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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이원선 靑陽 李源善 先生

청양 이원선 靑陽 李源善 진신사리 이야기 포일자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4. 22.

5. 李源善 선생과의 조우

 

대학의 학부에서야 지도 교수 제라는 것이 없지만

배 교수님과는 막역하게 친했으므로

그냥 나의 지도교수라고 스스로 부른다.

 

靑陽 도사와 배 교수님과는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배 교수의 고향은 함양이고 청양 도사는 산청이었는데,

함양이나 산청이나 다 지리산 옆 동네다.

 

청양 도사는 공부의 경지가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는데

배 교수가 나에게 청양 도사를 추천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청양 도사가 바로 지리산에서 수도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靑陽道士를 봉천동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청양은 거기서 일반 대중 혹은 승려 등을 대상으로

金剛經, 법화경, 혜명경, 금선증론,

선불합종, 天仙正理, 능엄경 등의

불경과 도경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청양 도사의 외모는 좀 기괴하였다.

한쪽 눈은 찌그러지고 얼굴은

장난 끼가 그득한 양반이었다.

 

소위 나라의 내로라 하는 큰스님들도

청양의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는 청양이 능엄경을 들어서

승려들의 공부의 허구를 맹렬히 통박했기 때문이었다.

 

청양 앞에서 소위 큰스님들이라는 분들의 공부 수준이

빤히 드러났기 때문에 꼼짝을 못하였다.

 

지금이야 각종의 선도 경전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당시에는 (1977년도) 정통의 선도 경전은

한 권도 번역된 것이 없었다.

 

요즘 많은 훌륭한 지사들이

주옥같은 丹經들을 많이 번역해내고 있는데,

그래도 이 당시 청양 같은

이들이 그 씨앗을 뿌린 결과이리라.

 

 

*청양은 본디 승려였다.

 

청양은 만년에 지리산 七佛庵의

신도회장을 하면서 소일하였는데

항상 한국불교의 話頭禪이 부처님의

본래 공부법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다니며

참선 공부한다는 승려들의 껍질을 벗기고 다녔기 때문에

승려들이 청양을 멀리하고 두려워 하였다.

 

청양의 불경과 도장경의 강의는

그가 직접 체험한 경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학인들의 질문에 막히는 바가 절대 없었다.

 

특이한 것은 청양이 본래 중이었는데도

도장경을 불경 못지 않게 숭상하고

단군 황조의 영정을 집안에 모시고 있는 점이다.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단군설에 대하여

전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상히 여겨 질문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어찌하여 불상도 아니고

단군상을 걸어놓으셨는지요?"

"대황조로 부터 공부가 유래되었으니...

인류의 대 스승이라.

 

佛祖의 공부도

이 백산의 황궁호법이 건내 준 것이니

어찌 始源을 숭상치 않겠는가?

 

단기가 4천 몇 년이라는데,

그건 틀리네 일 만년은 족히 되지"

 

나는 청양선생과 친숙해진 후에

내가 지리산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청양선생은

시종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분이 혹시 누구 신지

아느냐고 청양 선생에게 물었다.

 

청양 선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분이 지리산파의 방주이신

金陽 선생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지리산파가 무어냐고

청양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청양은 우리 나라에 있는

여러 공부의 집단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분은 바로 청양 선생의 사부인

삼부 도인 (삼부三夫 김재혁金在赫)의 사숙 뻘이라고 말하였다.

 

金陽선생의 경지는 老. 佛과 다름없는 분인데

산중에서 그분을 만나 '一中'의 현시를 받은 것만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하였다.

 

나는 청양선생에게 순수하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무슨 무슨 파를 나누냐고 물어보았고,

나중에 金陽선생께서 나에게 현시한

'一 中'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청양 선생은 웃으면서,

"一 이란 萬有千無의 근원이니

모든 있는 것, 없는 것, 되는 것,

아니 되는 것들의 근본자리네.

 

그것은 분명한 자리이나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으니 '一'이라 하네.

 

모든 문자가 한 一의 변형으로 이루어지듯이.

그것은 無極 과 太極의 근본이요

'中'이란 그 一의 자리이니,

만물의 모습이고, 공부하는 모양이네.

 

大宇宙의 中과 소우주의 中과

작게는 太陽행성계의 中과

지구의 中과 인간의 中이

그 '하나'로써 관통되고 있으니

 

一로써 中을 꿰뚫으면 나로부터

저 멀리 天地의 바깥에까지

통하지 않는 바가 없으리니

이를 道通이라 하지.

 

金陽子께서 자네에게 一中을 보이신 것은

공부의 법을 나타내 보이신 거지"

 

나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멍히 있다가(뭔가 알아들은 척 하면서)

 

"예, 그렇군요.

그러면 그 一中을 體現하는

구체적 공부방법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하고 질문하였다.

 

청양 선생은 공부법이란

그 사람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편적 방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나무상자 안에서

오래된 한문경전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게 공부하는 법이야"하였다.

 

그 그림을 보니

한사람이 정좌한 모습인데

머리와 등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공부란 똑바로 앉아서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똑바로 하여

정수리로부터 회음까지 수직이 되도록 정좌하고 하는 것으로

고정관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청양 선생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자 청양n 선생은,

"바로 이것이 부처와 단군 황조께서 공부하시던 모습이네,

靜坐를 하고 손을 배꼽 밑에서 가지런히 포개고 등과 머리를 숙여

배꼽 밑 생명의 根源處를 心眼과 肉眼으로 동시에 觀하는 것이지,

 

그리고 呼吸을 조작하지 말어.

자연히 돌아가게 내버려두어.

自然 閉氣 胎息이 돼지.

 

孟子에 勿忘勿助長이라하고

호흡은 집착하여 잡으면 놓치고

또 놓아서 잊어 버려도 안돼.

 

이게 입문하는 법이네.

 

지금 중들 참선한다고 뻣뻣하게 앉아서

저기 멀리 1~2미터 앞을 주시하고있는데,

그거 100년 가도 안돼. "

 

나는 청양 선생댁에 수차 출입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제자들은 청양 선생이 자기들한테는 불 퉁명한데

손님인 나에게 이야기를 잘해준다고 좀 질시를 하였다.

 

이건 좀 내자랑 같은 이야긴데

(뭐, 자랑이랄 것도 없지 현재 이 모양 이 꼴인걸 ...),

한 번은 그 제자들과 내가 둘러앉은 자리에서,

 

청양선생이 한 사람 한 사람 양미간을 觀하면서

'너는 안되겠다.' '음 너는 내생에나 되겠다'

 

'너도 안되겠다' 이런 식으로

한사람 한사람씩 둘러보다가

나를 보고는 '음 張君은 공부 잘하겠네' 하더군.

 

나는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뻤지만,

'아마 손님 입장이니까 체면상

그렇게 말을 했나보다'하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청양 선생은 괴짜였다.

내가 청양 선생의 신통력을

처음 본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강원도 오대산에서 수도한다는 어떤 스님이

자기 스승의 사리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사리는 직경 5미리 정도의

청양선생은 그것을 손으로 집어 들여다 보더니

'음 ~ 진사리로군.

선사께서는 지극한 도인이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서 한 삼 십 분이 지나도록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도저히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분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던 터라

나는 마음을 크게 먹고 질문하였다.

 

"사리라는 것은 수도의 결정체라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진짜 사리가 있고 가짜 사리가 있습니까?" 하니,

 

청양 선생은 "그럼, 眞사리와 假사리가 있지.

사리가 나왔다고 다 道人이 아니네.

 

가사리는 一心으로 몰두하면 자연 생성되지.

도둑질에 평생 몰두하면 몸 안에 賊사리가 생기고,

평생 色情을 밝히면 色사리가 생성되지.

 

수도한 진 사리는 관해 보면

그 안에 그 주인공의 평시 정좌한 상이 박혀있네."

하면서 사리를 집어 나에게 들여다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사리를 받아

정신을 집중해서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하고

꺼벙하게 대답하자 두 분이 껄껄 웃는다.

 

청양선생은

"내가 보이게 해주지, 잘 보게"하면서

다시 사리를 집어 내 눈앞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상태에서

사리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 같으면서

그 안에 사람이 정좌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예! 보입니다. 보여요." 하고 소리친 일이 있다.

 

나는 청양 선생과 칠갑산 보광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청양 선생은 바로 그 암자가 자신이 천 팔백 년 전에

수도한 자리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사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光反照를 한다고 해도 어찌 천팔백년 전이나...

前前生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청양선생은 후에 경남 하동 위쪽한

경치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리산 자락

끄트머리의 岳陽洞에 은거를 하였다.

 

하여간 나는 청양선생과는 인연이 없었나보다.

 

나는 청양선생이 하도 괴짜라서

그 당시에는 그리 크게 신임하지 않았는데

후에 우리 나라 단학계의 高手에게서

청양 선생이 道가 아주 높으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대단한 道人들이

無名으로 평생을 지내다가 돌아가는 일이 많다.

 

무슨 메스콤이나 타든지 신통력이나 보여야지

세상에 이름이 나니, 참으로

도인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여하간에 내가 '一中'의 혜택을

확실하게 본 것은 딱 한 번이다.

 

존경하던 배교수님이 정년퇴직을 한 관계로

동양철학으로 유명하던 타대학 석사과정시험을 치렀는데,

시험 문제가 "周子의 誠神機論에 대하여"였는데,

문제를 처음 대했을 때 어려워서 머릿속이 깜깜 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一中이 떠올라서 誠神機를

一과 中으로 요리하여 써냈더니 수석합격이란다.

 

타대학 출신들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一中設에 대하여 채점교수들이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래서 일년간 학비를 면제받았다.

 

평상시 일과 중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물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었을 것은 뻔하다.

 

(*이구 손가락이야. 내일 6편으로

'지리산 겨울 산행의 구사일생'을 올릴게요.

 

그것도 장장 6시간에 걸쳐 거의 타이핑을 치긴 했는데,

조끔 더 남았거든요.

 

지금 손가락이 마비 됐어요.

타이핑을 자주 해야 실력이 늘텐데

잊을 만 하면 치니, 원!)

 

 

 

포일자 지리산 청학동 수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