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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어록達摩大師語錄

달마대사 선어록, 이입사행론, 혈맥론, 오성론,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3. 7.

달마 선어록

 

 

달마의 선어록에 들어가기 전에

 

달마 선어록은 달마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서, 진정으로 달마의 말만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달마는 소승불교의 깨달은 자로 일컬어지는 아라한들을 비난하는 대승불교에 속해 있었으며, 중국에 전해진 불교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그 자신의 깨달음에 반대되는 말(대승불교의 경전내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각자(覺者)의 지적이 있다.

 

따라서, 본 내용에서는 원문의 일부 내용을 정정하였으며(예, 마음 →.무심), 기록자의 말이라고 판단되는 부분, 아라한을 비난하는 부분, 및 달마 자신의 깨달음에 반대되는 부분(즉, 대승불교의 경전내용)은 삭제하였다.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망상을 등지고 실체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무언중에 존재와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를 존재로 도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도에 들어가는 실천적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다르마(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세속의 즐거움 따위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른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은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항상 무엇인가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다. 그들의 명상은 세상의 길과 차원을 달리한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다르마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진리를 일컫는다. 이 진리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텅 빈 공(空)이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여러 가지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는 환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 곧 고통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안에 있다.

 

 

혈맥론(血脈論) 1 - 무심(無心)

 

삼계(三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무심(無心)으로 돌아온다.

이 무심이 바로 부처이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무심이란 인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대의 무심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는 무심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부처나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들어 올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무심에서 나온다. 왜 이 무심을 벗어나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오직 이 무심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무심이 부처이다. 그리고 부처가 무심이다. 무심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무심도 없다. 만일 그대가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무심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대 자신을 계속 속이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무심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무심 밖의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에게 비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들은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계율도 지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계율을 깨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것을 따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부처들은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은 채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혈맥론(血脈論) 2 - 본성(本性)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 이르기 위해 스승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그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 받는다.

 

옛날에 선성(善星) 비구는 그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선성 비구도 이와 같을 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대가 자신의 무심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소용이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다른 곳으로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부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 찾아야 할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진리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그대는 힘껏 노력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헛되이 겪지 말라. 부질없이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눈을 떠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그대는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스승을 곧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가 불성을 갖고 있는 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백만 명 중에 하나 정도이다.

 

불법을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붓다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비를 부르는 양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들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망상에 빠져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바로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혈맥론(血脈論) 3 - 진신(眞身)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조건에 따른 것이며 업에 따른 결과이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결과이다. 그것이 윤회의 바퀴를 돌린다. 그대가 삶과 죽음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깨닫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한 생각이나 한 힘, 한 지식이나 한 견해에 매달리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무심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부처는 계율은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부처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만약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의 무심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술 취한 자와 같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 것도 행함이 없는 수행을 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논리적인 사고를 멈출 수가 있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순간이나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무심이라면, 왜 누군가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무심을 보지 못합니까?"

무심은 항상 존재한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무심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가 바로 무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대는 꿈을 꾸어 보았는가?

"물론 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대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것들은 그대와 별개의 것인가?

"예, 그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별개의 것이라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무심이다. 이 무심은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신참자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 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진짜 몸을[이 진정한 존재를]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무심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무심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무심의 빛에 의해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무심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혈맥론(血脈論) 4 - 진여(眞如)

 

붓다는 사람들이 망상이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은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면 왜 그들은 그들 바로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붓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된 사람만이 헤아리기 어려운 그 무엇을 알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무심을 안다. 이 무심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무심이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무심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무심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또한 멈출 수 없는 여래(如來), 불가해한 것, 신성한 자아, 불멸, 위대한 현자로도 불린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 지지만 그것의 본질은 하나다. 부처들 역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무심을 떠나지 않는다.

 

무심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다함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혀로 맛을 보고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무심이다. 매순간 언어로는 가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무심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이 끝없는 모습은 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동작 어떤 형태의 것이든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은 무심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심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을 끝이 없다. 그리고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문제가 있다. 물질적인 육체는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함이 없이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본성이란 자기가 항상 갖고 있는 어떤 것임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이르되 "모습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무심이 부처이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숭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그대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존경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무심은 비어 있으며 어떤 모습도 담고 있지 않다. 겉모습에 매달리는 자들은 모두 마귀들이다. 그들은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 왜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를 숭배하는가? 그것을 숭배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숭배하지 않는다.

 

숭배하게 되면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부처의 본래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명심하라.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무심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무심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귀신이나 마귀나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존경하지도 말라.

 

그대의 무심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겉모습들은 환상일 뿐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라.

 

혈맥론(血脈論) 5 - 선도(禪道)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상상하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 가지 무심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숭배하면 안 됩니까?"

그대는 어떤 부처도 숭배해선 안 된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부처를 숭배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깨어 있음'을, '불가사의한 깨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불가사의하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무심이며, 그 무심이 부처이다. 그 부처가 곧 도(道)이다. 그 도가 선(禪)이다. 그러나 선이란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이다.

 

만약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구절의 글도 읽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도를 찾을 수 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무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그것은 또 다시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차가운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오직 여래만이 아는 그것은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중생의 깨어 있음은 결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무심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외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그들은 도를 잃는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무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안다면, 집착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 나면 경전 전체가 덧없는 장광설로 들릴 것이다. 수천 가지 경문이 하나의 밝은 무심에 못 미친다.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교리가 무슨 쓸모인가?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는 말의 차원이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들은 궁전이든 마차든 밤중의 꿈에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그것들을 가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죽음이 왔을 때 한 순간만 머뭇거려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그대의 진정한 존재]은 순수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나 망상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대는 헛되이 고통 받는다. 그대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본래의 존재와 무심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집착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혈맥론(血脈論) 6 - 각성(覺醒)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은 운명이나 나쁜 운명에서도 자유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행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행위라도 부처는 그것을 탈바꿈시킨다. 천국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확신 없이 행동하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며 피난처가 없음을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의 길을 출발할 때 그대의 깨어 있음은 잘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온갖 이상한 꿈같은 장면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그대가 걷고 서고 앉거나 밤의 어둠과 정적 속에 누워 있는 동안 모든 것이 마치 대낮의 햇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놀라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무심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부처에게 빌 필요가 없다.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의식을 가리는 구름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무심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무심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는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고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깨어 있음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서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도를 찾고 싶다면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말라. 한번 그대가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고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면 남아 있는 모든 집착을 사라질 것이다. 이해가 저절로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붓다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그들은 성인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운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은 그러한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혈맥론(血脈論) 8 - 공적(空寂)

 

자신의 무심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다. 속인도 부처다.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으면 한낱 광신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혼한 속인도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일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면 성이란 기본적으로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 속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음에 따라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설령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온(五蘊)의 허깨비 몸속에 살지언정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조차도. 그대는 모든 것을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대는 막힘없는 영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과 사의 바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보면 그대는 이미 부처다. 설령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도살함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스물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무심의 등불을 전하셨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 온 단 한 가지 이유는 이 무심이 곧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즉각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계율이나 헌신 혹은 고행 수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무심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떠남 없이 떠나고, 봄 없이 보고, 웃음 없이 웃고, 들음 없이 듣고, 앎 없이 알고, 기뻐함 없이 기뻐하고, 걸음 없이 걷고, 머무름 없이 머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에 이른다. "언어를 넘어서 가라. 생각을 넘어서 가라."

 

나는 계속할 수도 있지만, 이 간단한 설법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오성론(悟性論) 1 - 불승(佛乘)

 

도(道)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겉모습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경에 이르기를 "무 집착이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겉모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욕심과 성냄과 망상의 세계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욕심과 성냄과 망상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뜻한다. 경에 일렀으되 "부처들은 세 가지 독(三毒)과 함께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 나감으로써만이 부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세 가지 독이란 욕심과 성냄과 망상이다.

 

경에 이르기를 "오대(五大)의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깨달음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이 곧 선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이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시방(十方)의 부처들이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무심을 보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선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중생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고행자는 고요히 머문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고행자 둘 다를 뛰어 넘는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모든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낮게 한다. 그러한 것이 위대한 선의 능력이다.

 

 

오성론(悟性論) 2 - 중도(中道)

 

마음을 사용해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해탈이다. 감각의 먼지에 때 묻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다르마를 지키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집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다른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지식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彼岸)이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오직 깨달은 자들만이 행할 수 있다.

 

삶을 죽음과 다르게 보거나, 동(動)을 정(靜)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열반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의 본질이 본래 텅 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고 상상함으로써 소위 성자나 현자라고 일컫는 이들은 결국 열반이란 덫에 걸리고 만다.

 

깨달은 자들은 고통이 본래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텅 빔에 머물기에 그들은 열반에 머문다. 열반은 탄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한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에 들어간다. 열반은 무심이다.

 

아무도 살지 않은 빈 집과 같으니 욕심도 성냄도 망상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전혀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들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만들어 낸다. 소위 성자나 현자라고 일컫는 이들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부처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대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투명해질 때 이것이 진정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이다.

 

오성론(悟性論) 3 - 실체(實體)

 

경에 이르기를 "지혜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실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알 때,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한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에 의존한다. 실체가 그대에 의존할 때,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실재하는 것이 거짓이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모든 것이 거짓이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실체는 그의 마음을 지어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과 실체가 둘 다 고요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 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라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질문할 때 그대는 틀린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가 고통과 죽음의 구조물이다. 그대가 깨어날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는 열반과 불멸의 구조물이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도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도를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사용해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불성이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며, 삶과 죽음을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망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삶 속에서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태에 물들지 않고 형태를 보며, 소리에 물들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해탈이다.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선(禪)의 문이다.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의 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 집착에 머무는 자는 해탈에 이른 것이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있을 때 마음은 지옥이다.

 

오성론(悟性論) 4 - 불종자(佛種子)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도(道)의 길에서 목격된 것이다. 그것은 소위 성자나 현자라고 일컫는 이들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무심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무심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무심 밖 어디선가 열반을 본다면 그대는 스스로를 망상에 빠뜨린 것이다.

 

모든 고통이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지혜를 찾아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낟알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淨土)에 사는 것이다.

 

다르마가 아닌 언어는 없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도(道)이다. 하루 종일 침묵하며 앉아 있어도 무엇인가를 떠든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침묵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면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하면 그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그 침묵은 구속되어 있다. 언어란 본래 자유롭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언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음은 그대의 감옥이다. 무심은 그대의 자유이다. 마음은 그대의 무지이다. 무심은 그대의 깨달음이다. 마음에서 무심으로 옮겨 가라. 이것이 모든 도의 길이며, 모든 종교의 길이다.

 

오성론(悟性論) 5 - 중생(衆生)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마음이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으로 고통 받으면 그것은 중생심이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다. 겨울이 되어 얼었던 얼음은 여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더 이상 불성은 없다. 분명 얼음의 본성이 곧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공평함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키는 것은 고통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은 깨어 있음이 고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거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깨어 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 모든 부처들은 망상을 아버지로 삼고 욕심을 어머니로 삼는다. 망상과 욕심은 중생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어떤 겉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을 때, 그대는 망상과 깨어 있음 모두를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망상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이쪽 언덕에도 없고 저쪽 언덕에도 없다. 그리고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소위 성자나 현자라고 일컫는 이들은 강물 중간에 있다. 그리고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오성론(悟性論) 6 - 삼신(三身)

 

부처들은 세 가지 몸(身)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응신(應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응신은 현신(現身)이라고도 부른다. 현신은 중생이 선행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중생이 지혜를 쌓을 때, 그리고 법신은 중생이 숭고한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들은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가지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의 몸이란 말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해력은 얕을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고, 깊을 수도 있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복을 쌓는다고 상상하면서 현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중간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고통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상상하면서 보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해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불성을 체험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법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 무심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각 개인이 업(業)을 만든다. 업이 각 개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보상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다르마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과 함께 사라진다.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인이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성인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무심에서 나오는 지혜가 곧 성인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경에 일렀으되 "모든 겉모습이, 겉모습이 아님을 알 때 그대는 여래를 아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수천, 수만의 문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의 겉모습들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중생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염려한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 배고픔을 염려한다. 그들의 삶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성인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들은 도의 길을 따른다.

 

파상론(破相論)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모든 열매와 꽃들, 모든 가지와 잎들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에 거름을 주면 나무는 크게 자란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 자신과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비순수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위에 기뻐하며, 비순수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순수함과 비순수함에 영향 받지 않는 사람이 곧 성인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비순수한 마음의 덫에 걸리고 자신의 업에 얽매인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는 번뇌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비순수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進我)를 흐려 놓기 때문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불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 그러나 한번 오온(五蘊)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항아리 안의 빛처럼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서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이다. 자신도 깨어 있고 남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로부터 모든 덕의 열매와 열반의 열매가 자란다.

 

(출처/네이버 블로그~구름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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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현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