 가슴을 갖는 길이다. 그것은 이슬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사라지듯이 자신의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는 경전들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베다(Vada)》를 알 수도 있고, 《우파니샤드(Upanishad)》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대는 《바이블》나 《꾸란(Koran)》을 혹은 《기타(Gita)》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그대의 가르침은 앵무새가 떠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불과하다. 아니 앵무새가 그대들의 성직자보다 더 지성적일 것이다.

 

나는 한 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두 마리의 앵무새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기도문을 외우도록 수년 간 훈련을 시켰다. 그는 앵무새들에게 완두콩을 먹이로 주곤 했는데, 앵무새들은 완두콩을 받을 때마다 기도문을 외웠다. 그래서 그곳에 온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그 앵무새들은 기도문을 너무나 완벽하게 외웠기 때문에 마치 성자처럼 보였다. 결국 그 주교는 앵무새를 잘 훈련시켰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앵무새를 한 마리 더 사서 훈련시키려고 했다. 그는 새로 사온 앵무새를 두 성자의 우리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다음날 주교가 방에 들어오자 새로 온 앵무새가 먼저 있던 앵무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조지, 이제 완두콩을 받을 시간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 우리를 사랑하는 이가 우리에게 완두콩을 주도록 하옵소서." 그 앵무새는 암놈이었고 다른 두 마리보다 더 지성적인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이 경전을 남에게 가르칠 때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학문으로는 진정한 종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이다. 그리고 경전을 따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자만이 도를 찾을 수 있다. 그가 한 구절의 경전도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부처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무심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동작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에 그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의 맛은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을 뿐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에 떨어진다.

 

그대는 아주 조금만 깨어 있다. 그대의 전존재를 수치로 계산할 수 있다면 그대는 십분의 일만 깨어 있고 나머지 십분의 구가 어둠 속에,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너무나 표면적인 것이어서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욕한다면, 그대는 겸손의 미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즉시 분노하게 된다. 갑자기 그대의 야만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그대 속에 있는 맹수의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그대가 문명인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것은 마치 옷과 같다. 그대는 한순간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다. 그대가 아는 종교, 문화, 그리고 그대가 항상 말하는 위대한 자질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대의 의식은 그만큼 부분적이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에 떨어진다. 그것은 깨어 있는 자의 높이만큼 이르를 수 없다. 부처가 계속 오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가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라면 그대는 어두운 골짜기와 같다. 그가 말하는 것이 그대에게 도달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같은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저 골짜기의 메아리만 들을 뿐이다. 그것 중 일부가 그대에게 도달하고 그대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그것을 해석한다.

 

어느 날 밤 석가모니 부처는 그의 설법을 끝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시간이 되었다. 그대들은 가서 마지막 필요한 일을 하라. 결코 그것을 잠들기 전에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은 잠들기 전에 하는 명상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한 도둑과 창녀가 그곳에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가 "자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가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을 하라."고 하는 말을 했을 때 그 창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크!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부터 일 할 시간인데 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겠다." 그 도둑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도둑인지 안다. 잠들기 전에 그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빨리 도망을 쳐야 하겠다. 지금쯤은 일을 마칠 시간인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 잠은 다 잤다." 수천 명의 산야신(sannyasin)들이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창녀는 시장으로 나갔고, 그 도둑은 일을 할 곳을 찾아갔다. 부처는 한 가지를 말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제각기 달리 해석되는 것이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무심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무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안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무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그리고 또다시 무로 사라진다. 그대는 매일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나무에서 씨앗이 나온다. 그 씨앗을 잘라서 그 안을 들여다 보라. 거기에는 나무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고, 잎사귀 한 장도, 열매 한 알도 없다. 텅 비어 있어 그냥 무(無) 자체다. 그러나 씨앗에서부터, 그냥 무에서부터 커다란 나무가 나온다. 많은 잎과 가지와 열매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거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수백만 개의 시앗도 나온다. 그리고 그 각각의 씨앗에서 또 수백만 개의 씨앗이 나온다. 나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씨앗 하나로도 지구 전체를 푸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담겨 있다. 그대가 그것을 잘라 보아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와서 무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무런 집착도 할 필요가 없다. 집착은 그저 불행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아침에 활짝 핀 꽃도 밤이 되면 시들어 버린다. 집착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저녁에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대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꽃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있는 동안에 즐기라. 그리고 그것은 무에서 나와서 무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것은 모든 것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대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 혹은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그들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매우 작은 씨앗에서부터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대는 그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대 역시 화장터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저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집착이 그대의 실체를 놓치게 만든다. 그대는 보이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것들은 그대의 깨어 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대는 수만 가지 것들에 둘러싸여 길을 잃을 것이다.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경전이 된다. 그때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전들이 쓸모 없게 된다. 그대는 거룩한 것 중에 가장 거룩한 것을 본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근원을 본 것이며, 《베다》의 근본을 본 것이다. 그것들, 소위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본 것이다. 사람이 그 근원을 발견할 때 누가 껍데기에 집착하겠는가?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경전의 구절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이 오직 밝은 무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는 그 무심에서 비롯된다. 그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다. 진정한 이해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궁극적인 도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 역시 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은 꿈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꿈에 보물과 궁궐을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은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오직 순수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돈도 아니고 그대의 명예나 권력도 아니며, 집도 아니고 오직 순수한 의식임을 기억하는 한 그대는 죽음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다. 그때 죽음은 그대에게 어떤 작은 동요도 일으킬 수 없다. 죽음은 그대가 집착할 때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때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심리학의 기본 전제이다. 그것은 그대가 집착한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아내나 자식이나 권력과 부를 갖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대는 그것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대를 완전히 벌거벗긴다. 오직 순수한 의식만을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우파니샤드》에는 내가 항상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야야티(Yayati)라는 한 위대한 왕이 있었다. 그의 나이는 백 살이나 되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한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의 사신이 야야티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이제 당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 나는 그대를 데려가야 한다." 죽음의 사신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생긴 전사의 모습이었다. 야야티는 두려움으로 몸이 떨려 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너무 일찍 왔다" 그러자 죽음의 사신은 말했다. "일찍 왔다고? 너는 백 년이나 살았다. 이제 너의 자식들도 늙었고 너의 장자는 이미 80살이다. 그런데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가?" 야야티는 일백 명의 아내와 일백 명의 자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사신에게 물었다.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십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에게는 백 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내 대신 데려가고 나를 백 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죽음의 사신은 말했다. "그것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런데 누가 그대 대신 죽으려고 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자식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다." 그래서 즉시 야야티는 그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거기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장자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때 가장 어린 막내아들이 입을 열었다. 그는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신 역시 매우 안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신은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너무나 순진하구나. 99명이나 되는 너의 형들은 입을 다물고 있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80살이나 되었고 어떤 사람은 75살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더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 내가 너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그 소년이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멀쩡한 정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부왕께서 백 년이란 세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나 역시 더 살아봐야 무슨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99명이나 되는 나의 형들도 삶에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어도 아버지를 위해서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백 년을 더 살 수 있도록 내가 대신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내가 백 년을 산다 해도 나는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죽든 90년 뒤에 죽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십시오." 죽음의 사신은 그 소년을 데려갔다. 그리고 백 년 후에 다시 왔다. 야야티는 이번에도 이렇게 말했다. "백 년은 너무 짧은 세월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내 아들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또 다른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전처럼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하여 야야티는 백 년을 더 살게 되었다. 그런데 매번 이런 식으로 해서 야야티는 천 년을 더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사신이 열 번째 왔을 때 야야티는 말했다. "아무리 오래 살아봐도 당신이 처음 왔을 때처럼 나는 아무런 삶의 만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쳤습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제 천 년이 아니라 만 년을 살아도 똑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대는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이 그대를 찾아오면 그대는 두려워 떨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으면 죽음은 하나의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 그대는 떠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죽음은 빛을 잃는다. 죽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만은 위력을 잃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은 이미 불멸의 존재이다. 바로 부처인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해서 그 무엇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미혹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대는 헛되이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낀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대가 한번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 자유는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우주의 빛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가장 큰 축복이며 환희의 절정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초월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

 

 

출처 : 지천명(知天命)

 

글쓴이 : 달마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