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에는 3천6백의 방문(旁門), 72종(種의) 좌도(左道)가 있느니라.
내가 말한 좌방이란 것은 이에서 유래한 것이니라.
이것은 한 묶음으로 술(術), 류(流) 동(動) 정(靜)을 이루므로 사과(四果)의 문(門)이라고도 일컬어지느니라.
하지만 내가 전하는 진법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를 합일(合一)하는 불이(不二)의 법문으로
일관선천(一貫先天)의 대도(大道)이니라.”
“술, 류, 동, 정을 일컬어 사과의 방문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옵소서.”
“술이란 법술(法術)을 뜻하는 것이니라.
부적을 쓰고 주문을 외우고 운무(雲霧)를 타고 오르거나 하늘을 날고 허공(虛空)을 걷는 따위가
그것이니라.
여기에는 별을 밟고 걷는 것이나 우레를 불러 장수로 삼고 콩깍지를 흩뿌려 병졸로 삼는 일.
오행(五行)을 빌려 다섯 가지 둔갑술로 변화를 일으켜 모습을 감추어 도망치는 것 등
72가지의 법술이 있느니라.
하지만 이런 법술로는 초생료사(超生了死)할 수 없느니라.
이는 어느 것 하나도 결코 바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조사의 거침없는 설명에 혜가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경청했다.
“류란 주류(週流)이니 두루 흘러 다님을 뜻하는 것이다.
구름처럼 떠돌고 산이나 우상에 절하고 시방으로 다니며 모금을 하고 절을 수리하고 탑을 세우며
의술과 복술과 점성술과 관상술, 그리고 역술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하느니라.
과거와 미래를 잘 맞추어 귀신같은 영험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느니라.
류에는 구류(九流)라고 해서 유(儒) 도(道) 음양(陰陽) 법(法) 명(名) 묵(墨) 종횡(從橫) 잡(雜)
농(農)의 아홉 유파가 있으며 삼교(三敎)도 이에 포함되느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입으로 삼매(三昧)를 말하고 있지만 류도(流道)를 벗어날 수 없느니라.
이것으로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고 생사를 마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정법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이어서 달마는 ‘동’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풀이해 주었다.
“동이란 행동(行動)을 뜻하는 것이다.
팔단금(八段錦) 같은 기공(氣功)을 배우는 것이나 인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토납(吐納)하는 따위는
동에 속하느니라.
손바닥을 비비고 주먹을 쓰는 일, 채약(採藥)하여 연단(煉丹)하는 일, 젖을 먹고 정액을 삼키는 일,
서거나 앉거나 걷거나 뛰는 운기(運氣)공부 같은 일체의 동작 행위는 유형(有形)의 도이니라.
이것 역시 아무리 공력이 높더라도 초생료사할 수 없느니 정법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혜가는 새삼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달마 조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은 정적(靜寂)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고요함을 탐하는 것이 정이니라.
흔히 암자에 숨거나 동굴 속에 들어가 정좌(靜坐)하여 공(空)을 관(觀)하고,
수식(數息)으로 지념(止念)하고, 벽곡하여 몸을 단련하는 따위는 이에 속하느니라.
이런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머릿골 정수리의 니환(泥丸)을 지키거나,
엉치등뼈인 미려(尾閭)를 지키거나, 항문(肛門)인 곡도(穀道)를 지키거나,
배꼽인 제륜(臍輪)을 지키기 마련이니라.
흔히 눈은 코를 보고 코는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하느니라.
혈심(血心)으로 황정(黃庭)을 삼고 간장(肝臟)과 폐장(肺臟)을 일컬어 용호(龍虎)라고 하기도 하고
심장(心臟)과 신장(腎臟)으로 감리(坎離)의 괘(卦)로 삼기도 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두 젖가슴 사이의 중단전을 지키며
어떤 사람은 성(性)을 닦으면서 명(命)을 닦지 않느니라.
그런가 하면 명을 닦으면서 성을 닦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수련은 양(陽)과 음(陰)이 균형을 잃은 것이므로 맹목적인 수련이나 진배없는 것이니라.
이것으로는 결코 생사를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수련을 마칠 수도 없느니라.”
말을 마친 달마는 한참 뜸을 들인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주위를 환기했다.
“내가 특별히 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원심(寃心)이 깊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비록 대도(大道)에 입문했더라도
천명(天命)을 모르기 때문에 조금도 마음을 낮출 줄 모르니라.
이렇게 하여 별도로 자기 문파(門派)를 만들어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사도(邪道)로 이끄니 그 죄가 막대 하느니라.
이런 것으로는 결코 초승(超昇)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더 더욱 정법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니라.
이런 네 가지의 일, 즉 사과(四果)의 방문(旁門)에는 조금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하고 원을 세운 대로 성심껏 수행하도록 하라.”
혜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스승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좌도 방문이 사람들의 생과 사를 오도(誤導)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제자는 오늘 비로소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제가 스승님이 이끄는 진법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수행하는 방법과 중점을 두어야 할 바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대가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지난 49년간에 걸친 수행이 있었기에 그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정도(正道)로 들어가는 첫머리는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지키는 것이니라.
하지만 정법 공부의 시작은 현관(玄關)의 일규(一竅),
곧 한 구멍을 지점(指點)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삼·오(一·三·五)의 숫자에 중점을 두고
구전(九轉)의 연단(煉丹)을 발판으로 삼아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삼교합일(三敎合一)과도 관계되는 것인지요?”
“삼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삼교란 본래 나누어질 수 없는데도 인간이 멋대로 나누어 파당을 지은 것이니라.
나눈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삼교합일의 이(理)를 밝히고 일·삼·오(一·三·五)의 숫자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삼·오(一·三·五)의 숫자란 무엇을 말하는지 스승님의 가르침을 원하옵니다.”
※正道로 들어가는 첫머리
“일(一)은 곧 ‘하나’이니 내가 말하는 진법은 바로 이 ‘하나(一)’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 하나(一)는 시작하여 없는 하나(一)이고 마침이 없는 하나(一)이니라.
인간들이 구분한 삼교(三敎)도 근원은 이 하나(一)와 일치하느니라.
우리 불가에서는 만법귀일(萬法歸一) 곧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하나(一)’의 진법을 가리키는 것이니라.
도교(道敎)에서는 이것을 포원수일(抱元守一)
곧 으뜸(元)을 품고 하나(一)를 지키는 것이라 하고,
유교(儒敎)에서는 집중관일(執中貫一)
곧 가운데(中)를 잡고 하나(一)로 관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삼교가 모두 하나(一)로 중심을 삼고 있는 것은 결국 근원이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니라.
이런 이치를 알고 ‘하나(一)’의 공부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 몸(人身)을 빗대어 이런 이치를 설명하면 온갖 공부법의 뿌리는
바로 ‘한 구멍’ 곧 일규(一竅)로 돌아가는 것 또는 일규를 관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달마는 천일(天一) 지이(地二) 인삼(人三)의 이치를 설명했다.
일(一) 곧 ‘하나’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무극(無極)의 진리를 표방한다고 했다.
‘하나’는 가로로 그리면 일(一)이 되지만 둥글게 그리면 ‘원(○)’이 된다.
‘원’은 무시무종(無始無終) 곧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천부경>에서는 이것을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고 했다.
이 ‘원’은 우주의 진공체(眞空體)를 말하는 동시에 하늘의 ‘형상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역(易)에서는 하늘의 수하나(天一)가 물을 낳는다.(生水)고 했다.
이 하나(一)가 삼(三)으로 변해 천삼생목(天三生木)하는 것이 우주의 이치다.
하나가 셋으로 변하고 셋이 원주율(圓周率)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우주의 창조와 변화가 일어난다.
흔히 선천(先天)의 변화원리를 수화기제(水火旣濟)라고 일컫는다.
물론 수화기제는 수행자에게 있어서도 깨달음에 이르는 법칙이다.
숨기운을 사람 몸에 돌려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이루어지면 진단(眞丹)이 결성(結成)되기 때문이다.
이 공부는 오로지 잡념을 쫓고 일심불이(一心不二)로 해야만 진경을 볼 수 있다.
달마는 삼(三)을 풀이하여 삼가(三家)라고 했다.
하나(一)의 본성(本性)은 셋(三)으로 나누어지니,
사람 몸으로 말하면 정·기·신(精·氣·神)을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람 몸의 삼보(三寶) 곧 세 가지 보물이라고까지 지칭된다.
흔히 불교에서는 삼귀(三歸) 유교에서는 삼강(三綱) 그리고 도교에서는 삼청(三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록 법은 셋(三)으로 나누어지지만 이(理)는 하나(一)임을 새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행자는 반드시 정·기·신의 세 가지 진보(眞寶)를
한 곳에 모으는 공부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부가 없이는 삼화취정(三花聚頂)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군다나 견성(見性)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공부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일 따름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삼귀를 청정(淸淨)하게 해야 하며
삼염(三厭)으로 더럽혀져 집중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달마는 다섯(五)을 풀이하여 오원(五元)이라고 했다.
사람 몸에선 심(心) 간(肝) 비(脾) 폐(肺) 신(腎)의 오장(五臟)이 오원이다.
불교에서는 다섯과 관련해서 오계(五戒)를 말하고 유교에서는 오상(五常)
그리고 도교에서는 오행(五行)을 내세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한 가지의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역(易)에서는 오생토(五生土)라고 했다.
여기서 토(土)는 중앙(中央)이며 바탕이라는 뜻이다.
수행자가 바탕을 잡지 못하고 중앙의 중심을 잃게 되면 아무런 공효(功效)도 이룰 수 없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일규(一竅) 곧 한 구멍을 열고 호흡을 가다듬게 되면
단약(丹藥)이 결성되고 선천(先天)으로 돌아갈 수 있는 법이다.
이때의 숨고르기는 오장(五臟)의 정화(精華)를 한 곳에 모으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오기조원(五氣朝元)이 연성(煉成)될 수 있는 것이다.
달마는 이 공부를 위해서는 반드시 오계를 지켜야 하며
참선자는 마땅히 오훈채(五葷菜)를 금기(禁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혜가는 스승의 청산유수 같은 설법에 다만 감격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달마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려 다시 한 번 배례(拜禮)하고 물었다.
“스승님, 오훈채를 금하셨는데 그 까닭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달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오훈채는 파, 마늘, 부추, 달래, 무릇(흥거) 등 다섯 가지를 일컫는 것이니라.
이것들은 풀 가운데서도 장군(將軍)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뜻에서도
기미(氣味)가 흉험(凶險)한 것들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성질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수행자를 다치게 할 것이니 금하라는 것이다.”
달마는 혜가에게 자애로운 눈길을 보내면서 설명을 이었다.
“수행자가 파를 먹으면 신장 곧 콩팥을 상하게 되고 수기(水氣)가 밖으로 빠져 나갈 염려가 크니라.
마늘은 심장을 상하게 하고 화기(火氣)를 인멸(湮滅)시킬 것이니라.
부추를 먹으면 간장이 상하고 목기(木氣)가 모두 소산(消散)되느니라.
달래는 비장을 상하게 하고 토기(土氣)를 내몰아 피곤하게 하여 고통을 주느니라.
또한 무릇은 폐장을 상하게 하고 금기(金氣)를 쫓아내 흩어지게 하느니라.
이 오기(五氣)로 상처를 입게 되면 결코 결단(結丹)을 이룰 수 없느니라.
수도하는 사람은 오훈채를 먹지 말라는 계율은
내가 스승 반야다라 존자에게 전수받은 정전(正傳)이니 반드시 지키도록 할지어다.
이와 더불어 오계를 엄하게 지켜야 하느니라.
이렇게 해야 오기조원(五氣朝元)을 연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할지어다.”
혜가가 스승에게 물었다.
“제자는 오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 깊은 이치는 아직 잘 알지 못하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오계 가운데 첫 번째로 살생을 금하는 까닭은 인덕(仁德)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이니라.
하늘이 만물을 살리는 덕을 본받아 살생을 하지 말고 방생(放生)을 해야 하느니라.
사람은 인회(寅會)에 동토(東土)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곤궁에 파묻혀 살고 있나니,
사람이 죽어 짐승이 되고 짐승이 죽어 사람이 되는 겁겁의 윤회전생을 거듭하고 있느니라.
이런 가운데 우매하게도 많은 잘못을 저질러 사람이 짐승을 먹고 짐승 또한 사람을 먹으니
이렇듯 비정(非情)할 수가 어디 있겠느냐.
사람은 도를 얻어 서천(西天)으로 돌아가서 마땅히 극락경계(極樂境界)에 초생(超生)해야 하느니.
원채(寃債)를 갚지 않고선 어찌 그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반드시 방생하고 원채를 갚아야 하느니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얼(寃孼)이 거미줄처럼 몸을 얽어맬까 두렵도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천리양심(天理良心)을 손상시키고
오직 원얼의 부채를 무겁게 할 뿐이니라.
비록 부처님의 자비심일지라도 이런 잘못은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행해질 수도 없느니라.
이런 원얼이 한 구멍을 혼미 시키면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후퇴시키고도 조차 믿지 못하게 하느니라.
이렇게 하여 좋은 법연을 잃게 되면 만겁을 지나도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이런 겁운(劫運)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지 자세히 살펴야 하느니라.
하늘이 내신 동물을 어찌 참혹하고 잔인하게 죽이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흉악한 행동을 일삼아
독(毒)으로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살상하여 짓는 원얼이 결코 가볍지 않도다.
하늘이 법을 정해 겁운을 내리니 마왕(魔王)이 명을 받아 온 세상에서 벌떼같이 일어나느니라.
그대가 남을 죽이면 남 또한 그대를 죽이니 이로써 겁운이 그칠 새 없이 터져 나오느니라.
수행하는 사람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살생하면 그 죄는 10배로 무거워지느니라.
부처의 자비, 공자의 충서(忠恕), 노자의 감응(感應)을 명심하라.
이 여섯 글자를 마음에 새겨두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남에게도 미치도록 할지어다.
천심(天心)을 몸 받고 인심(人心)을 펼쳐 물성(物性)에까지 이르도록 하여야 하느니라.
이미 내가 이루었다면 또한 남이 이루게 하는 일을 가벼이 보지 말지어다.
초목(草木)을 꺾는 것도 기혈(氣血)을 손상시켜 죄가 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명(命)을 해치고 살생을 한다는 말인가.
불상생(不殺生)의 계는 그 이치를 말하려 하면 한도 끝도 없느니라.”
혜가는 살생을 금하는 계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았다.
스승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투도계(偸盜戒)도 밝혀 가르쳐 주시옵소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율은 원래 의기(義氣)를 중요하게 여긴 데서 생긴 것이니라.
절대로 편견이나 각박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라.
비록 평등하다고 할지라도 남자는 마음을 밖에다 두고 여자는 마음을 안에다 두어야 하느니.
각자가 할 일을 다 하고 헛되이 구하지 않으면 지인(志人) 측에 드느니라.
남녀가 모두 단정(端正)을 철저하게 배워야 하느니.
망령되이 탐하지 말고 망령되이 취하지도 말며 오로지 청렴결백해야 하느니라.
한 포기의 풀, 한 푼의 돈도 가지게 될 때는 까닭이 있으며
한 오라기의 실, 한 발의 새끼줄에도 주인이 없을 수 없느니라.
물건을 살 때도 그렇거니와 물건을 팔 때도 공정(公正)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느니.
사람에게 재물을 속이면 오래 가지 않을 뿐더러 죗값을 받게 되느니라.
그렇게 하여 남이 금과 은을 가득히 쌓아 놓았다고 해서 두려워 할 까닭이 없느니라.
재물은 그것이 몸 가까이 있든 눈앞에 있든 간에 조금도 마음이 동요돼서는 안 되느니.
혹시 취할 일이 있더라도 함부로 취하거나 속여서 취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망령되이 취한다면 의(義)를 손상시켜 성인(聖人)의 도(道)를 배반하는 것이 되느니라.
불문에 들어 대도(大道)를 닦고자 할진댄 귀계(歸戒)하여 청정(淸淨)해야 하느니라.
이것을 어찌 거침없이 행하는 소인배의 행동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티끌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떠들썩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재물을 탐하지 않거나
금전을 움켜쥐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구나.
눈을 감고 사람들을 상등(上等) 중등(中等) 하등(下等)의 세 부류로 나눠 생각해 보니
대개 미망 속에 빠져 계산기만 두들길 뿐 지음(知音)의 인(人),
곧 부처님의 소리를 아는 사람은 없구나.
도둑질하는 자만이 하늘의 양심을 잃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비록 도둑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돈을 탐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지나치게 이(利)를 탐한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수행하는 사람도 돈을 보고 마음을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재물을 뜻한 재(財)라는 글자는 혼백(魂魄)을 혼미케 하는 큰 구렁텅이 같은 것이니라.
이후로는 계율을 엄히 지켜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하느니라.
수행하는 사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공(功)을 닦아야 하니 털끝만치도 탐하지 말고
털끝만치도 물들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참되게 본성(本性)을 함양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해서 공성(功成)하게 되면 온몸은 칠보(七寶)단장하듯 보신(寶身)으로 감싸 지느니,
그 보물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하리라.
이것을 일컬어 공을 이루어 성의(聖衣)를 입고 성반(聖飯)을 먹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은 곧 영득쾌락(永得快樂)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니라.”
혜가는 스승 달마의 설법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새겨들었다.
그는 진짜 ‘보신(寶身)’과 ‘성반’ 및 ‘성의’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진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달마가 설법한 오계(五戒)는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 고불(古佛)시대부터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달마의 설법은 이를테면 모든 가르침을 아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는 오계의 세 번째인 사음(邪淫)을 금(禁)하는 계를 설명했다.
달마는 본래 예절(禮節)을 근본으로 삼은 데서 이 계율이 생겨난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절대로 욕념(欲念)이 일어나지 않도록 절제하고 금욕하라고 가르쳤다.
달마는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정절(貞節)을 지키고 여자는 청결(淸潔)을 지켜
의마심원(意馬心猿)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날뛰지 않도록 해야 하느니라.
마음속에 항상 염치(廉恥)의 씨앗을 간직함으로써 마음은 입(口)에 묻고,
입은 또 마음에 물어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고 근신해야 하느니라.
부질없는 정념(情念)은 티끌만치도 없어야 하며 그 씨앗은 뿌리부터 잘라 버려야 하느니.
천지(天地)간에 오직 금수(禽獸)만이 수컷과 암컷이 혼교 하여 수치도 모른 채
추악한 소리를 질러대니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도다.
만물의 장(長)인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염치와 예절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윤리를 어지럽히면 비록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금수와 다를 바 없느니라.
옛 동이(東夷) 곧 배달의 남자는 미인이 지나가도 문을 닫고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느니라.”
혜가는 동방예의지국의 연원이 결코 오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새삼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설법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대도(大道)에 입문한 것은 모두 선불(仙佛)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니라.
중생들이 인회(寅會)에 동토(東土)에서 태어난 지 어언 6만 년.
어떤 때는 여자로 태어나 전변(轉變)을 거듭했느니라.
사람은 하늘의 씨앗이니 하늘로 돌아가야 하느니라.
삼기(三期)에 이르러 도문(道門)이 널리 열려 있으니,
수행하는 사람은 모두가 골육치진(骨肉之親)이며 영산(靈山)의 한 핏줄임을 명심할지어다.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음욕을 한 칼로 잘라 버려야 하느니라.
아무리 미인이라도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느니,
그렇지 않으면 맹수나 독충에 물려 몸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될 것이니라.
음욕을 품지 않도록 마음을 닦아 그 음욕의 그림자조차도 없애버리면 불선(佛仙)이 되는 것은
이미 손아귀에 있는 것과 같으니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음욕은 수마(首魔) 곧 으뜸 되는 마귀이니
도(道)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총체적인 병(病)은 바로 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수행자들의 대부분은 말은 그럴 듯하게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겉으론 깨달음에 이른 듯 보이지만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엉큼하여 짐승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수행하는 자는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자기 마음을 살펴 자문(自問)해 보아야 할지니,
삿된 음욕이 도(道)를 패퇴시키는 실상을 깨달아야 하리라.
색(色)에서 태어나서 색으로 죽으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구나.
비록 깨어났더라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듯싶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으니,
수행을 이루지 못한 자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뼈는 봉우리가 되었구나.
선불(仙佛)의 뿌리가 티끌 세상에 떨어졌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쏘냐.
큰 뜻을 세운 자는 모름지기 염두(念頭)를 철석(鐵石)처럼 굳세게 가다듬어야 하느니라.
색(色)이 공(空)임을 알고 이것을 늘 마음에 새겨 두고 꾸준히 행하게 되면
이윽고 무인(無人) 무아(無我)가 되어 사상(四相)이 모두 깨끗하게 되리라.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나의 본래(本來)의 면목(面目)이 성체원명(性體圓明)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사음계를 어린 아이 장난처럼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지니
모름지기 근신(謹愼)하고 또 근신할지어다.”
혜가는 스승의 사음계에 대한 강설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 옴을 느꼈다.
자기 자신도 말로만 음욕을 품지 말라고 했을 뿐 올곧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혜가는 두 손 모아 스승 앞에 다짐했다.
“사음계의 가르침을 비로소 깊이 깨달았나이다.
술과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도 설명해 주시옵소서.”
“주육(酒肉)을 금하는 계는 원래 지혜(知慧)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
청(淸)과 탁(濁)을 섞지 말라는 것이니라.
술을 끊고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 까닭은 탁함을 멀리 하고 청정을 머물게 하기 위함이니라.
절대로 입과 배를 탐해서 진성(眞性)을 어지럽혀 미혹케 해서는 안 되느니라.
오계 가운데서 술은 계율의 첫머리라고도 할 수 있나니, 그대는 결코 가볍게 보지 말지어다.
술은 비록 물처럼 부드럽다고 할지라도 독기(毒氣)가 매우 심하니,
세 잔만 뱃속에 들어가도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혼미해 지느니라.
마시고 취하면 미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깨어나지 못해
염치를 잃고 덕행(德行)을 상실하여 흉포한 짓을 하기 쉬우니,
이런 때는 친척이나 지인(知人)도 몰라보고 입을 열어 욕설을 퍼붓고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리느니라.
이것은 생사(生死)와 성명(性命)을 생각지 않는 것이니 하늘의 재앙을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라.
법에는 사사로운 정이 없으니 술이 깨어 후회하더라도 이미 소용이 없느니라.
옛날에 우왕(禹王)이
맛 좋은 술을 싫어하고 선(善)한 말 듣기를 좋아했다는 고사를 본받아야 할 것이니라.
일찍이 공자도 술을 마시면 어지러움을 벗어날 수 없다고까지 경계하지 않았더냐.
더군다나 술은 오장(五臟)을 뚫는 독으로 삼보(三寶)를 손상시킬 뿐이니라.
나라를 망하게 하고 집안도 기울게 하는 화근(禍根)이 되느니라.
속인(俗人)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두려워하고 삼가 경계해야 하거늘
하물며 청결에 귀의하기로 뜻을 세운 수행자는 두말 할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비록 감주(甘酒)일지라도 마셔서는 안 되느니,
그렇게 가볍게 뜻을 꺾으면 심신(心神)의 혼란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라.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도 잘 지켜야 할 것이니,
공(功)이 있어 천도를 시켜 주지 못할망정 어찌 감히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만일 공을 이루어 그 원혼을 풀어주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져 죗값을 받으리라.
지옥에 가면 먹은 고기의 분량만큼 고기로 갚으라는 염라대왕의 판결을 받을 것이리라.
고기를 뜻하는 ‘육(肉)’의 글자꼴에 인(人)이란 글자가 두 개나 겹쳐 있는 까닭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것은 사람이 먹은 고기는 사람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라.
사람은 모름지기 천지(天地)의 청기(淸氣)를 받아 본성(本性)을 이룬 데 비해서
짐승은 천지의 탁기(濁氣)를 받아 태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도를 깨닫고자 하면 탁기에서 벗어나야 하느니라.
탁기를 제거하면 비로소 청기(淸氣)가 상승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느니라.”
혜가는 스승의 설법을 통해 청기가 하늘로 오르고 탁기가 땅에 떨어지는 이치를 새삼 인식하게 됐다.
달마는 혜가의 진지한 표정을 살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오계의 마지막 계율인 망어지계(妄語之戒) 곧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을 풀이할 것이니 잘 들어라.
이 계율은 신실(信實)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니라.
사람을 만나서 절대로 허세를 부리거나 빈말을 하지 말라.
말에는 전범(典範)이 있고 행동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으니
충신독경(忠信篤敬)의 네 글자를 명심할지어다.
충성(忠誠)과 신실(信實) 그리고 돈독(敦篤)과 공경(恭敬)으로 임하면
오고 감에 맑음과 밝음이 있어 조금도 의심이 생기지 않으리라.
세상 사람들은 대개 허황한 말과 야릇한 논리를 펼치면서 문제와 사건을 일으키고
중인(衆人)을 속이기 일쑤이니
동쪽에서는 좋다고 말하고 서쪽에서는 나쁘다고 말하면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느니,
겉모양은 자비로운 것처럼 보이나 마음은 악독하고 입으론 부처님처럼 말하지만 마음은 뱀과 같으니라.
혀는 칼날 같으니 사람을 죽이려 들면 피하여 숨을 곳이 없고,
뜻은 검처럼 사람 몸을 베니 아무도 피할 수 없으리라.
이런 자들은 나만의 배부름과 따뜻함 그리고 편리함과 안온함만을 도모하니
다른 사람이야 쓴맛을 보든 단맛을 보든 간에 전혀 개의치 않느니라.
이승에 살면서 혀를 칼로 삼아 세상을 어지럽히면 저승에 가서 심간(心肝)이 찔리고 혀가 뽑히리라.
수행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말고 말에 신(信)이 있어야 하느니라.
과장된 말이나 교묘한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사람을 만나서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예의와 염치를 일깨워 좋은 길로 선도해야 하느니라.
불효하는 사람에게는 효도를 권하고 음란한 사람에겐 정절(貞節)을 권하고,
삿된 짓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짊(賢)을 권하고,
악한 사람은 선(善)의 길로 이끌어 인심(人心)을 잡아서 돌이키도록 하여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권하여 신(信)에 따르도록 하면
못된 사람도 없어지고 흉포한 것도 없어져 절로 청평(淸平) 곧 태평(太平)을 보게 되리라.
하늘과 땅, 연월일시(年月日時)는 모두 신(信)에 따라 운행되고 있느니라.
만물과 사람도 역시 신에 따라서 생겨났느니라.
만약 신이 없다면 이 세상 어디에도 인륜(人倫)이란 있을 수 없느니라.
하늘에 신이 있기에 해와 달과 별이 북두(北斗)를 믿고 따르는 것이며,
땅에 신이 있기에 물과 불과 바람이 곤륜(崑崙)을 믿고 움직이고 있으며,
해(年)에 신이 있기에 사시(四時) 곧 사계절에 온(溫) 열(熱) 량(凉) 한(寒)이 있으며,
달(月)에 신이 있기에 초하루와 보름에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으며,
날(日)에 신이 있기에 십이시(十二時)에 자시(子時)와 오시(午時)가 표준이 되고 있으며,
시(時)에 신이 있기에 시간마다 팔각오분(八刻五分)이 있으며
괘(卦)에도 신이 있기에 건(乾) 곤(坤) 감(坎) 리(離)가 정하여 있느니라.
신은 토(土)에 속하여 오상(五常)을 꿰뚫고 오행(五行)을 일관(一貫)하느니라.
하늘과 땅이 합치되면 연월일(年月日)은 당연히 신(信)에 따라 운화(運化)하고
만물과 사람도 그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니
생겨나면 화(化)하고 화하면 생겨나는 것 또한 하나의 신에 의한 것이니라.
만약 신이 없다면 화하고자 하는 해도 화하지 못하고 생기려고 하는 해도 생겨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오계는 엄격하게,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켜야 하느니라.
뿐만 아니라 오계는 오행과도 밀접하게 연관시켜야 하느니라.
여기에 더하여 삼화(三花)를 머릿골 정수리에 모아야 하느니,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삼염(三厭)을 깨끗하게 제거해 버려야 하느니라.”
“본래면목과 無字眞經을 깨쳐야 하느니”
부귀와 세속의 풍조
결코 탐하지 말고
남이 나를 해칠지라도
범연하게 경의 표하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삼화취정(三花聚頂)이 되어야 하고
그 전제조건은 삼염(三厭)을 제청(除淸)하는 것이라는 스승의 설법에 혜가는 귀가 번쩍 열렸다.
무릎을 세워 한 걸음 나아가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스승님이시여, 미혹한 제자는 삼염(三厭)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나이다.
부디 가르침으로 밝혀 주시옵소서.”
달마는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우선 염(厭 : 싫을 염, 가득 찰 염)이라는 글자의 뜻부터 알아야 하느니라.
이 글자는 옛날 배달의 성인(聖人) 창힐(倉頡)이 창조한 표의문자 곧 한자의 하나인데
‘염’이란 글자꼴의 한가운데에 해(日)를 놓고 그 주변을 사음(四陰)으로 감싸 만든 글자이니라.
‘염’에서 위로 비낀 ‘一’은 음이고 해(日) 밑에 놓은 달(月)도 음이며 왼편에 삐친 ‘丿 ’도 음이요,
바른쪽의 개(犬)도 음 기운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여기에서의 개는 천구(天狗)이니 해와 달을 먹어 버리느니라.
이른바 삼염(三厭)은 삼화(三花)를 해치는 것이므로
그것이 제거되지 않고선 수행이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대개 삼염에는 세 부류가 있으니
하늘을 가로질러 나는 새는 천염(天厭)이요,
땅을 가로질러 달리는 짐승은 지염(地厭)이요,
물 속을 가로질러 헤엄치는 고기는 수염(水厭)이라고 하느니라.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순양체(純陽體)를 닦아야 하므로 음기(陰氣)를 범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리가 먹는 오곡(五穀)은 땅에서 하늘로 몸을 곧고 길게 뻗으니 순양체이니라.
그러나 삼염은 변환체(變幻體)에 속하니 그것은 먹는 것조차 비참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삼화’를 올곧게 닦고 삼귀(三歸)를 바로 지켜야
비로소 진전(眞傳)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할지어다.”
혜가는 고개를 들어 우러러 달마 조사에게 물었다.
“어리석은 제자는 삼귀(三歸)의 이치(理致)에 대해 대강은 아오나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스승님의 자세한 가르침을 원하옵니다.”
달마는 게송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처님께 귀의하려면 자비를 일으키고 늘 청정해야 하느니,
힘써 본래의 면목(面目)과 무자진경(無字眞經)을 깨쳐야 하느니라.
부귀(富貴)와 세속에 물든 풍조를 탐하지 말아야 하느니,
은혜(恩)와 사랑(愛)같은 세속 홍진(紅塵)의 미정(美情)에 연연해서는 안 되느니라.
주색(酒色)과 재기(財氣)를 한칼로 베어 버리고 대장부답게 티끌 같은 세상을 박차고 뛰어넘을지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때리면 대항하지 말고 염불하며 마음을 잡을지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면 입으로 대거리하지 말고 허허 웃어넘길지어다.
남이 나를 해칠지라도 범연하게 경의(敬意)를 표하고,
나를 질투할지라도 그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지어다.
나를 비방하더라도 좋은 말로 그를 상대하고
나를 기피하고 싫어하면, 그럴수록 그에게 존경의 뜻을 표할지어다.
사람을 만나면 좋은 말로 정성껏 가르쳐 주도록 하여라.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가려서 알맞게 가르쳐야 하며
기회를 보아 정까지도 베풀도록 하여라.
고선불(古仙佛)이 동(動)과 정(靜)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항상 살펴 연구할지어다.
부처님의 행실을 배우지 않고 어찌 삶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
부처, 부처 하지만 부처님은 원래 속세인연을 완전히 버리신 분이시니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나 흙으로 빚은 유상(有像) 유형(有形)의 불상은 아니니라.
형상(形像)있는 것은 곧 후천(後天)의 것으로 언젠가는 부서져 없어질 것이니,
무위(無爲)의 본체(本體)와 태허(太虛)에 부합하지 않고선 생사를 벗어날 수 없느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곧 행하고, 서고, 앉고, 누워서 선을 닦을 때
한시도 현관을 떠나서는 안 되느니라.
관자재(觀自在)로 행심(行深)하여 반야(般若)를 이루면 법륜(法輪)이 돌게 되느니라.
정(精)은 기(氣)로 화(化)하고 기는 신(神)으로 화하나니,
그 묘의(妙意)는 말로 설명할 수 없도다.
신이 허(虛)로 돌아가고(還) 허가 무(無)로 돌아가면
성광(性光) 영통(靈通)이 이루어지리라.
진(眞) 가운데 가(假)가 있고 ‘가’ 가운데 ‘진’이 있으니
진여(眞如)가 스스로 정(靜)을 찾으면 비로소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느니라.
이것이 곧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임을 그대는 알지어다.”
달마는 숨을 돌리면서 잠시 말을 멈췄다.
혜가는 스승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스승님, 법(法)에 귀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옵소서.”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법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규율을 지키고 법칙을 문란케 해서는 안 되느니라.
불규(佛規)를 따르고 예의를 지키며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야 하느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자비를 베풀고 규율에 따라 가르쳐야 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간(諫)할 때는 예의에 벗어나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느니라.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행동하는 동안에는 품격을 세워야 하며
의관(衣冠)을 단정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한가로이 앉아 있을 때도 태산처럼 좌정하여 황정(黃庭)을 지켜야 하느니라.
신성한 불당을 깨끗하게 해야 모든 부처님이 즐거이 거동하시느니라.
자묘오유(子卯午酉)의 사시(四時)에 향(香)을 정성껏 올려야 본성과 신명이 통하느니라.
진경(眞經)을 외우며 잡념을 없애면 신기(神氣)와 함께 있게 되느니라.
현량(賢良)을 모아 법을 설하고 제도하면 마음에 절로 지혜가 생기느니라.
도반(道伴)을 만나면 겸손과 화기(和氣)로 대하고 예의를 다하여 공경할지어다.
마음을 낮추고 기를 낮추어 스스로 아랫사람으로 자처해야 하느니라.
도를 말할 때 함부로 웃지 말고 다투지도 말지어다.
선천(先天)의 도리는 무궁하여 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얕은 것도 있느니라.
교만한 마음, 거짓으로 가득 찬 마음은 모조리 없애야 하고,
간사한 마음, 탐욕스런 마음, 삿된 마음은 먼 하늘 구름 밖으로 던져버릴지어다.
인색한 마음, 각박한 마음은 깨끗하게 씻어 버리고,
질투하는 마음, 시비하는 마음은 조금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명리(名利)의 마음, 은애(恩愛)의 마음은 티끌만치도 쌓아둬서는 안 되며,
주색(酒色)의 마음, 재기(財氣)의 마음은 모조리 뿌리부터 제거해야 하느니라.
뽐내고 싶어 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데도 주저하지 말지어다.
수행을 함에 있어 인상, 아상을 없애면 천하의 제일인자가 되느니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전진하여 철석같은 마음으로 수행하여
무리 가운데서 뛰어나게 되어야 하느니.
많은 법칙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인(聖人)이 되는 심전(心傳)의 법은 분명히 밝혀 가르쳐 주리라.
심법이라고 하지만 우레를 부르고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라.
비와 바람을 불러 장수와 병졸로 삼는 술법은 더더욱 아니니라.
법이라 하는 법은 본래가 무법(無法)의 법이니 그 법은 곧 자성(自性)이니라.
공(空)이라 하는 공은 공으로 떨어지는 공이니 그 공은 진공(眞空)이니라.
단(丹)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을 죽이고 진식(眞息)의 숨고르기를 해야 하느니라.
이때 자(子)와 오(午) 곧 아랫배 하단전(下丹田)과 머릿골 정수리는
아래위로 대칭을 이루고 기의 흐름은 등골로 상승하고 몸통 앞쪽으로 하강하느니라.
이것을 일컬어 납(鉛)을 수은(汞)에 던지고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교합하고
금목(金木)이 병합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리하여 삼화(三花)가 모이고 오기(五氣)가 양육되느니라.
좁쌀만한 구슬이 결성되면 범속(凡俗)을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니,
진사리가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근심과 놀라움이 없어지느니라.
이것이 바로 진법이니 법에 귀의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지어다.”
혜가는 앉은 자세를 바로하면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스승의 이어지는 강설을 기다렸다.
“귀의승(歸依僧) 곧 승(僧)에 귀의한다는 것은
속세의 정경(情景)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하고 뜻에 성의를 담아 수행에 임해야 하느니라.
사나이 대장부로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지니,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어 내어, 낳고 죽는 이치를 깨달아야 하리라.
도를 깨달은 사람은 참과 거짓의 길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으니,
시(是)와 비(非), 사(邪)와 정(正), 호(好)와 오(惡)를 스스로 밝힐지어다.
근기 없는 사람은 불법을 받아도 마음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도를 만나도 뜻이 한결같지 않아 허명(虛名)만 추구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이익을 생각하여 돈벌이에 아귀다툼을 하고,
생활의 편안함을 생각하여 기한(飢寒)을 두려워하며,
심지어는 꾸어준 돈이 회수되지 않을까 걱정을 일삼느니라.
날마다 밤늦게까지 바삐 돌아 안정이 없으니, 늙은이나 젊은이,
그리고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구나.
매일 애써 일해도 마음이 불안하며 수행을 하려 해도 되지 않고 좌선과 염불도 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은 참으로 멍청하여 꿈틀거리는 벌레나 진배없느니라.
기왕에 습(濕)한 곳을 싫어했거늘 낮은 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까닭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이더냐.
귀의승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어찌 은애에 연연하고 집과 재물을 탐하는고.
귀의승을 논(論)하는 처지라면 티끌 속에 있더라도 마음 티끌 속에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며,
속세에 살더라도 세속에 때 묻지 않아야 하느니라.
온종일 바쁘더라도 틈을 내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고요(靜)를 구하면
몸은 비록 속세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하늘 가운데 있으니, 조금도 속정(俗情)이 없으리라.
승과 속의 두 갈래 길은 경계가 분명히 있으니 청(淸)과 탁(濁)을 구분하지 않고
어찌 공(功)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으리.
그대에게 특별히 당부하노니 속히 밝게 깨달아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스스로에게 물어볼지어다.
어떻게 하면 고해(苦海)의 깊은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찾아볼지어다.
내공(內功)으로 논(論)하면 중(僧)이란 곧 진인(眞人)을 이름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애써 참선하여 깨달음을 구할지어다.
그리하면 부처님의 묘음(妙音)을 반드시 얻어서 알게 될 것이니라.
호흡을 운용하여 진식(眞息)을 가다듬고 고르면 현(玄)에서 나와 빈(牝)으로 들어가리라.
감로수(甘露水)가 온몸에 감돌고 단약(丹藥)이 움직여 삼관(三關)을 통과하고 오원(五元)에 이르리라.
황파(黃婆)의 중매로 영아(靈兒)와 타녀(垜女)가 혼인을 하게 되리니,
그 면밀한 묘(妙)는 말로 다할 수 없고 그 낙(樂)의 정경은 끝이 없으리라.
한 톨의 좁쌀이 구곡주(九曲珠)를 맺으니 빛줄기가 머리 위로 등등하게 솟아오르는구나.
삼귀수행(三歸修行)하려는 사람은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반드시 받들어 지킬지어다.
진정으로 삼보(三寶)를 한 묶음으로 닦아서 ‘하나(一)’의 금단(金丹)을 이루도록 할지어다.”
혜가는 달마 조사가 말한 하나(一)의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부처님이 설한 만법귀일의 일(一)이나 고불(古佛) 이래 전해져 온 삼진귀일(三眞歸一)의
하나(一)가 단순히 글자 뜻풀이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혜가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자는 하나(一)의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부디 자세한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달마는 그런 물음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라는 것은 무극(無極) 안에 있는 한 점(一點)의 영성(靈性)이니라.
이 하나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한 진경(眞經)의 골수(骨髓)이니라.
모든 백성과 만물(萬物) 그리고 일체의 영물이 모두 이 하나에서 생겨났느니라.
삼계(三界) 중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로 말미암아 생성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 하나는 하늘(天)과 땅(地)을 안정시키고
양의(兩儀)를 판정(判定)하게 하여 음양을 낳고,
남녀를 생기게 하여 인근(人根) 곧 사람의 근본을 제정(制定)하였느니라.
이 하나는 삼보(三寶)를 생기게 하고 이것이 삼교(三敎)의 강령(綱領)이 되었느니라.
삼재(三才)를 거느리고 삼계(三界)를 세워서 건곤(乾坤)
곧 하늘과 땅을 버티게 하고 있는 것도 이 하나이니라.
바로 이 하나가 태(胎)·란(卵)·습(濕)·화(化)의 사생(四生)을 낳고
사상(四相)을 정위(定位)하고 사방(四方)에 통하고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四季)를 구분했느니라.
이 하나는 오곡(五穀)을 낳고 오기(五氣)를 낳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행(五行)도 생기게 했느니라.
이 하나는 육미(六味)를 낳고, 육기(六氣)를 분성(分性)했느니라.
육효(六爻)를 안배하고 육축(六畜)을 화육하고 육도(六道)로 윤회(輪廻)하게 하느니라.
이 하나는 일곱 개(七)의 구멍을 낳고 칠정(七政)까지도 생기게 했느니라.
방위(方位)마다 칠숙(七宿 : 일곱 별)을 세웠으니 곧 북두칠성이 그것이니라.
이 하나는 팔괘(八卦)를 낳으니 이를 팔대신성(八大神聖)이라 하느니라.
팔방(八方)을 나누고 팔해(八海)를 제어하여 팔부용신(八部龍神)을 생기게 했느니라.
이 하나가 구강(九江)을 낳고, 구곡주(九曲珠)를 정하고,
구궁(九宮)을 구별하고 구관(九關)을 있게 하여 구전(九轉)하여 단(丹)을 이루게 하느니라.
이 하나는 십(十)과 천(千)을 낳고 십불(十佛)로 하여금 온 세계를 보살피게 하느니라.
시방(十方)을 안배했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 십전염군(十殿閻君)을 두게 했느니라.
이 하나는 무극(無極)에서 비롯된 선천운화(先天運化)이니
천불만조(千佛萬祖)와 무수한 진인(眞人)을 낳았느니라.
별(星斗)들과 산하(山河)와 초목(草木)과 만백성을 태어나게 한 것이 이 하나이니라.
이처럼 하나로 말미암아 생기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나의 현묘(玄妙)한 이치는 말로 다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하나로 깨달아 얻게 되면 만사가 해결되고 사생(死生)도 없느니라.”
스승의 자상한 가르침에 혜가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뭉클 솟아올랐다.
그는 하나(一)야말로 선천(先天)의 대도(大道)이며 무궁한 조화(造化)의 근원임을 알게 되었다.
절로 마음이 밝아오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혜가는 그럴수록 더욱 깊이 알고 싶은 욕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스승이 말한 일 ·삼·오(一·三·五)의 수(數)의 이치는 정미(精微)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고,
하도(河圖)로 귀결되는 하늘(天)의 생수(生數)임을 그는 알았다.
마찬가지로 땅(地)에도 생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이·사(二·四)의 수리(數理)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치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 답답함을 벗을 길이 없었다.
혜가는 스승 달마 조사에게 경건하게 예의를 갖춘 다음 두 무릎을 꿇고 앉아 간청했다.
“스승님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제자는 일·삼·오(一·三·五)의 수(數)와 이·사(二·四)의 수에 대한 가르침을 바라옵니다.”
달마는 대답했다.
“일·삼·오(一·三·五)의 수는 합하면 구(九)가 되지 않느냐.
역(易)에 이르기를 양(陽)은 구수(九數)를 쓴다.(用) 고 했느니라.
이·사(二·四)의 수는 합하면 육(六)이 되니 역에서는 음(陰)이 육수(六數)를 쓴다고 했느니라.
구(九)는 양에 속하니, 양은 가볍고 맑은 기(氣)를 갖는 것으로 위로 떠올라 하늘이 되었느니라.
육(六)은 음에 속하니, 음은 무겁고 탁한 기를 갖는 것으로 아래로 내려와 응고하여 땅이 되었느니라.
수도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탁함을 떨쳐 버리고 맑음이 머물게 해야 하느니라.
삼교(三敎)의 성인(聖人)은
예외 없이 일·삼·오(一·三·五)를 합친 구수(九數)로 된 도(道)를 닦았느니라.
이·사(二·四)를 합친 육수(六數)는 쓰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도 바로 수리(數理)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善)을 행하면 천당으로 올라가고 악(惡)을 행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이치는 자명한 것이니라.
수도하는 사람이 방문(旁門)을 피하고 정문(正門)으로 들어가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느니라.”
혜가는 두 손을 맞잡은 자세로 거듭 스승에게 물었다.
“이·사(二·四)의 수리를 어떻게 분별해야 할 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달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二)는 한 마디로 심원의마(心猿意馬)를 말하는 것이니라.
심원(心猿)은 원숭이같이 변덕스런 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의마(意馬)는 말처럼 날뛰는 뜻(意)을 말한다는 것쯤은 그대도 알 것이렷다.
사(四)는 눈, 귀, 코, 혀 곧 사상(四相)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二)와 사(四)가 합하여 육근(六根)이 되고
육근이 육적(六賊)으로 화하여 분출(分出)하느니라.
육도윤회(六道輪廻)도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느니라.
그래서 인도(人道)는 둘이고 축도(畜道)는 넷이라고 하느니라.
대저 사람의 진성(眞性)이 어머니 뱃속인 선천시절(先天時節)에 있을 때는
어머니와 일기(一氣) 곧 한 기운으로 상통하느니라.
그때는 심의(心意)가 한 데로 모이고 사상(四相)도 화합하느니라.
오로지 한 구멍(一窮)이 있어 삼보(三寶)로 통하고
오원(五元)이 혼합하여 일체(一體)를 이루니 능히 움직이되 말은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열 달이 차서 만삭이 되면 마치 오이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한 주먹 고깃덩이가 세상에 떨어지게 되는데
태중(胎中)을 벗어나서 탯줄을 끊으면
선천의 기운은 거두어지고 후천의 기운을 받게 되느니라.
아기가 왜 큰소리로 울며 세상에 나오는지 아는가?
그것은 이제 고해(苦海)에 떨어져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기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혜가가 스승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고해(苦海)란 사바 세상을 말하는지요? 아니면 다른 뜻이라도 있는지요?”
달마는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눈, 귀, 코, 혀를 일컬어 사대고해(四大苦海)라고 하느니라.
본성이 눈을 통해 소모되면 난생(卵生)으로 떨어지고,
본성이 귀로 소모되면 태생(胎生)으로 떨어지고,
본성이 코로 소실되면 화생(化生)으로 떨어지고,
본성이 입으로 소실되면 습생(濕生)으로 떨어지느니라.
여기에 심의(心意)가 한 번 동하면 육욕(六慾)이 생기니,
육진(六塵)을 일으키면 무겁고 탁한 기운이 덩어리가 되어 지옥이 되느니라.
사람이 짐승으로 전생(轉生)하고 짐승이 사람으로 전생하니,
낳아서 죽고, 죽은 뒤 태어나는 윤회가 그치지 않느니라.
본래 사람의 본성은 선(善)한 것으로 천성과 가까웠느니라.
그러나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졌으니 어찌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친 달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삼귀오계(三歸五戒)의 법어(法語)로 청정(淸淨)히 하고,
그대의 영명(靈明)한 현관일규를 지점(指點)하노라.
삼심사상(三心四相)을 모조리 쓸어내고 십악팔사(十惡八邪)를 깨끗이 제거하라.
삼보(三寶)를 연마하여 일품을 이루면, 육적(六賊)을 거둬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라.
호흡이 뚫려 한 구멍(一窮)으로 돌아가니, 현빈의 문(玄牝之門)으로 출입하게 되리라.
이로 말미암아 고뇌에서 벗어나니, 십전염군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도다.
이것이 바로 신불(神佛)의 도(道)이니,
행주좌와(行住坐臥)를 언제나 마음에 담아 둘지어다.”
혜가는 감격하여 온몸이 떨렸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승을 우러러 경의를 표했다.
“스승님의 과분하신 가르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스승님, 저의 백배(百拜)를 받으소서.”
혜가는 정성을 다하여 천천히 백 번의 절을 달마에게 올렸다.
백배는 사은(謝恩) 예절의 극치인 동시에 상징이었던 셈이다.
혜가는 다시 달마를 우러러보며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님의 자비를 간청하나이다.
삼관구규(三關九竅)가 무엇을 뜻하는지 상세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달마는 즉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굳게 담은 입에선 아무런 말씀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혜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다릴 따름이었다.
이윽고 달마가 눈을 뜨며 말문을 열었다.
“삼관구규란 세 개의 관문과 아홉 개의 구멍을 이르는 것이니,
그렇게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것을 알면 십전염군도 능히 피할 수 있고,
효(爻)를 뽑아내어 상(象)을 변환시킬 수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그대 같은 초입자는 기초도 닦지 않은 터에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지어다.
삼관구규의 도는 이름 하여 최상승(最上乘)이라고도 하느니라.
능히 범골(凡骨) 즉 보통 사람을 선진(仙眞) 곧 신선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으니,
진성(眞性)의 일점(一點)은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시방(十方)의 만령(萬靈)을 모두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느니라.”
혜가는 달마 조사의 엄숙한 말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침착하게 스승에게 물었다.
“성명(性命)이라는 두 글자의 근원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루 온종일 어느 곳에 안신(安身)하여야 하는지도 교시(敎示)하여 주시옵소서.”
달마는 은유법으로 대답했다.
“잠자는 곳은 산 속 바위틈이라지만, 삽시간에 바다에 날고 하늘에도 오른다.
앉는 곳은 항상 밝아 밤이 없지만, 가는 곳은 바다와 같이 넓고도 넓도다.
일월갑자(日月甲子)를 운행하니 불도(佛道)의 종지(宗旨)를 증명하도다.
아침은 동녘에서 뜨고 저녁은 서녘에 지니, 자오남북(子午南北)이 상통하도다.
황정(黃庭)을 돌아와 편히 쉬니, 그 묘한 작용의 황홀함이 무궁하도다.”
“眞經은 글자나 종이가 아닌 구전심수(口傳心授)될 뿐”
한번 진경을 얻으면 그른 것을 내치고 옳은 것 서로 합하니
스승 달마의 설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혜가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달마는 자비의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사람 몸으로 동녘 땅에서 태어나는 것은 난사(難事) 중의 난사이고,
더군다나 진도(眞道)의 명사(明師)를 만나는 것은
바닷가 모래 속에서 진주를 구하기보다도 어려우니라.
그대는 이미 이 땅에서 태어났고, 대도(大道)를 알게 됐으니
서둘러 수련에 전념하여 초승(超昇)을 이루도록 할지어다.”
혜가는 스승의 뜻에 따르기를 다짐하면서 거듭 예를 올렸다.
달마의 설법은 한층 장중하게 혜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대가 궁금하게 여기는 성명(性命)이란 두 글자는 음양(陰陽)을 말하는 것이니라.
하늘(天)에서는 해(日)와 달(月)이 되고,
땅(地)에서는 물(水)과 불(火)이 되고,
허공(虛空)에서는 바람(風)과 구름(雲)이 되고,
방(方)에서는 남(南)과 북(北)이 되고,
시간에서는 자(子)와 오(午)가 되고,
괘효(卦爻)에서는 감(坎)과 리(離)가 되고,
사람 몸에서는 성(性)과 명(命)이 되는 것이 바로 음양이니라.
하늘에 해와 달이 없으면 어찌 뭇 별자리가 존재할 수 있겠으며,
땅에 물과 불이 없으면 어찌 생령(生靈)을 기를 수 있겠는가.
허공에 바람과 구름이 없으면 어찌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겠는가.
방각(方角)에 남과 북이 없으면 어찌 사방(四方)을 알 수 있겠는가.
괘효에 감괘와 리괘가 없으면 어찌 수화(水火)가 승강(昇降)할 수 있겠는가.
시간에 자시와 오시가 없다면 어찌 낮과 밤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성과 명이 없다면 몸 둘레 전체에 주지(主持)할 것이 없게 된다.
음양을 떠나서는 만물이 결코 생겨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혜가는 내친 김에 미세한 것까지도 질문했다.
“스승님이시여, 사람 몸에서 무엇을 일러 높고(高) 밝음(明)이 하늘과 짝한다고 하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일러 넓고(博) 두터움(厚)이 땅과 짝한다고 하는지 하교(下敎)하여 주시옵소서.”
달마는 즉답했다.
“건(乾)은 하늘(天)이고 곤(坤)은 땅(地)이니
선천(先天)에 있을 때는 하늘이 위(上)에 위치하고 땅은 아래(下)에 위치하느니라.
그러나 사람이 어머니 뱃속을 나와 탯줄이 끊기면서 울음을 터뜨리게 되면
사상(四相) 곧 눈, 귀, 코, 혀가 열리면서 건곤(乾坤)이 전도(轉倒)되느니라.
이때 건괘(乾卦)는 중효(中爻)의 양(陽)을 잃어 리괘(離卦)가 되느니라.
리(離)는 헤어져서 떠남을 뜻하는 것이니라.
사람이 선천(先天)의 집과 고향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라.
곤괘(坤卦)는 건(乾) 가운데의 양(陽)을 얻어 감괘(坎卦)가 되느니라.
감(坎)이란 떨어져 빠짐(陷落)을 뜻하는 것이니라.
한 점(一點)의 진양(眞陽)이 후천(後天)의 단전(丹田)으로 떨어져 빠져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라.
넓고(博) 두터움(厚)은 무겁고(重) 탁(濁)한 기(氣)를 뜻하는 것이니라.
리화(離火) 속의 진음(眞陰)을 감(坎)으로 보내,
감괘의 진양과 바꾸어 진음을 굳히면 곤(坤) 곧 땅(地)이 되어 박후(博厚)의 극(極)에 이르느니라.
높고(高) 밝음(明)은 가볍고(輕) 맑은(淸) 기를 뜻하는 것이니라.
감수(坎水) 속의 진양(眞陽)을 리괘로 뽑아 올리고 리괘의 진음과 바꾸어 진양으로 모이게 하면
건(乾) 곧 하늘(天)이 되어 고명(高明)이 극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되면 하늘과 짝하고 땅과도 짝하게 되니
천지정위(天地定位)가 되어 본래의 선천(先天)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하늘은 성(性)의 주인(主人)이고 땅은 명(命)의 빈객(賓客)이니라.
사람은 청정(淸淨)하기만 하면 천지(天地)의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음양합일(陰陽合一) 곧 성명(性命)을 닦아 하나로 돌아가면 천지조화도 그것을 뺏을 수 없고,
천지도 또한 나를 감히 구속하지 못하리라.
하물며 어찌 십전염라(十殿閻羅)를 두려워할쏘냐.
사방(四方)으로 영산로(靈山路)를 열어 가면 소요자재(逍遙自在)를 얻어
옛 관음(古觀音)을 볼 수 있을 것이니라.
누구든 조화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참사람이니라.”
설명을 마친 달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게송을 읊었다.
“뱃속에 진경(眞經)을 지녔나니,
니환(泥丸)이 주(主)와 빈(賓)을 아는구나.
벽력소리 한 번 울려 관통하니,
손을 털고 속세를 벗어나는구나.”
혜가의 눈에선 감동의 눈물이 절로 흘러 내렸다.
“스승님이시여, 제자 비로소 생사(生死) 성명(性命)의 근원과 유래를 알았나이다.
제자는 수십 년에 걸쳐 설법을 해 왔지만 여태껏 그 근원을 깨닫지 못했었나이다.
그 동안 헛되이 세월을 보낸 일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으니 곧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제자는 종이 위에 적힌 경(經)이 한낱 가치 없는 것임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나이다.”
달마는 혜가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경(經)은 경(徑)이라는 글자와도 상통하느니라.
경(徑)이란 지름길을 뜻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경전은 사람들을 입도수행(入道修行)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미몽에서 깨어나 깨닫기를 바란다면 서둘러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물어야 하느니라.
득도한 뒤에는 경전을 시금석(試金石)으로 삼아
도의 진위(眞僞)와 이치의 시비(是非)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나아가서 정도(正道)와 방문(旁門) 곧 사도(邪道)를 판별하고
쓸 데 없이 사람들에게 염송(念誦)을 가르쳐서도 안 되느니라.
초생료사(超生了死)하게 되면 염군(閻君)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설해야 하느니라.
거듭 말하거니와 진경(眞經)은 글자나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전심수(口傳心授)될 뿐이니라.
그대 이제 진전(眞傳)을 받았거늘 육신(六神)이 조종(朝宗)할 곳을 알고 있는가?”
혜가가 곧바로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한 점(一點)을 지점(指點)해 주셨을 때 금세 알았습니다.”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가 신선되는 도리를 이미 얻었으니 점차 금선(金仙)의 길로 오를 수 있으리라.
내가 진경가(眞經歌)를 들려 줄 터이니 마음에 새겨 둘지어다.”
달마는 가락에 맞추어 진경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경가를 부르세, 진경가를 노래하세.
진경을 모르면 마침내 마(魔)에 잡히리라.
사람들아, 종이 위의 글자 뜻 찾지도 마소.
되지도 않은 소리 외우지도 마소.
송경과 염불하며 초탈(超脫)을 찾지 마소.
그리해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면,
세상의 중들 어찌 모두 성불하지 않았겠소.
진경을 얻어야 고해를 벗어나오.
진경을 모르면 나락으로 떨어질 뿐.
진경이 무엇인지 가닥이라도 찾아보소.
진경, 진경 하지만
그것이 선천조화임을 왜 모르오.
순(順)의 길로 가면 죽음이 있고,
역(逆)의 길로 가면 삶이 있소.
오고 가며 가르쳐도 이치를 깨닫는 사람 없구려.
진경은 본래 글자 한 자도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고 극락에 가게 하오.
진경을 알면 도(道)와 마(魔)를 알 수 있소.
그른 것을 내치고 옳은 것을 서로 합하니
하늘을 낳고 땅을 낳고 사람을 낳았구려.
음양조화의 이치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소.
진경을 설(說)하니
웃음이 넘쳐흐르고 현관에서는 황금빛이 나오네.
오천사백 권의 불경이
중앙 황도(黃道)로 돌아오니,
이것이 바로 한 권의 대장경일세.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기온이 오르네.
땅에는 조수(潮水)가 밀려들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네.
달마 친히 입으로 전하니
대승(大乘)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로다.
초사흘에 서쪽에서 달이 뜨니
곡강(曲江) 위에 달빛이 고고하네.
꽃 한 송이 피어올라
구슬 같은 이슬을 머금으니
호혈용담(虎穴龍潭)에서 탁함과 맑음을 찾네.
물(水)이 하나(一)에서 생(生)기니
참된 달(月)의 정기로세.
삼(三)을 기다린다면
가히 나아가지 못하리라.
임수(壬水)가 처음에 오고
계수(癸水)가 다음에 오네.
마땅히 급히 채취(採取)하여
부침(浮沈)에서 벗어나리다.
금솥(金鼎)으로 연단하고
옥로(玉爐)로 삶아내니
따뜻한 문화(文火)와 거센 불길의
무화(武火)로 조절하네.
진경를 쏘아 현관을 뚫으니
화살이 붉은 표적을 맞힌 것 같네.
온몸이 뜨거워지고 찜통같이 되니,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중정(中庭)에 들어가네.
한 번 진경을 얻으면
술을 마신 듯 호흡이 온몸을 돌아
뿌리로 돌아가네.
정(精)은 기(氣)에 들고
기는 신(神)이 다시 돌아오네.
이런 조화의 참 이치를 밝게 아는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꼬.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으니,
예로부터 신선은 진경에 의지했네.
이런 조화를 잘만 알면 염부세상(閻浮世上)의
모든 사람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
대도(大道)는 태극(太極)으로 단초를 이루니
부모가 나를 낳기 전부터 있었네.
사람은 제도하려면 오직 진경으로만 할 수 있으니,
진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수은이 곧 연(鉛)이라고 대답하리.
진경가를 부르세, 진경가를 노래하세.”
혜가는 스승의 노랫말에서 진법의 진수를 맛보았다.
스승에게 배례(拜禮)하면서 은혜에 깊이 감사드렸다.
혜가는 이미 깨달음의 어떤 경지에 이른 것을 스스로 느꼈다.
하지만 아직도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승에게 물었다.
“제자, 스승님의 교시(敎示)로 주천(周天)의 조화를 분명하게 알았나이다.
하지만 소장(消長)하는 이치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나이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달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니,
무인(無人) 무아(無我) 무중생(無衆生)이어야 하느니라.
삼심사상(三心四相)을 깨끗이 하고
십악팔사(十惡八邪)를 청정하게 제거해야 하느니라.
은애정욕(恩愛情慾)에 물들지 말며,
탐진치애(貪嗔癡愛)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자오묘유(子午卯酉)에 맞추어 부지런히 좌선하고
하루라도 방심하고 산만하게 수행하지 말지어다.
염라를 피하려면 언제나 미타(彌陀)와 옛 관음(古觀音)과 함께 해야 하느니라.
자기의 현관이 열리고 하늘 북소리가 들리면
황홀감이 온몸을 감싸면서 삼계(三界)를 벗어나게 되리라.
이때 육문(六門)을 굳게 닫지 않으면 육적(六賊)이 문밖에서 소란을 피워
자칫 주인공이 혼미하기 쉬우니 막아야 하느니라.
내 몸 속의 보배를 도둑맞으면 일신(一身) 사체(四體)가 편안키 어려우니라.
이것이 바로 소장(消長)의 이치이니 마음 닦기를 우선으로 삼을지어다.”
아는 데 집착하면 반드시 마가 침입하
니…”
貪瞋癡愛는 안에서 마군을 돕고
酒色財氣는 밖에서 마군을 돕는다.
혜가는 계속해서 스승에게 질문했다.
“육적(六賊)이 주인공을 혼미케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육적이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아니더냐.
본래 이 육적의 주인공은 마음이니라.
마음은 크고 작은 마군(魔軍)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거느리고 있느니라.
마음은 원숭이같이 변덕스럽고 뜻(意)은 말(馬)처럼 날뛴다는 말도 이래서 생겨났느니라.
마음은 경계(境界)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하늘에까지 치솟기도 하느니라.
이럴 때는 천병천장(天兵天將)이라고 할지라도 제압하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그런 마음, 곧 마군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는 없느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정과(正果)를 이루고 귀일(歸一)해야 하느니라.
이때 관음주(觀音呪)를 외워도 효험이 있느니라.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현묘한 방책일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잡아매어 다스리는 것이 요체이니라.
육적 가운데서 의마(意馬)를 특히 잘 다스려야 하느니라.
본성에 귀의하여 서천(西天)으로 가려면 이 의마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니라.
이 의마가 곧 용마(龍馬)이니라.
만약 본성을 닦아 바르게 귀일하지 못하면 의마,
곧 용마가 날뛰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죽이게 되느니라.
이 말(意馬=心)은 하늘 끝까지 달리면서 날뛰어도 제지할 수가 없느니라.
이것이 다름 아닌 마군이니라.
마군 가운데서도 눈·귀·코·혀는 장군 구실을 하느니라.
이들은 무슨 소식이 있게 되면 사문(四門)으로 달려 나가 소란을 피우느니라.
이때 탐진치애(貪瞋癡愛)는 안에서 마군을 돕고
주색재기(酒色財氣)는 밖에서 마군을 돕느니라.
안과 밖이 상응하여 주인공의 자리를 뺏으니
칼과 창과 화살이 어지러이 꽂히는 형국이니라.
만약 주인공의 자리를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다면
진인(眞人)에게 엎드려 간청하여 용정(龍庭)에 좌정해야 할 것이니라.
그리하면 관음과 부처가 법술(法術)을 베풀고
삼교(三敎)의 성인(聖人)이 하늘의 무상인(無相印)을 빌어 사요(四妖)를 내쫓고,
진경(眞經)으로 육적을 항복시켜 주인공을 지켜 주느니라.
이렇게 되면 천요만괴(千妖萬怪)가 일제히 명령에 복종하고
지지정정(知止定靜)으로 천하(天下)가 평온해질 것이니라.
팔대금강(八大金剛)이 관문(關門)을 잠그고,
사천왕(四天王)이 사문(四門)을 지키며
모든 진인(眞人)이 항상 보살펴 지켜 줄 것이니
주인공은 연심(蓮心) 자리에 앉게 되느니라.
이때 주인공은 단지 하늘 북 소리 울리기만 기다렸다가 행차하면 되느니라.”
달마의 소상한 설명에 혜가는 마음이 한층 밝아 옴을 느꼈다. 또 다시 엎드려 배례(拜禮)했다.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아서 여쭙는 것이니 헤아려 주시옵소서.
무엇을 일컬어 기사동정(起死動靜)이라고, 하고
왜 그것을 생사(生死)의 근원이라고 하는지요?”
달마는 즉답 대신 게송을 읊기 시작했다.
“기(起)란 일어나는 것이니
일어나는 곳에선 강물이 뒤집히고 바다가 요란하도다.
낙(落)이란 떨어지는 것이니
떨어지는 곳에서는 허공(虛空)에서 산산이 부서지도다.
동(動)이란 움직이는 것이니
움직이는 곳에서는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 같도다.
정(靜)이란 고요이니
고요한 곳에서 홍몽(洪몽)이 열려 세상이 생기도다.
무상성곽(無相城廓)을 조견(照見)하니
불로(不老)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도다.
무생지상(無生地上)에 안면(安眠)하니
반달(半月)의 노중(爐中)에 자재(自在)하도다.
세상에 내려온 지 몇 해인지 모르니
내력(來歷)과 시종(始終)도 모르도다.
젖먹이 때 이름이 금강불괴(金剛不塊)라고 했으니
나가고 들어올 때 자취조차 볼 수 없도다.
그때의 미타 부처가 여기 있는데
어찌 문 밖으로 나가 만나고자 하는고.”
달마의 게송은 혜가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혜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스승에게 고개 숙여 간곡하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는지 교시하여 주시옵소서.”
달마는 다시 게송을 읊었다.
“하늘(天)에 통하고 땅(地)을 꿰뚫으니
금목(金木)이 교합(交合)하도다.
영아(靈兒)와 타녀(垜女)가 서로 도우니
한 마리 황룡(黃龍)에 올라타도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으니
드디어 극락궁중(極樂宮中)에 이르도다.
무극(無極)께 참배하니
보경천궁(普慶天宮)에서 즐거이 지내도다.”
게송이 끝나자 촌각(寸刻)의 여유도 없이 혜가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는 무극은 자연 그 자체의 그 자리가 아니온지요?
그리고 자연의 그 자리에 이르면 자기가 그것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달마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간략하게 대답했다.
“자연의 그 자리에 이르면 황홀한 가운데 그 무엇이 있으며,
아물아물한 가운데 정(精)이 있느니라.
음양합병을 알 수는 있으나 알지 못한 자처럼 되어야 하느니라.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아는 데 집착하면 반드시 마가 침입하게 되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깨닫기 쉬우나 미매한 자는 행하기 어려우니라.”
달마의 대답은 수행의 진경에 따라 지켜야 할 심오한 계율을 교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혜가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잠잠히 앉아 있었다.
한데 갑자기 머리에서 묘한 의문이 떠올랐다.
스승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혹시 쓸데없는 질문을 하여 핀잔을 들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마의 얼굴은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무엇이든 물으면 모두 받아들일 것 같았다. 혜가는 용기를 내서 기묘한 질문을 했다.
“스승님,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계란건곤(鷄卵乾坤)의 이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달마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그런 질문이더냐?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수수께끼로 삼고 있는 그런 질문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하니라.”
달마는 혜가에게 앞으로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면서 대답을 이었다.
“혼돈(混沌)의 시기에는 닭도 달걀도 없었느니라.
청탁(淸濁)의 이기(二氣)가 혼돈 속에서 한 덩어리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무극의 본체이니라.
자시(子時)가 되면 일양(一陽)의 성(性)이 동(動)하여 청기(淸氣)
의 느낌이 있게 되니,
달걀의 흰자위가 그것이니라.
축시(丑時)가 되면 이음((二陰)의 명(命)이 동하여 탁기(濁氣)의
영(靈)이 통하니
달걀의 노른자위가 그것이니라.
음과 양이 교감(交感)하면
이기(二氣)의 영이 통하여 무극에서 태극(太極)이 생겨나느니라.
하루아침에 홍몽이 열리면
혼돈이 생겨나니 이것이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생기는 것이니라.
이때 달걀에서 닭이 생겨나느니라.
그러므로 달걀이 먼저고 그 뒤에 닭이 있는 것이니라.
이 이치를 분명히 안다면 천기(天機)를 아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이니라.”
혜가는 마치 어리광하듯이 물었다.
“염불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본성(本性)이니라.”
“본성을 제외하면 누가 하는 것입니까?”
“영광(靈光)의 발현(發現)이니라.”
“그것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대에게 있느니라.”
“24시간 하루 온종일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쌍림수(雙林樹)에 있느니라.”
“만약 태허공을 찔러 깨어 버리면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다시 구할 수 있습니까?”
“허공을 깨어 버리면 건곤삼계(乾坤三界)를 뛰어나가느니라.”
“삼계란 무엇입니까?”
“동토(東土)의 사바세계, 서천(西天)의 극락세계, 선천(先天)의 무극세계이니라.
이 가운데 선천의 무극세계만이 오직 모든 남녀의 본래 고향이니라.
동토의 중생은 너무나 미매하여 사바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느니라.
서방 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면 자성(自性)을 밝혀야 하니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우리라.”
“서방은 어디에 있습니까?”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 밖에 있으니, 그 곳엔 분명 극락궁이 있느니라.
그러나 깨닫고 보면 서방은 바로 눈앞에 있느니라.
오직 미매한 인간만이 그 길을 찾지 못하느니라.”
“항시(恒時) 어디에 귀의하여야 하는지요?
경(經)을 독송한다면 어느 경이 좋습니까?”
“무봉탑(無縫塔)에 귀의하여 무자경(無字經)을 묵념(默念)하도록 할지어다.
입을 열면 신기(神氣)가 흩어질 것이고,
조용히 입 속으로 염송하면 법륜(法輪)이 돌아가리라.”
“무봉탑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무봉탑이란 자기의 진보(珍寶)이니 자기 안에 있느니라.
그것은 몸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니라.
몸 안에 사리자(舍利子)가 있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빛을 발하느니라.
털 없는 사자는 하늘로 날고,
청개구리는 털옷을 벗고 나무 위에 앉아 있으니,
죽은 자는 산 자를 의탁하여 달리고,
모기가 저울추를 매달고 돌아온다는 ‘예화(例話)’ 등은 그것을 이르는 것이니라.”
“삼심삼회(三心三會)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눈(眼)은 과거심(過去心)이니 연등불(燃燈佛)의 연지회(蓮池會)이니라.
귀(耳)는 현재심이니 석가불의 영산회(靈山會)이니라.
코(鼻)는 미래심이니 미륵불의 안양회(安養會)이니라.”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과거불이 관리하는 천하홍분(天下紅粉) 세계와
현재불이 관리하는 천하 사바세계와
미래불이 관리하는 천하청담(天下淸淡) 세계를 이르는 것이니라.”
대답을 마친 달마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짧은 게송을 한 수 읊었다.
“무쇠 아이는 나이가 몇이던고.
무정무진(無情無盡)인데 언제 쉬는고.
한 번 소리 지르니 천지도 놀라고,
건곤사부주(乾坤四部洲)도 진동(震動)하네.”
혜가는 스승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사자경(四字經)이니 육자경(六字經)이니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 질문은 그 옛날 문수보살이 석가세존에게도 했었느니라.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사자경이든 육자경이든 간에 그것은
법문(法門)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느니라.
초회(初會)에는 네 글자로 공경(公卿)들을 유인했고,
이회(二會)에는 여섯 글자로 현인(賢人)을 이끌었으며
삼회(三會)에는 십자(十字) 곧 열 글자로 뭇 중생을 제도하는 것
이니라.”
“眞訣 전하여 받았으니 超生了死 할지어다.
“진경은 無字經이니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느니라.”
달마는 사자경(四字經)과 육자경(六字經)을 설명한 데 이어
이른바 삼장 십이부(三臧十二部)도 풀이해 주었다.
“진경(眞經)은 종이에 쓰여진 경과 동일하지 않느니라.
따라서 종이 위에서 진경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니라.
하지만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라고 할지라도
그 뜻을 꿰뚫어 아는 사람은 진경의 참뜻을 알게 되느니라.
진경은 무자경(無字經)이니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느니라.
본래부터 무일자(無一字)이지만
깨달아 닦으면 주야사시(晝夜四時)로 밝은 빛을 뿜어내느니라.
사람의 몸은 비록 작으나 소우주(小宇宙)이니
삼장 십이부가 모두 그 안에 있느니라.”
혜가는 머리 숙여 스승에게 물었다.
“삼장 십이부를 보다 자세히 풀이해 주시옵소서.”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게송을 읊었다.
“금강경은 머리(頭)이니 그것이 신(信)인줄 누가 아는가.
반야경은 다리(脚)이니 누구에게 물어서(問) 알 수 있을까.
관음경은 눈(眼)이니 방촌(方寸)에서 떠나지 않도다.
뇌음경(雷音經)은 귀(耳)이니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로다.
미타경(彌陀經)은 코(鼻)이니 현(玄)에서 나와 빈(牝)으로 들도다.
법화경은 혀(舌)이니 호흡의 맑음을 혀끝으로 길들이는구나.
다심경(多心經)은 마음(心)이니 침묵이 위본(爲本)이로다.
청정경(淸淨經)은 뜻(意)을 지키는 것이니 전강(前降) 후승(後昇)이로다.
청룡경(靑龍經)은 왼쪽 간(肝)이니 목모(木母)가 수정(守定)하도다.
백호경(白虎經)은 오른쪽 폐부(肺腑)이니 금공(金公)이 보살피도다.
북극경(北極經)은 물(水)을 다스리니 신장(腎臟)에 담아 두도다.
황정경(黃庭經)은 비장(脾臟)의 중궁(中宮)이니 법륜(法輪)을 돌게 하도다.
삼장법사(三臧法師)는 서천(西天)으로 가기 위해 천신만고했도다.
구구(九九)의 재(災)와 팔십일(八十一)의 난(難)을 겪으며 사중득생(死中得生)했도다.
삼장은 곧 성(性)이고
손오공은 심(心), 사오정은 명(命), 저팔계는 정(精), 백마(白馬)는 의(意)이니
오행(五行)에 배합(配合)하도다.
삼장법사 일행이 서행(西行)하기 14년.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를 가서야 비로소 뇌음(雷音)을 듣도다.
처음엔 무자(無字)의 경(經)이었지만 뒤에 글자로 옮겨 고쳤도다.
십이부의 진묘품(珍妙品)이 모두 사람 몸에 있거늘,
티끌세상의 사람들은 너무나 미매하여 깨닫지 못하는구나.
분명 진경(眞經)이 초생료사(超生了死)의 도(道)이거늘 찾아 닦으려 하지 않는구나.
중과 도인들은 갖가지 경전에 매달려 목탁 치며 염불만 하는구나.
치심(癡心)으로 귀혼(鬼魂)을 제도한다고 착각하고 성심과 경건함이 없구나.
오훈채(五焄菜)와 삼염(三厭)을 마구 먹고 냄새나는 입으로 독경하며 염불하는구나.
가짜를 찾아 예배하고 부주(符呪)를 사르니 이토록 불문(佛門)을 깔볼 수 있을쏘냐.
부처님은 우선 이들의 망령(亡靈)에 죄삼등(罪三等)을 부가하리라.
가짜 중과 도인들의 과오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삼도(三途)
즉 화도(火途)=지옥도(地獄道), 혈도(血途)=축생도(畜生道), 도도(刀途)=아귀도(餓鬼道)의
고통을 치르게 하리라.
양무제(梁武帝)가 불교를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대도(大道)는 밝히지 못했도다.
그는 단지 불문을 일으켜 이익만 취하려 획책했을 뿐이로다.
어찌 불법(佛法)을 문란케 하여 후생(後生)을 그르칠 줄 알았으랴.
그대에게 부촉하노니,
진(眞)과 가(假)의 길을 잘 살필지어다.
무자경(無字經)으로 자기를 초탈하고
나아가 불문의 종친(宗親)들을 제도할지어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전법된 지 28대에 이르렀도다.
동쪽 땅에서 본래의 그 사람을 찾아 도의 뿌리를 잇게 하도다.
그대에게 지점(指点)한 것은 황태아(皇胎兒)를 갖게 함이니
방문(旁門)을 버리고 정도(正道)를 따르도록 할지어다.
진결(眞訣)을 전하여 받았으니 초생료사(超生了死)할지어다.”
혜가에게 구전심결(口傳心訣)로 진경을 전한 달마는
소림사에서 전의수법(傳衣授法)의 의식을 거행했다.
달마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법명이 혜가임을 공표하노라.
아울러 그대가 노납의 선종법사(禪宗法嗣)임을 선포하노라!”
달마는 승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축에서 갖고 온
낡은 붉은색 가사와 음식 담는 그릇을 혜가에게 물려주었다.
선종에서 의발(衣鉢)을 전법의 증표로 삼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하지만 이 전통도 2대 혜가에서 6대 혜능까지만 이어졌을 뿐이다.
이것은 진법이 단전(單傳)되는 전통이
혜능 이후로는 복수(複數)로 분파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사를 입을 때 오른쪽 팔을 바깥으로 내어 놓는 전통은
3대 승찬 이후의 승려들이 오늘날까지도 지켜 오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2조 혜가가 달마 조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을 때
눈밭에서 왼쪽 팔을 계도(戒刀)로 베어 바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그 하나요,
두 번째는 좌방(左旁) 곧 사도(邪道)를 버리고
우방(右旁) 곧 정도(正道)로 매진하겠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달마가 혜가에게 의발을 전할 때의
또 다른 예화(例話)로 이른바 안심(安心)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마음에 만법(萬法)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저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달마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내 앞으로 갖고 오너라. 너를 위해 안심(安心)을 주리라.”
혜가는 스승의 말에 따라 자심(自心) 즉 자기의 마음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찾으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사옵니다.”
혜가는 솔직하게 마음이 불가득(不可得)임을 고백했다.
이에 달마가 즉답했다.
“내가 이미 너를 위해 마음을 편안케 해 주었느니라.”
달마의 해답은 불가득이 곧 안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혜가가 스승 달마에게 구한 마음은 소아(小我)의 자아심(自我心)이었다.
이에 반해 달마가 혜가에게 찾아 준 마음은 대아(大我)의 자연심(自然心)이었다.
자아심과 자연심은 같은 것일까 혹은 별개의 것일까?
이것을 분별하여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안심을 찾는 지름길임을 달마는 깨우쳐 준 셈이다.
청산(靑山)은 본래 부동(不動)이다.
흰 구름만이 절로 오고갈 뿐이다.
여기에서 불역(不易)과 변화를 깨닫는 것이 바로 안심으로 귀결된다.
소림사에서 전법의식을 끝마친 달마는
공식적으로 법제자가 된 혜가를 대동하고 치우 동굴 곧 달마동굴로 올라갔다.
혜가는 스승을 따라 면벽 좌선에 열중했다.
때때로 시간을 내 스승과 함께 선법을 논했다.
역근법(易筋法) 세수법(洗髓法) 등 두 가지 공법으로 이뤄진 선체조도 전수받았다.
하지만 혜가는 선체조나 선무공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문이 일었다.
“스승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청정과 자비와 마음을 위주로 하는 불문에서 주먹과 팔다리를 놀리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온지요?”
달마는 웃으며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 끝에 얻으신 것은
육체의 고통을 떠나서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느니라.
심신일여(心身一如)이니
마음과 육체를 따로 구분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느니라.
육체를 무시한 좌선만으로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얻어질 수 없는 법이니라.
심신일체의 자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난행(難行)이나 고행(苦行)만이 참된 수행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음을 도외시한 채 몸을 닦는 것 또한 수행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심신을 함께 닦는 것은 수행의 상보상성(相補相性)을 도모하는 것임을 명심할지어다.”
혜가에게 모든 것을 전한 달마는 소림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혜가는 스승의 훈도를 계속 받고 싶은 심정으로 만류했다.
하지만 달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치 바람처럼 치우 동굴을 떠났다.
떠나는 달마의 뒷모습에선 후광이 빛났다.
혜가는 스승의 뒷모습을 향해 배례(拜禮)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혜가는 부복한 몸을 좀처럼 일으킬 수 없었다.
다시는 스승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지며 눈물이 흘려 내렸다.
혜가는 새삼스럽게 책임의 중차대함을 인식했다.
스승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담아 시 한 수를 읊었다.
“선천무위(先天無爲)의 대도(大道)는
성불(成佛)하는 묘용(妙用)의 기관이로다.
초생료사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느니,
얻은 것을 어찌 가벼이 여길 것인가.
나는 생사와 성명(性命)을 위해 왼팔을 베어 내어 전법(傳法)을 얻었도다.
어려움을 이겨 내고 절차탁마하여 하나(一)의 전법을 얻어 밝혔도다.
스승께서 층층이 가르쳐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할 따름이로다.
풀어 놓으면 하늘과 바다처럼 넓고,
거둬들이면 겨자씨처럼 한끝으로 수습되니
하나(一)로 만(萬)을 꿰뚫는 참 이치가 이것이로다.
후배 불자동려들에게 부탁하노니
만금(萬金)을 준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가볍게 전하지 말지어다.
고해의 중생들이 정성과 경건함이 있으면
미망을 떼어내고 참(眞)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할지어다.
육도의 윤회를 살펴보니
백골(白骨)이 산처럼 쌓여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구나.
천기(天機)를 샅샅이 밝혀 누설하고 싶지만
상천(上天)의 감찰을 피할 수 없어 두렵도다.
다만 반은 밝히고 반은 감추어 후세에 대강 전하도다.
스승에게 현관의 지점(指点)을 구하면
영원토록 극락궁원(極樂宮院)을 증득(證得)하리라.”
혜가는 스승에게서 얻은 정법(正法)과 도맥(道脈)의 계승을
못내 감사하며 찬양의 시를 지어서 소리 높여 읊었다.
“불법은 분명히 설명으로 다하지 못하니,
한 권의 심경(心經)은 글자마다 진(眞)이로다.
종이 위에 쓰여진 유자경(有字經)은 원래 무자(無字)경에서 나왔으니
남가몽(南柯夢)을 꿈꾸는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날지어다.
큰 바다 파도 속에 등잔불 하나,
심지를 돋우는 사람 없어 뚜렷이 밝히지 못하도다.
만약 명사(名師)를 만나 친히 지점 받는다면
안팎으로 사람을 비춰보게 할 수 있으리라.
큰 바다 파도 속에 돛대를 세울지어다.
부처님께서 피안(彼岸)에서 기다리신 지 오래로다.
삼환구전(三還九轉)하여 그대들을 제도하려 오셨으니 인연 있으면
만나서 태미(太微) 곧 극락 이천(理天)을 증득하리라
“자기가 불통이면 남도 불통으로 보이는 것”
“바다에 풍파가 이니
사공이 배 띄우지 않네.
자연 그대로 맡길 뿐”
소림사를 떠난 달마 조사는 우문(愚門)의 천성사(千聖寺)를 찾았다.
천성사는 대자산(大慈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미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듯싶었다.
돌이 깔린 오솔길엔 이끼가 퍼렇게 덮여 있었다. 달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성한 숲과 절 주변을 둘러싼 대나무 밭이 특히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뇌리에선 범음(梵音)과 절의 모습들이 중첩되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순간 달마는 이 곳이 천성사인 줄 알았고, 모든 것을 마무리할 터전임을 느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성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때가 되지 않아서 찾지 않았을 뿐이었다.
“천성, 천성. 노납이 찾아왔소이다.”
달마는 혼잣말을 되뇌며 천성사 정전에 눈길을 꽂았다.
웅장하면서도 맑은 종소리가 산허리를 타고 절에서 들려오는 듯싶었다.
달마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오직 산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릴 뿐이었다.
천성사의 산문에 들어선 달마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폐허로 변해 버린 절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벗어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천성사의 옛 모습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달마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루었다.
그의 망막엔 휘황찬란하던 옛 천성사의 환영이 떠올랐다.
하지만 눈을 뜬 그의 앞에 나타난 실체는 퇴락한 모습일 뿐이었다.
산문을 뒤로 하고 잡초가 우거진 뜰을 가로질러 본당으로 갔다.
오랜 풍상을 겪기는 했지만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현판만은 뚜렷했다.
본당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전 앞 향로에서는 세 줄기의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안에 가득 찬 향내로 미뤄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달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본당 옆 요사채 쪽을 바라보니 도인풍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게 누구요?
보아 하니 화상(和尙)이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진승(眞僧)같기도 하오만….
진승인지 가승(假僧)인지 한 번 보십시다.”
압도하려는 듯 말을 걸어왔지만 달마는 웃으면서 목례(目禮)로 대신했다.
“허허…, 그렇소이까.
그대가 진(眞)이면 전체가 진(眞)이요, 그대가 가(假)이면 전부가 가(假)가 아니겠소이까.”
달마의 응수에 도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도인의 기세는 쉽게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화상은 어디에서 오셨소?”
“진공사(眞空寺)에서 왔소이다.”
“진공사라구요?
그런 절 이름은 내 생전 듣지도 못했소이다.
솔직하게 말하시오. 화상은 어디서 왔소?”
도인은 언성을 높였다.
달마는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나 하려는 듯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오는 곳에서 와서 가는 곳으로 갈 뿐이외다.”
도인은 또 다시 다그쳤다.
“여보시오. 태어나서 머물고 있던 곳이 있을 게 아니오?”
“나의 고향을 물으시는 겁니까?
은혜를 많이 받은 곳이 곧 내 고향이올시다.”
“여보, 그렇게도 내 말귀를 못 알아듣겠소?
화상이 이 곳에 오기 전에 머물던 곳이 어딘지 묻는 것이오.”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중이 어찌 정한 곳이 있겠습니까.
구름 타고 온 세상을 노니는 날더러 돌아가는 곳까지 묻는다면
쌍림수(雙林樹) 아래 적멸(寂滅)을 닦는 곳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소이다.”
“그래요? 화상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또 무엇이오?”
달마는 대답 대신 도인에게 되물었다.
“지금 내 앞에 계신 도인께서는 고명(高名)하신 분 같은데 존함부터 들려주시기 바라오.”
도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나는 도가(道家)의 종지(宗旨)를 받드는 종횡(宗橫)이라는 사람이오. 그대는 누구요?”
“빈승의 성은 성(性)이라고 하고 이름은 왕(王), 자(字)는 공명(空明)이라 하오.”
달마의 대답에 종횡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일찍이 온갖 성씨를 다 보아 왔지만 ‘성’이라는 성씨는 보고 듣지도 못했소.”
달마가 응수했다.
“도인께서는 온갖 성씨를 다 알면서 자기 성(性)은 모르시는구려.
천지개벽할 때는 오직 일점(一點)의 진성(眞性)만이 있을 뿐이었소.
사람은 누구나 이 한 점 진성을 지니고 있소이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물체에도 진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처럼 오행(五行) 속에 들게 되면
모양이 달라지고 언어도 달라지고 성명 곧 이름도 달라지는 것이외다.
이름만 찾는 것은 진(眞)을 인정하지 않고 가(假)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외다.”
종횡은 달마의 대답에 어떤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솔직하게 물었다.
“화상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소. 진실을 밝혀 주시기 바라오.”
“도인께서 그렇게 물으시니 솔직하게 대답하리다.
내가 온 길과 가는 길은 한 마디로 말후일착(末後一着)이외다.”
종횡은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산에 오르려면 꼭대기까지 가야하고
바다에 뛰어들면 밑바닥까지 보아야 하지 않겠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도달하는 마지막 낙착점, 그 한 곳이오.”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이 땅에 온 까닭을 이야기하리다.
실은 빈승은 남천축의 사람이외다.
도(道)의 근원지인 동녘 땅을 찾아 수행하고자 온 것이외다.”
“남천축이라니 그 곳은 머나 먼 이역 땅이 아니오.
여기서 얼마나 되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10만 8천리이외다.”
“얼마나 걸려 이 땅에 왔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소이다.”
“이 땅에 단기간에 왔다니 믿어지지 않소이다.”
“빈승은 오히려 늦은 편입니다.
나의 고향에 달마 조사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은 일시진(一時辰) 아니 반각(半刻)이면 10만 8천 리를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소이다.”
종횡은 도(道)의 세계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지닌 화상이 구태여 이 땅을 찾아 수행하고자 했다는
말에는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았다.
“화상께 묻겠소. 이 땅에 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오?”
“하나(一)의 진법의 발원지인 동녘 땅에 도가 끊겼다고 하기에
전도교화(傳道敎化)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외다.
한데 안타깝게도 나 같은 밝은 눈의 고사(高師)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소이다. 그려.”
종횡은 하나의 진법이란 말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도가(道家)에서는 일찍부터 하나(一)가 곧 진도(眞道)이며
그것은 천부경과 직결된 것이라고 일컬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상이 말하는 하나(一)의 진법은 무엇이고
어떤 수행법으로 전도하려고 하는 것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달마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나는 산과 바다를 구름 따라 노닐 뿐 무슨 수행법이 있는 것은 아니외다.”
“무엇이라고? 수행법도 없이 무엇으로 전법(傳法)한다는 말이오?”
달마는 짧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한가하면 청정(淸淨)을 지키고, 피곤할 때는 누워서 자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네.
부처가 되고 싶으면 부처가 되고, 신선이 되고 싶으면 신선이 되네.
바다에 풍파가 이니 사공이 배를 띄우지 않네.
만사 자연 그대로에 맡길 뿐이네.
이 땅에 온 지 1년 반의 광음이 지났네.
아무도 나를 스승으로 여기지 않네.”
달마의 게송은 그야말로 대도(大道)의 현기오묘(玄機奧妙)를 축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횡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달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보시오. 화상처럼 수행법도 없이
일규불통(一竅不通)인 사람을 누가 스승으로 삼는단 말이오?”
달마는 주저하지 않고 반박했다.
“일규불통을 단정해서 말하는 것을 보니 한 구멍을 통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도인이구려.
자기가 불통이면 남도 불통으로 보이는 법이 아니겠소.
진정으로 한 구멍을 깨달아 통하게 되면 초생료사(初生了死)도 어렵지 않을뿐더러,
부처님을 증득하거나 진인(眞人)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이 말에 종횡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는지 버럭 화를 냈다.
“당신 같은 화상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달마는 떠날 생각이 추후도 없었다. 오히려 도가의 법사를 불문에 귀의시킬 심산이었다.
“내가 이 곳에 올 때는 오직 한 줄기 정로(正路)만 있더니
떠나고자 하는 지금 갈 길을 보니 천만 갈래인 것 같소.
부디 나에게 나갈 길을 지도해 주시기 바라오.
그 가르침은 나의 천년 수행보다 윗길이 되리라고 믿소.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교시해 주소서.”
그제야 종횡은 마음이 풀리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화상과 종교가 같다면 지도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도교를 믿기 때문에 불교도인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소이다.”
“선천(先天)에서는 불교, 유교, 도교의 구별이 없이 본래 일가(一家)가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제각기 세 개의 종교를 만든 것일 뿐인데 근본이치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달마가 간곡하게 말하자 종횡은 갑자기 교만심이 가득해졌다.
“하긴 그렇소이다.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구해 줄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요.
나에게 우선 스승의 예를 올리도록 하시오.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나이 많은 달마 조사에게 종횡은 고개를 쳐든 채 눈을 아래로 깔며 고자세를 취했다.
달마는 얼굴빛 하나 변함이 없이 차분히 대응했다.
기왕 종횡을 불문에 귀의시키기로 마음먹었거늘 그의 무례한 요구를 뿌리침으로써
일을 그르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달마는 종횡이 시키는 대로 사제(師弟)의 예를 갖췄다.
이미 150세가 넘은 달마가 나이 어린 종횡을 스승으로 삼고 마주 앉은 모습은 보기에도 딱했다.
하지만 달마는 종횡이 요구하는 대로 구배(九拜)의 큰절까지 올렸다.
격식이 갖추어졌으므로 가르침을 청하는 게 순서였다.
“스승님께 우선 불법(佛法)의 도리(道理)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분명히 밝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종횡은 득의만면(得意滿面)해서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제자로 삼기로 한 것은
그대의 얼굴을 중의 얼굴로 보지 않고 부처의 얼굴로 보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밝혀 그대에게 전해 줄 것이오.
나는 일찍이 도문(道門)에 입문하여 도조(道祖)의 도법을 배우고 익혀 왔소.
삼청오행(三淸五行)을 마음과 몸으로 닦아 왔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처지이니 삼귀오계(三歸五戒)부터 배워야 할 것이오.
내가 전하는 것은 진전(眞傳)이니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어찌 스승님의 진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삼귀오계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고 따르겠나이다.”
“좋소. 그러면 우선 삼귀를 받고 다음에 오계를 전수받도록 하시오.
불(佛)에 귀의하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법(法)에 귀의하면 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승(僧)에 귀의하면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법륜(法輪)은 상전(常轉)하는 것이오.
이제 그대는 공삼천(功三千) 과팔백(果八百)이 가득 찬 법을 전수받았소.
그리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시오.”
하지만 종횡의 자신만만한 언동(言動)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달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자는 이 자리에서 그냥 일어설 수는 없습니다.”
“일어설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종횡은 불쾌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제자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디 자세히 밝혀 가르쳐 주시기 바라나이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분명히 가르침을 주었거늘,
무엇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오?”
“제자는 남천축 고향에 있을 때도 삼보(三寶)에 귀의했었습니다.
한데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과 제자가 배웠던 것은
비록 글자는 같지만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당혹스럽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가 고향에서 배운 삼보귀의가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종횡은 인상을 찌푸리며 달마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달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나의 고향에서는 귀의불(歸依佛)이라고 하면
삼심(三心)을 바로잡고 육욕(六慾)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진성(眞性)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을 귀의불이라고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달마의 설명에 종횡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법에 귀의한다는 뜻도 그대가 배운 대로 설명해 보시오.”
“그러지요.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행하지도 않으며,
몸으로는 뜻밖의 행동을 하지 않으며,
입으로는 가식이 있는 말을 하지 않아 말마다 도리에 벗어나지 아니 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모범이 되고 모든 이치에 어긋남이 없음으로써
나라의 법에도 저촉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귀의법(歸依法)이라고 합니다.”
종횡은 설명을 계속하라는 몸짓을 했다.
“귀의승(歸依僧)에 대해서는 일신(一身)을 청정하게 하여
삼계(三界)를 초출(超出)함으로써
법신(法身)이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어머니 태(胎) 안에 있을 때는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했는가.
그리고 태어날 때는 어디서 와서 죽을 때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생사의 문호(門戶)와 길을 알고
청정법신이 있는 곳을 분명히 밝혀내어
항상 자재(自在)하고 멸(滅)하지 않는 것이 귀의승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마친 달마는 은근히 종횡의 표정을 살폈다.
종횡의 얼굴엔 감격의 파동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엔 달마가 종횡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는 법륜(法輪)이 상전(常轉)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법륜을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엔 3천 번 소리 내어 염불하고
저녁에는 소리 없이 3천 번 염불하면 법륜이 돌게 될 것이오.”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미 자신감을 잃어버린 종횡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반면 달마는 힘찬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만약 염불에 색(色)이 있고 소리(聲)가 있다면 그것은 청정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염불이 어찌 도(道)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륜이 항상 돈다는 것은 염불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돈다는 뜻이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 이것은 단전(單傳)으로 깨달음을 얻어
진규(眞竅)에 심인(心印)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감히 제가 배운 가르침의 요지를 말씀드리면,
허무(虛無)의 한 구멍에서 맑은 기운이 운반되어 오작교(烏鵲橋)로 올라
중루(重樓)로 내려오고 강궁(絳宮)을 경유(經由)하여 단방(丹房)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그 기운이 방촌(方寸)으로 흘러가고
이어 미려관(尾閭關)으로 들어갑니다.
미려관에서 협척(夾脊)을 통과하여 옥침관(玉枕關)에 이르게 됩니다.
옥침관에서 통천(通天)으로 통하게 되며 통천에서 칠보(七寶)로,
칠보에서 보장(寶藏)으로 들게 됩니다.
그리고 보장에서 철고(鐵鼓)를 뚫고 나가고
철고에서 다시 수미산(須彌山)으로 통하고 수미에서 산림(山林)으로,
산림에서 영산(靈山)으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산에 있는 팔괘(八卦)의 감리(坎離)에 이르면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을 만나게 됩니다.
무봉(無縫)의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이 법문은 오직 한 개의 열쇠로만 열립니다.
그 열쇠는 바로 허무현관의 일규가 열려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곳이 열리면 자유자재로 천태(天台)에 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법륜이 상전하는 것입니다.”
달마의 고답적인 묘론(妙論)에 종횡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설명은 일찍이 들어본 적조차 없었기에 충격이 너무나 컸다.
종횡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거 큰일 났는걸.
내가 당초에 늙은 중보고 일규불통(一竅不通)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어.
이 중의 오장육부 속에는 진짜 보배가 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도리를 잘 알고 마음조차 맑고 밝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크게 깨달은 사람 같아.
내가 눈이 어두워 사람을 잘못 보고 큰 실수를 했으니 이제 어떻게 한다?
공연히 제자로 삼겠다고 절까지 받았으니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꼬?’
종횡은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습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짐짓 태연한 척 목소리에 힘을 실으면서 달마 쪽으로 다가갔다.
“제자는 이제 일어서시오.”
종횡은 달마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달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 일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오?”
달마는 근엄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스승님께 정법(正法)을 전수해 주시기를 소원했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알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대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스승님께 묻겠습니다. 이 곳에 하늘(天)은 몇 개나 있습니까?”
“혼원일기(混元一氣)이래 오직하나의 하늘밖에 없소.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오?”
“저는 일찍이 사람에겐 누구나 하늘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다 하나의 하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런 하늘을 인정하지 않소!”
“그런 하늘이 없다면 어떻게 하늘의 이치에 합치할 수 있으며,
나아가 바른 수도(修道)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달마의 이 말에 종횡은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면 그대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있단 말이오?
안다면 당장 말해 보시오.”
달마는 한참 뜸을 들인 다음 종횡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스승님께서 물으시니 설명하겠습니다.
옛날부터 불법을 가볍게 누설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선(禪)의 기밀(機密)은 함부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스승님을 위해 청향(淸香)을 피우고 설명하려고 하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종횡은 머쓱해 했다. 그러나 달마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天)을 일컬어 일대천(一大天)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人)을 일소천(一小天)이라고 합니다.
하늘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별자리가 있고,
사람에게는 팔만사천의 털구멍이 있습니다.
하늘은 삼백육십일을 셈하여 1년으로 삼습니다.
사람은 그에 부합하여 삼백육십의 골절(骨節)이 있고 이것을 일컬어 일주천(一周天)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이십사 구비(二十四 折)가 있으며 음양으로 본명(本命)을 이룹니다.
하늘에 십팔도(十八度)가 있고, 사람의 소장(小腸)은 십팔구비가 있으며
십팔중지옥(十八重地獄)으로 안배됩니다.
하늘에 십이원(十二元)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인후(咽喉)에는 십이 마디(十二候)가 있습니다.
그래서 1년을 12개월로 안배하고 있으며 인후를 일컬어 중루(重樓)라고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오두육성(五斗六星)이 있듯 사람에게는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하늘의 오방(五方)에 안배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대장, 소장, 방광, 담(膽), 신(腎)이 있고 이를 오후(五侯)라고 부릅니다.
하늘에는 동두(東斗)가 있어 서두(西斗)에 이르기까지 팔만사천 유순(由旬)이 있으며,
남두(南斗)에서 북두(北斗)까지는 십만구천오백 유순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단전(丹田)이 있으며
왼쪽을 정해(精海), 오른쪽을 기해(氣海)하고 합니다.
미려관을 혈해(血海)라고 부르며 천조혈(天潮穴)을 골수해(骨髓海)라 부릅니다.
통틀어서 사해(四海)라고 하지요.
동해(東海)에서 서해(西海)까지에는 팔만사천 혈문(穴門)이 있고,
남해(南海)에서 북해(北海) 사이에는 일만구천오백 혈문이 있습니다.”
달마의 청산유수 같은 설법에 종횡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숙였다.
달마는 종횡의 얼굴에서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달마는 종횡에게 이른바 천인일리(天人一理)의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 속에 있다는 풀이에 종횡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태양(太陽), 태음(太陰)의 두 신(二神)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정(精), 기(氣)의 두신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두 눈(二目)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왼쪽 눈은 해에 해당하고 오른쪽 눈은 달에 해당합니다.
하늘의 태음, 태양은 빛으로 천하를 비추고 하루 낮 하룻밤에 1만3천5백 도(度)를 달립니다.
사람도 그에 맞춰 하루 낮 하룻밤에 1만3천5백 번의 숨쉬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숨쉬기에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게 되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만나게 됩니다.”
달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종횡에게 물었다.
“사부께서는 많은 경전을 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뇌조경(雷祖經)>에 쓰여 있는 ‘신중(身中)의 구령(九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체투지 자세로 애원
종횡은 그 질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무지함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선 참스승을 만났다는 기쁨이 꿈틀거렸다.
종횡은 그 자리에서 달마 앞으로 나아가 꿇어 엎드렸다.
이어서 구배(九拜)의 예(禮)를 두 번씩, 십팔배(十八拜)의 큰절을 올렸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종횡이 십팔배를 올린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그가 달마에게 구배를 요구했던 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배례(拜禮)이다.
종횡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저는 여태까지 잘못된 방문(旁門)에 빠져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비록 눈은 있었지만 눈동자가 바로 박히지 않아 바른 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이야말로 참 나한(眞羅漢)이신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스승님께서 무슨 까닭으로 홍진(紅塵)에 내려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디 저를 제자로 삼으시어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도교에서 불교로 귀의하고자 하오니 고해침륜(苦海沈淪)에서 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달마의 대답은 뜻밖에도 쌀쌀했다.
“나는 애당초 당신을 스승으로 삼아 배례까지 했소이다.
그런데 내 어찌 이제 와 당신을 제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종횡은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고개를 조아리며 거듭 읍소했다.
“스승님이시여, 저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비록 도가(道家)에 입문하기는 했지만 진전(眞傳)을 얻지는 못했나이다.
이제 신묘한 스승님의 법어(法語)를 들으니 막혔던 가슴이 절로 열리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고 망언을 일삼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옵소서.”
종횡은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로 달마 앞에 엎드려 애원했다.
그러나 달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직 들리는 것은 종횡의 흐느낌 소리뿐이었다.
이윽고 달마가 말문을 열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리석은 인간은 천리 길을 헤매고 다니지만,
그런 인간도 깨달으면 바로 한 구멍의 뿌리로 돌아간다고 했소이다.
그대는 이제 도교를 떠나 불교로 들어와 나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고 있소.
그대의 자세나 식견으로 미뤄 그 마음가짐이 대견스럽소이다. 그대의 원을 받아들이고자 하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종횡은 달마 앞에 예를 올렸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동시에 스승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데 있어 추호도 어그러짐이 없도록 할 것을 다짐하나이다.
부디 제자가 탁(濁)을 벗어나 청(淸)을 찾고 자성(自性)의 법을 밝혀
하차(河車)를 운전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시옵소서.”
‘종횡’을 ‘종정’으로 바꿔
“좋소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문제(門弟)가 되기에 부끄럼이 없소이다.
이제 그대의 이름 ‘종횡’을 ‘종정(宗正)’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시오.
본래 종(宗)이라는 글자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소.
조가근원(祖家根源)의 종주(宗主)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횡(橫)이라는 글자는 조금 문제가 있소.
그것은 그대가 삿된 길로 빠져 횡행(橫行)한다는 뜻과도 통하오.
수도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진정(眞正)한 구전묘결(口傳妙訣)을 받지 않고는 법문에 들 수 없는 법이외다.
이제 그대의 이름을 바를 정(正)자를 넣어 종정(宗正)으로 개명(改名)하니,
이는 선천(先天)의 바른 이치를 밝히고 정법(正法)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오.”
종정은 새로운 법명(法名)에 담긴 뜻을 마음속에 새기며 스승 달마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달마가 천성사에 주석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더군다나 도교의 스승인 종횡이 개종(改宗)하여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천성사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은 승려들이 찾아들었고, 예불하려는 중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웅보전은 향불 연기로 가득 찼고, 곳곳에 밝혀진 촛불은 천성사의 옛 영화를 재현시키는 듯싶었다.
유지삼장 법사의 방문
이날도 달마는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아침 공부를 마친 다음 산문을 나섰다.
뒷산에 올라 팔다리를 움직이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도인법(導引法)을 연마하는 것은
하나의 일과(日課)였다. 한데 이날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늘 하던 도인법도 거른 채 정상에 서서 불계(佛界)와 속계(俗界)의 여러 모습들을 헤아렸다.
천성사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곳을 떠나 가야할 곳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어슴푸레하게 깔린 안개를 뚫고 말발굽 소리와 요령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필시 누군가가 찾아온 것 같았다.
달마는 그 사람의 환영(幻影)이 시커먼 그림자가 되어 자신을 덮쳐 오고 있음을 느꼈다. 누구일까?
얼마 되지 않아 동자승이 황급하게 뛰어올라왔다.
달마에게 몸을 굽혀 절을 하며 말했다.
“조사님께 아룁니다.
조정의 고승인 유지삼장(流支三藏) 법사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달마는 그답지 않게 ‘아-’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유지삼장’이라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유지삼장 법사가 누구인가.
그는 위(魏) 문제(文帝)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당대의 고승이다.
선법과 불경에도 밝아 그를 따르는 제자가 적지 않았다.
위(魏)의 효명제(孝明帝) 또한 그를 제왕과 동격으로 예우했다.
나들이할 때는 보마향차(寶馬香車)를 대령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지삼장은 도량이 매우 적은 위인이었다.
자기보다 빼어난 사람을 인정할 줄 몰랐다.
달마는 일찍이 그를 만난 일이 있어 그의 성품을 꿰뚫고 있었다.
서둘러 산을 내려간 달마는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유지삼장을 맞아들였다.
조사의 방으로 안내하여 상좌에 좌정케 한 다음 최고급의 차를 대접했다.
애써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했다.
“대법사께서 이런 누추한 절에 왕림하셨는데
멀리까지 나아가 모시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지삼장은 오만한 자세로 턱을 쳐들고 응수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모르고 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였소.
몰랐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당신에게 죄를 돌릴 수 있겠소이까.”
달마는 공손하게 합장하며 읍을 했다.
유지삼장에게 들리도록 “자비로다, 자비로다” 하며 뇌까렸다.
유지삼장은 마치 태도를 표변하듯 큰소리로 웃어 제기며 말했다.
“대화상께서는 천축의 조사이시고 선종의 비조(鼻祖)가 아니십니까?
어찌 몸을 굽혀 이처럼 황량한 절에 계십니까? 정말 어려운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달마는 손을 내저었다.
“대법사의 말씀에 오직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출가한 사람으로서 어찌 환경의 좋고 나쁨을 따지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달마의 말에 유지삼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여기 온 것은 달마와 무엇을 토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달마의 영적인 근기나 깨달음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유지삼장은 궁중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앞세워 달마를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한껏 드높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달마와 더불어 이런 식으로 담론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유지삼장은 이미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달마를 향하여 냉소를 보냈다.
“아무튼 큰스님의 명성이 멀리까지 자자하니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내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첫째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유지삼장은 달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품속에서
한 봉지의 차를 꺼내 달마에게 바쳤다. 너무나 갑작스런 행동에 달마는 당황했다.
“내가 어찌 대법사님의 선물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달마가 받기를 망설이자 유지삼장은차 봉지를 달마의 경상 위에 올려놓았다.
달마는 어쩔 수 없이 감사의 뜻을 목례로 표했다.
유지삼장은 곧장 몸을 일으켜 방문을 나섰다.
달마는 유지삼장을 산문 밖까지 전송했다.
유지삼장이 탄 수레는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질풍같이 자취를 감췄다.
유지삼장의 갑작스런 방문에 천상사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패악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승려들은 모두 달마를 염려했다.
“나무가 크면 바람 잘 날이 없는 법이지.”
달마의 입에선 탄식이 흘러 나왔다.
사실 천성사를 찾아들었을 때만 해도 달마의 본래 생각은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었다.
동녘 땅에서의 말년을 조용하게 마감하고 혼이라도 서쪽을 찾아가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인연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비록 어렵고 괴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을 바쳐 잘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천성사의 승려들은 이구동성으로 유지삼장을 피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하지 않도록 대비하시라고 달마에게 권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런 권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천성사는 노납이 말년을 마칠 절이오. 어째서 그를 피해야 한단 말이오?”
염주 굴리며 정좌한 채 조용히 입적
달마가 안치된 관을 여니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짚신 한 짝만 놓여 있을 뿐
유지 삼장법사가 떠난 뒤 술렁이던 분위기는 차츰 가라앉았다.
달마는 저녁예불을 마친 다음 평소처럼 천성사 뒷산에 올라가 활공(活功)을 하려고 했다.
석대(石臺)처럼 생긴 바위 위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준비 동작을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뱃속에서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달마는 참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달마의 얼굴과 몸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본 동자승은 크게 놀랐다.
한달음에 절로 뛰어 내려가 이상(異常) 사태를 알렸다.
종정을 비롯한 수많은 스님들이 산으로 올라가 달마를 절 안으로 모셔왔다.
달마가 통증을 느낀다거나 몸져눕는다는 것은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 안의 대중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걱정의 심도 또한 깊어만 갔다.
하지만 달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했다.
달마는 이미 사태의 전말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달마의 일과(日課)는 자로 잰 듯 규칙적이었다.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정오(正午)가 지나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좌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 날은 이런 일과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유지삼장의 갑작스런 방문 때문이었다.
달마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유지삼장이 선물로 놓고 간 향차를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저녁예불을 마친 뒤 큰 스승에게 향차를 정성스럽게 끓여서 바쳤다.
달마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 마셨다.
차 향기가 야릇하고 맛 또한 특이했지만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향차는 고도(高度)로 정제된 독차(毒茶)였다.
달마는 차근차근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유지삼장은 소림사에 있을 때도 다섯 번이나 나를 독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그가 다시 독차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단순한 질투심이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적개심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일인 듯싶었다.
달마는 이 땅에서 인연이 다한 것을 절감했다.
그는 유지삼장이 선물로 준 향차가 예사롭지 않은 조짐이라는 것을 이미 예감했었다.
하지만 달마는 그것을 과감하게 던져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의심하기보다는 애써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령 잘못해서 독차를 마셨다 하더라도 달마에게는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공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해독하려고 하지 않았다.
달마는 눈을 살며시 내려감은 채 과거를 돌이켜 보고, 현재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왜 사랑하는 부모와 정을 끊고 계율이 엄격한 불문(佛門)에 들어와 선법(禪法)의 정상을 추구했는가?
무엇 때문에 편안하고 대우받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나아가 왕가의 가업을 이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짚신만 신고 운수행각을 했으며
죄악으로 도탄에 빠진 생령들을 제도하려고 했는가?
그리고 이제 독차의 죄악 속에 걸려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법(法)인가, 성(性)인가? 무(無)인가, 공(空)인가?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러나 달마의 의식은 이미 통증을 벗어나 있었다.
달마의 의식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실린 한 조각배처럼 멀리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 배엔 자비심이 실려 있었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닻이 올라 있었다.
달마는 해독의 조치를 서둘러 취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비법도 쓰지 않았다. 그 순간 달마는 진정으로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달마는 누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천성사의 모든 승려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향탕으로 목욕을 한 다음 가사를 차려 입고 짚신을 신었다.
손에 든 염주를 굴리면서 정좌한 상태에서 조용히 입적했다.
이 때가 바로 위나라 효장제(孝莊帝) 영안 원년(서기 528년, 단기 2861년) 무신(戊申) 음력 10월 5일이었다.
달마가 10월 상달에 입적한 사실은 선종의 본바탕과도 연관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동녘 땅에서 비롯된 하나(一)의 천부진법(天符眞法)을 회귀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온 달마가 바로 10월 상달에 이승을 마감한 것은
시(始)와 종(終)이 하나(一)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천성사의 종정은 곧 바로 사람을 소림사로 보내 혜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혜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왔다.
혜가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좌탈(坐脫)한 스승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혜가는 종정을 비롯한 천성사의 승려들과 상의하여 묘지를 고르고 안장 법회를 준비했다.
달마의 묘지는 웅이산(熊耳山)으로 정해졌다.
웅이산은 숭산(崇山) 동남쪽에 위치한다.
등봉현(登封縣), 밀현(密縣), 우현(禹縣)의 세 고을 경계선상에 우뚝 솟은 명산이다.
웅이산의 산봉우리는 해맞이의 모양을 하고 있고, 암석들은 영롱한 빛을 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의 선경(仙境)인 금강산과 비교되기도 했다.
무신 음력 10월 28일 달마의 시신은 웅이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혜가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웅이산 아래의 정림사(定林寺) 안에 7층 불탑을 조성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1년이 훌쩍 지났다.
초가을의 파미르 고원은 한겨울처럼 찬바람이 몰아쳤다.
3년 전 위나라 문제(文帝)가 서역으로 파견했던 사신(使臣) 송운(宋雲)은
파미르 고원의 동쪽 끝 총령(蔥嶺)을 넘고 있었다.
추위에 지친 송운은 잠시 산마루에 멈춰 서서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건너편 산에서 기골이 장대한 맨발의 스님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노을에 비친 스님의 모습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법당에 안치된 금동불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오는 스님을 보니 오른손에는 검은색 염주, 왼손에는 짚신 한 짝을 들고 있었다.
스님을 맞는 송운의 자세는 어느덧 경건해졌다.
송운은 스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찍이 소림사에서 본 일이 있는 달마 조사를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송운은 너무나 반갑고 기쁜 나머지 제대로 인사도 차리지 못한 채 합장의 자세로 물었다.
“소관이 인연이 있어 여기서 다시 조사님을 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사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지요?”
달마가 산마루에 올라서면서 대답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이외다.
한데 대인께서는 웬일로 이 저녁에 길을 서둘고 있는 것입니까?”
송운은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이라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달마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인께서는 너무 서둘러 가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위나라는 새 임금인 효장제가 즉위해 계십니다.
그전 임금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달마는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쏜살같이 총령을 넘어갔다.
송운은 달마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길을 서둘러 두 달 만에 고도(古都)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과연 달마가 말한 대로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송운은 놀라움과 함께 달마에 대한 외경심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송운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달마를 만났던 총령은 어떤 곳인가?
구도자가 서천 성토(聖土)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땅이 아닌가?
그렇다면 달마가 그곳을 지나갔다는 것은
진짜 불생불멸(不生不滅) 무거무래(無去無來)의 불신(佛身)이
서천 극락세계로 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위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왕실과 백성을 위해 커다란 축복이고 영광임이 분명했다.
송운은 즉시 효장제에게 상소의 글을 올렸다.
효장제는 불교를 믿고 승려를 존중하는 덕 있는 황제였다.
송운의 글을 읽은 황제는 한편 의심하면서도 기쁨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송운을 입궐케 하라고 명했다.
송운은 황제 앞에 나아갔다.
“네가 송운인가? 네 죄를 알렸다!”
효장제의 청천벽력 같은 첫마디에 송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효장제는 송운이 올린 글을 땅바닥에 던지면서 힐문했다.
“네가 어찌 짐을 기만하려고 이런 글을 올렸단 말이냐?”
“폐하, 소신이 어찌 감히 폐하를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가 정말로 총령에서 달마 조사를 만났단 말이냐?”
“폐하, 소신이 올린 글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만일 기만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소신을 참수의 형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송운의 자세는 진지하게 이를 데 없었다. 효장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죽은 달마를 총령에서 만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웬일인지 믿고 싶었다.
효장제는 송운의 목을 담보로 웅이산 달마의 묘를 파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명했다.
황실의 어병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삽시간에 묘지를 파헤쳤다.
달마가 좌화(坐化)한 관이 드러났다.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관 뚜껑을 열었다. 관속에선 뜻밖에도 향기가 진동했다.
향내는 하늘로 솟아 十里밖까지 퍼져나갔다. 과연 관속에는 달마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한 짝의 짚신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효장제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서 관을 향해 부복했다.
송운의 말을 믿지 않고 관 뚜껑을 연 것 자체가 큰 죄를 범한 것이라고 자책했다.
어병들에게 명하여 짚신을 꺼내 오게 하고 제단을 차려 모든 신하와 함께 사죄의 큰 제사를 올렸다.
다음날 효장제는 달마가 남긴 짚신 한 짝을 소림사로 옮기게 했다.
그 짚신을 잘 모셔 달마가 성불한 증명으로 삼고 모든 승려와 신도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유시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2조(二祖) 혜가는 소림사에 있는 모든 승려들을 이끌고 미리 산문 앞으로 나와 있었다. 큰 제단을 차려놓고 영접했다.
이를 기점으로 소림사는 달마 생전 때보다 더욱 유명해 지고 활기가 넘쳐흘렀다.
하나(一)의 진법을 골간으로 한 달마의 대승선법은 비로소 활짝 꽃피게 되었다.
동녘 땅 모든 곳에서 萬里를 멀다하지 않고 출가하고자 하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총령에서 달마를 만난 송운도 머리를 깎고 소림사에서 출가했다.
효장제는 송운을 이른바 어승(御僧)으로 봉하고
자신이 지은 불경죄(不敬罪)를 속죄케 하는 데 진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스스로의 本性 속에서 道의 씨앗 찾으라.
혜능의 머릿골 海東으로, 달마진법은 우리나라에 正脈이 이어지고 있
다
달마가 입멸한 지 3년 뒤 양 무제(梁 武帝)는 달마를 기리기 위해
보리달마대사송(菩提達摩大師頌)을 인각한 석비와 묘탑을 웅이산 기슭에 세웠다.
약 1천자가 새겨져 있는 석비에는 문장마다 달마를 추모하는 무제의 절절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석비는 달마의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달마가 혜가에게 전한 것이 일진(一眞)의 법, 곧 하나(一)의 진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달마가 혜가에게 전한, 하나(一)의 가르침은
이른바 현관일규(玄關一窺)를 개혈(開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현관’이란 ‘지현지묘지관문(至玄至妙之關門)’의 준말이다.
지극히 오묘한 기운이 출입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집의 경우 현관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도 현관이 있으며 그곳을 통해야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일규’는 한 구멍이라는 뜻인데 출입구가 ‘하나’임을 일컫는 것이다.
‘현관일규’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그러나 달마가 비전(秘傳)한 그 자리는 두 눈썹 사이의 한가운데다.
그 한 구멍을 바르게 개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성구자(自性求子)의 옳은 길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이다.
‘자성구자’란 스스로의 본성(本性) 속에서 씨앗을 찾으라는 뜻인데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보면 그 씨앗은 강재이뇌(降在爾腦)
즉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다고 쓰여 있다.
달마는 바로 이 현관일규를 혜가에게 명지(明指)해 줌으로써 도를 잇게 했던 것이다.
달마가 소림사를 떠날 때의 에피소드는
새삼스럽게 전법(傳法)의 실상을 웅변해 주고 있다.
달마는 도부(道副), 이총지(尼總持), 도육(道育), 혜가 등 출중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질문을 했다.
“그 동안 오랜 세월 이 소림사에서 함께 선(禪) 공부를 해 왔다. 깨달은 바를 말해 보아라.”
도부가 제일 먼저 나섰다.
“스승이시여,
제가 깨달은 바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不執文字),
문자를 여의지 않는 것(不離文字)을 도의 작용(道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피부를 얻었구나(汝得吾皮).”
두 번째로 이총지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제가 깨달은 바는 경희(慶喜) 보살이 아축불국(阿笁佛國)을 보았을 때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않은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달마 대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응수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도다(汝得吾肉).”
다음에는 도육이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제가 깨달은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가
본래 공한 것(本空)이기 때문에 몸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色) 감각(愛) 지각(想) 마음작용(行) 등
오음(五陰)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도다(汝得吾骨).”
맨 끝으로 대답하게 된 혜가는 조용히 일어나서 달마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큰절을 올리더니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달마는 다른 제자들을 한번 둘러본 다음 혜가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汝得吾髓).”
이런 전법의 방식을 일컬어 흔히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진법은 현관일규를 통해서 선천(先天)의 기운을 받아 견성(見性)하는 지름길이다.
선천의 기운이란 수태한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받는 생명의 진기(眞氣)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후천(後天)의 기운이란 태아가 이 세상에 태어난 뒤 받는 기운을 일컫는다.
호흡이나 음식을 통해 얻는 기운은 모두 후천의 기다.
가령 단전호흡 같은 것은 후천의 기를 받아 건강을 도모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가 선천의 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운용할 줄 모르면 어떤 경지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현관일규를 도외시 하면 아무리 수행의 공덕을 쌓아도 ‘자성구자’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마의 행법(行法)은 <세수경(洗髓經)>과 <역근경(易筋經)>에 담겨 소림사에 전해지고 있다.
<세수경>의 원본(原本)은 오늘날 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오직 높은 경지의 스승들에 의해 구전(口傳)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역근경>은 원전(原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행법도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이 <역근경>조차도 한동안은 전설(傳說) 속의 책으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역근경>이란 책을 구해서 읽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행법의 어려움 때문에 난해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역근경>을 난해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가 손꼽힌다.
하나는 <역근경>의 공법에 도가(道家)적인 트릭이 잠재돼 있기 때문에 쉽사리 행법을 익힐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역근경>의 행법은 기(氣)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는 완전하게 터득할 수 없다는 점이다.
흔히 역근경이라고 하면 소림사 무술의 교본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근경>은 단순히 무공(武功) 또는 외공(外功)만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내공(內功)도 외공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공 쪽에 <역근경>의 비밀이 감춰져 있다고 지적되고 있을 정도다.
달마 선법의 핵심은 바로 <역근경>에 내장되어 있고,
현관일규를 견성의 통로로 삼은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소림사에 모셔진 달마 석상이나 웅이산에 세워진 달마 석상은 일반적인 불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 차이점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는 수인법(手印法)이다.
달마의 석상에는 ‘수인’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옷소매 속에 감춰져 있다.
이것은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의 숨겨진 수인법을 알면 곧 달마의 선법을 알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마의 수인법은 천부(天符)의 수인 또는 일자(一字)의 수인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수인법은 단군의 천진(天眞)에서 나타나 있는 것과도 상통한다.
둘째는 좌법(坐法)이다.
달마의 앉아 있는 모습은 결가부좌의 좌법이 아니라 궤좌(궤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좌법을 일컬어 일자(一字) 좌법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좌법은 우리나라의 고구려 고분벽화나 발해의 석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달마가 9년 면벽하기 위해 찾아 들었던 소림사 뒤의 소실산 석굴의 본래 이름은 ‘치우’동굴이었다.
치우는 우리 역사상 단군보다 앞선 환웅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치우가 수행한 방법은 다름 아닌 하나(一)의 진법이고, 그가 앉은 좌법은 하나(一)의 궤좌법이었다.
이것이 달마선법의 핵심인데,
그것은 우리 전래의 <천부경>이나 <삼일신고>의 수행법과 별개가 아닌 것이다.
달마는 일(一)은 무극(無極) 중의 일점(一點)의 영성(靈性)을 말하는 것이며
석가모니 부처의 진경(眞經) 중의 진경이라고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一)은 동토(東土) 즉 동녘 땅에서 비롯된 것으로
만물은 모두 이것에서 생성된다고 밝혔다.
나아가서 삼계(三界)는 일(一)로써 이루어졌다고 간파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달마선법이 결코 별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와 인연이 매우 깊다고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달마의 진법은 우리나라에 정맥(正脈)이 이어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의 예증으로 거론되는 것이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진신불(眞身佛)에 얽힌 설화이다.
진신불이란 육신 그 자체가 부처라는 뜻으로 육신 그대로 성불한 것을 일컫는 것이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므로 등신불(等身佛)이라고도 하고,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라고도 부른다.
혜능의 속성은 노씨(盧氏)이고 남해의 신주(新州) 사람이다.
이곳은 옛 백제 땅이므로 혜능은 백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혜능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찾아 구법하자 양자강 남쪽의 오랑캐는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그러나 혜능은 당당했다.
“사람이 태어난 곳에는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 한 마디에 혜능은 홍인의 제자가 되었다.
결국 심인(心印)을 얻어 의발과 법을 받고 법통을 잇게까지 되었다.
달마가 예언한대로 의발을 전수하는 전통은 혜능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혜능은 입적하면서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배와 노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당황한 제자들이 물었다.
“정법안장(正法安藏)은 누구에게 부치십니까?”
“도 있는 자가 얻고, 마음이 없는 경지에 이른 자에게 통하게 되었느니라.”
혜능의 이 한 마디는 제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후에 무슨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내가 간 뒤 5~6년이 지나면 내 머리를 가져가는 자가 있을 것이니라.”
혜능이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스승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다.
혜능의 진신불을 탑 속에 안치하면서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로 목을 튼튼하게 감쌌다.
그리고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스승의 진신이 안치된 탑 속에서 쇠줄을 끊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이 놀라 뛰어가 보니 이미 혜능의 목은 도둑맞은 뒤였다.
관가에 비상이 걸렸고, 얼마 안 되어 범인 장정만(張淨滿)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신라승 김대비(金大悲)에게 금 2만 냥을 받고 육조대사의 머리를 넘겨주었다고 자복했다.
육조 혜능의 머릿골은 그가 예언한 그대로 해동(海東)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혜능이 열반한 해가 단기 3천46년(서기 713년)이고
유골이 도난당한 것은 단기 3천55년(서기 722년)
그리고 그 유골이 이 땅에 돌아온 해는 단기 3천56년(서기 723년)이다.
그러나 유골의 존재는 거의 천년 동안이나 비밀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공개된 것은 단기 4천1백95년(서기 1862년) 쌍계사 주지 용담 선사에 의해서였다.
용담 스님은 목압사(木鴨寺)에 보존되어 있던
유골을 쌍계사로 옮겨와 육조정상탑(六祖頂上塔)을 세우고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이때 육조정상탑에선 신묘한 빛이 발광하여 온 누리를 대낮같이 밝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비단 육조의 두개골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두골사리도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의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직접 그 유골을 받아 이 땅에 가져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一)의 진법이 시원(始源)한 곳에 귀일(歸一)하는 오묘한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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