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달마어록 진여론 眞如論
부처는 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았다면 누가 항상 그들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마음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마음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변함 없는 여래라고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며, 위대한 성자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한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와 혀로 냄새 맡고 맛보며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다. 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깨어 있다."고 했다. 여래의 여러 가지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형상도 갖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어 있음이다."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일렀으되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예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마음은 비어 있으며 어떤 형상도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에게 무엇하러 예배하겠는가? 그것에 예배하는 자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에 예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말을 명심하라.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마음에 어디 그런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석가모니 부처와 마하비라가 모두 지식에 반대하는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치이다. 그들은 학식있는 학자와 브라만들과 판디트들에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반대했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에 얽매여 있다는 점이다. 그대는 자신의 무지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집안에 등불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암흑 세계와 같다. 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빛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빛에 대한 지식은 그대 집안을 밝게 해주지 못한다. 그 집은 여전히 암흑 속에 있다. 그리고 지식이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착각을 일으키는 것밖에 없다. 그 착각 속에서 그대는 지식에 파묻혀 주위에 있는 어둠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둠은 거기에 있다. 그대가 그것을 잊어버리든 안 잊어버리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실 어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빛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빛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빛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하비라나 석가모니 부처나 그들은 모두 브라만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그런 학자들에 의해서 책으로 편찬되었다. 마하비라에게는 열한 명의 친밀한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브라만 계급이며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다른 무식한 사람들의 무지와 다름이 없었다. 무지는 지식으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식 속에 숨어 있어 잘 발견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본성이며 존재인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대 존재의 중심이 바로 순수한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우선 발견되어져야 한다.
지식이나 경전, 혹은 현자로부터 나온 말을 배우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빛에 도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빛은 바로 깨달음의 원천이지만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같은 경우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은 브라만 계급이었고 부처의 진리를 전하는 데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생각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과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지식이고 학식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침묵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소식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해지는 것이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불운이 달마에게도 일어났다. 달마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에서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반경이 훨씬 컸다.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달마에게 흥미를 느꼈고, 그것은 모두 지식에 관한 흥미 때문이었다. 그들은 삶의 신비를 풀어 줄 황금 열쇠를 달마가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말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것이었다. 그에게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달마의 말을 모으는 데 정신이 빠져서, 달마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 어록들을 기록했다. 자연히 거기에는 실수가 생겨났고 많은 돌 중에서 다이아몬드는 몇 개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그 몇 안 되는 다이아몬드들을 찾기로 하자. 비록 달마처럼 같은 경험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그의 카리스마적인 존재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촛불에 덤벼드는 불나방처럼 중국 각지에서 달마의 발아래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의 끝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계속 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달마의 말이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지를 따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해석을 덧붙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와 색깔을 부여했다. 달마는 어떤 글도 직접 남기지 않았다. 이미 기록된 문자는 죽은 말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승이 하는 말에는 온기가 있다. 거기에는 광채가 있고 스승의 현존이 들어 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은 문자로 기록된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똑같은 말일지라도 그것이 기록인 이상 하나의 시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승의 육성은 살아 숨쉰다. 문자 속에는 생명의 고동이 없다.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깨달은 사람은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정말로 깨어 있어야 한다. 경전의 지식들을 끌어 모은 제자의 마음은 그 말의 아름다움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달마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에 달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말들을 적어 놓았다. 그들은 아마 실수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달마의 살아 있는 말을 내가 찾아내어 말할 때, 그것은 다시금 생명의 고동이 살아난다. 그래서 나의 주석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전달된 말속에 다시 생명을 주어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말들은 이 혼란스런 군더더기 속에서 벗어나서 다시 빛날 것이다.
어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는 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았다면 누가 그들 앞에 항상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이 부분은 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고 순수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미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인격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대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을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한 순간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대가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다. 그것은 지금 그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동일시가 완전히 흔들릴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알 수 없다면 그때 그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에 거짓이 생겨난다. 거기에 억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미친 상황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라. 그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의사이거나 기술자 혹은 교수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자신은 기독교인이거나 힌두교도거나 불교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거짓된 동일시이다. 그대 자신 주위에 거짓의 얇은 보호막을 쳐 놓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미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대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 생각에 수천 가지의 동일시를 만들어낸다. 그대는 누구의 남편이거나 누구의 아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그대 모습이 아니다. 그대가 날 때부터 남편으로 태어났는가? 날 때부터 의사나 기술자였는가? 그것들은 그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대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공허감이 그대 속에 있다면, 그대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거짓된 동일시를 더욱 두텁게 만든다. 하나의 동일시 위에다 다른 것을 쌓고 또 쌓는다. 그들은 정치적인 모임에 가입하고, 종교의 구성원이 되며,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 갖다 붙인다. 그대가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린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삶을 산다. 진정한 자기 모습보다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껍데기를 더 좋아한다. 그대 자신을 그저 지켜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었다.'는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깊은 말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삶이 불행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이다. 달마가 사람들이 어둠 속에 빠져서 점점 더 깊은 미혹 속에서 방황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없기에 갈수록 거짓된 동일시의 층을 두텁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도 거짓이며, 그들의 인간관계도 거짓이다.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자기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한다. 하는 일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물어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물어본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 거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없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그대의 본성에서는 오직 옳고 바른 것만이 나온다. 장미 넝쿨에서는 장미꽃만이 피어난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 나는 라이푸르(Raipur)에서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다시 내방 건너편에서 늙은 수학 교수 한 사람이 살았다. 나는 창문을 통해 그를 쳐다보곤 했다. 그는 창가에 아름다운 꽃들을 갖다 놓고서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가자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화분의 꽃들은 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의 창가에 가까이 가서 그 꽃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은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조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꽃이 생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매일 거기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그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꽃들은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내가 계속 물을 주기에 그 꽃들이 살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동일시는 바로 이 조화와 같다. 그것은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불행으로부터 그대의 삶을 해탈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의 지루한 삶을 환희의 세계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불멸로 그대를 데려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부처란 말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가 부처다. 그대 역시 부처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그대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거기에 부처가 있는지를 모른다. 깨달음은 바로 그대 삶의 근원이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 때에만 지금까지 미혹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다. 진짜 장미꽃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헝겊으로 만들어진 조화 속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낸다. 그 조화는 죽은 것이다. 거기서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진짜 꽃만이 시들 수 있다. 그것은 아침에 존재계로 나와서 비와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태양과 함께 즐거워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나와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간의 삶도 이와 꼭 같다. 우리는 미지에서 나와서 미지로 간다. 우리는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천 번 왔다. 앞으로도 수천 번 여기로 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은 불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죽는다. 우리의 겉모양, 즉 우리의 집, 우리의 육체, 우리의 마음은 모두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오래되면 낡아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영원하다. 달마는 이 말을 '무심'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같은 말을 썼다. 그것은 마음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무심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끔씩 나타나기도 하지만, 곧 다시 미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미지에서 앎으로 그리고 앎에서 미지 속으로 옮겨다니는 이 움직임은 영원히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마지막 삶이 될 것이다. 그때 그 꽃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안 꽃은 삶으로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과 과정을 다 마치고 이제 모든 미혹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앎의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앎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대가 앎의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세계, 존재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되돌아가는 일이 다시없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무심을 안다. 이 무심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무심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무심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무심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변함 없는 여래라고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며, 위대한 성자이다.
이 어록을 편찬한 사람은 마음이 여래가 아님을 알지 못할 정도로 지성적이지 않다. 마음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은 신성한 자아라고 불려질 수 없으며 불멸도 아니며 위대한 성자도 아니다. 마음은 매우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작업에만 쓸모가 있다. 그것의 기능은 외부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마음이 절대적인 무용지물이다. 자신의 내면을 알고 싶은 사람은 마음을 넘어서야 한다. 그들은 마음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전 과정이다.
그대는 '여래(如來)'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는 말이다. 서양의 어떤 언어에도 이 말을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여래란 말은 오직 불교만의 언어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여래의 철학을 역설했다. 여래란 여여(如如)하다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생이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는 여여함 속에서, 진여(眞如) 속에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이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를 지켜보라. 이것이 삶이 흘러가는 길이다. 그대는 그것에 어떤 반대도 할 수 없다. 바다를 향해 강이 흘러가는 것이 여여이며 진여이다. 불의 본성이 뜨거운 것처럼 진여도 그러하다.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진여 속에서 흔들림이 없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욕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여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의 방식이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나의 진여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고상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진여가 나타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여여란 말은 그 뜻이 매우 심오하다. 여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를 흔들 수 없다. 그의 내면은 깊은 바다 속처럼 항상 잔잔하다. 여래란 순간 순간을 여여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그 말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본성만을 따라 살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숲을 지나가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내 위로 떨어졌다. 그 나뭇가지가 나를 다치게 했으므로 내가 그 나뭇가지를 때려 주어야 하겠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나뭇가지는 나를 헤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고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도 나뭇가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단지 거기에 있었고 그는 화가 났을 뿐이다. 만약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따른 것이고 나는 내 본성을 따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평정을 누리게 된다. 그대는 자신 속에서 하나의 결정을 이루었으며 그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무심을 떠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대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부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부처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개성을 갖고 잇다. 크리슈나도 마찬가지이고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인 달마 역시 자신의 개성을 따라서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시대가 변해도 모든 부처는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고유함을 갖고 있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만의 개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히말라야의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그 모습이 다르다. 그는 자신으로서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많은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힌두교도들은 크리슈나나 라마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불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에 대해서만 말한다. 기독교인은 예수나 성 프란체스코, 혹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수피들은 잘랄루딘 루미(Jalaluddin Rumi)나 사르마드(Sarmad)나 알 할라지 만수르(Al-Hillaj Mansoor)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깨달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모두 달랐고, 철학이 달랐지만, 여전히 그들은 같은 무심에 대해서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적 핵심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빛이다. 촛불을 보면서 그 초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초는 여러 가지 모양을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같은 것이다. 촛불을 보는 자는 더 이상 초에 집착하지 않는다. 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중요한 것이다. 무심은 모든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촛불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심을 따라 산다. 무심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한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와 혀로 냄새 맡고 맛보며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무심이다. 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무심이다. 하지만 달마의 어록을 편찬한 제자는 이 무심을 계속 마음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무심은 완전히 별개다. 그것은 차원이 다르며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마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언어이다. 그것은 무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 생각을 초월한 침묵에 이를 수 없다.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생각은 언어의 형태 속에 들어 있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깨어 있다."고 했다. 여래의 모습에 대해서 이해 못하고서, 다시 말해서 깨달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각 종교들은 사소한 것으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자이나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를 깨달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한 이유로 그렇게 한다. 그 이유는 마하비라는 모든 옷을 벗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벌거벗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학자들에게는 같은 이유로 해서 마하비라는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동차 생산라인에서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차들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한 시간에 60대씩 만들어지는 포드 자동차에서 그대가 각각을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부처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부처는 같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조차 모두 틀린데, 어찌해서 부처가 같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 5천 명이 앉아 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있는가? 쌍둥이조차도 서로 다르지 않은가? 그들의 부모는 그들을 완전히 구별한다. 그리고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그들의 친구들도 나중에는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는 쌍둥이도 아니다. 그리스도도 자신의 향기를 갖고 있고 마하비라에게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모든 부처는 자신의 독특한 빛과 향기가 있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이 세상의 모든 부처들의 인상을 그대에게 심어주고 싶다. 시대가 다르고 종족이 다른 부처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바르게 이해되어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성을 갖고 있지만 사실 같은 영역에 속해 있다. 그들의 내면이 일치하고 있기에 그들은 모두 하나인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라,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깨달은 부처는 모두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말이다. 아니면 모든 부처가 마하비라처럼 벌거벗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정말로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마하비라는 그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세상은 한가지 종류의 꽃으로만 장식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꽃이 각기 제 나름대로의 향기를 갖고 있을 때 존재계는 풍부해진다. 여래의 여러 가지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형상도 갖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어 있음이다."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는 육체 안에는 내면의 존재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그대 의식의 몸이며 각성된 불꽃의 몸체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마하가섭 역시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달마가 가장 강조한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듯이 그대 내면에도 같은 공간이 들어 있다. 그 공간은 바로 무심의 공간이다 .거기에 잠재되어 있던 불성이 그대만의 고유한 꽃을 피운다. 내면에 있어서 만큼은 아무도 가난하거나 부유하지 않다. 거기에는 빈부의 차가 없다. 그대는 항상 그것을 갖고 있으며 그대가 부처가 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무심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 깨달음, 깨어 있음, 해탈, 모크샤, 니르바나, 이 모든 말들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첫 번째로 나오는 행동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두 번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 속에서 그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매우 피곤에 지쳐 있다. 그래서 그대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대가 수많은 세월 동안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세상 밖에서 찾아왔다. 결국 찾는 대상은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발견하면 그대는 그저 놀라움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항상 깨달음의 상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사실을 그대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자신의 주머니 속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놓고서는 그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온 것과 같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는 날, 그대는 삶이 그대와 게임을 하고 있는 하나의 우스개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대는 다음의 이야기를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달마는 선의 창시자가 아니다. 선의 진짜 창시자는 마하가섭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사실 그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토록 우아한 사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가 어떻게 해서 선의 창시자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바이샬리에 수다스(Sudas)라는 가난한 구두장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집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서 제철이 아닌데도 연꽃이 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무척 비싼 가격에 그것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연꽃이었다. 그는 그 연꽃을 가지고 그 도시에 사는 가장 큰 부잣집으로 갔다. 그 집에 당도할 때쯤 그는 황금마차가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차에는 그 부자가 타고 있었다. 마차에 탄 그 부자는 마하가섭이 들고 있는 연꽃을 보고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수다스에 말했다. "그대는 그 아름다운 연꽃을 나에게 팔지 않겠는가?" 그러자 수다스는 얼마를 불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장자께서는 얼마나 돈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부자가 말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분은 지금 마을 어귀에 있는 망고나무 밑에서 설법을 하고 계신다. 나는 그분의 발아래 이 희귀한 연꽃을 바치고 싶다. 아마 그분은 제철이 아닌 때 핀 이 연꽃을 보고 놀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금화 오백 냥을 주겠다." 수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돈은 상상도 못해 본 액수였던 것이다. 마침 그때 왕이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보고 수다스에게 말했다. "그 부자가 돈을 얼마나 부르더라도 내가 그 네 배를 그대에게 주겠으니 그 연꽃은 그에게 팔지 말라." 수다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금 오백 냥도 어마어마한데 그것의 네 배를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금화 이천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스는 왕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그토록 이 연꽃을 가지고 싶어하십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자는 질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왕보다 더 부자였다. 그래서 부자는 수다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지금 서로 경쟁이 붙었다. 나는 왕이 부르는 금액에 다시 네 배를 주겠다." 그리하여 경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네 배, 네 배, 계속 네 배씩 그 연꽃의 가격은 올라갔다. 수다스는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자 그만 가격을 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왕과 부자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 들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나는 연꽃을 팔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 다 망연자실해졌다. 그리고 둘 다 똑같이 말했다. "뭐가 문제인가? 그대는 더 많은 돈을 원하는가?" 수다스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이 연꽃이 얼마가 값비싼 것인지는 몰라도 두 분께서 서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이 연꽃을 바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르지만 이제 그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서로 이 연꽃을 가지려고 싸우시니 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가 직접 이 연꽃을 그분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분은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그는 무척 가난했지만 엄청난 돈을 거절했다. 수다스는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갔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왕과 부자가 그 이야기를 석가모니 부처에게 먼저 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그 구두장이에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떤 가격에도 그 연꽃을 팔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갖고 있는 모든 보물들을 다 주고서라도 그 연꽃을 사려고 했는데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때 수다스가 석가모니 부처 앞에 와서 절을 하고, 그의 발을 만지면서 연꽃을 바쳤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수다스여, 그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그런 돈을 줄 수가 없다." 그러자 수다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께서 친히 이것을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이 왕국 전체보다 더 큰 것이며, 부자의 모든 보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지만 괜찮습니다. 내 생계는 내가 충분히 꾸려갈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이 몇 백년이고 기억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하는 한 이 수다스 역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친히 받아만 주십시오." 부처는 손으로 연꽃을 받았다. 그때는 아침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아침 설법을 들으려고 모여 있었다. 부처는 단지 연꽃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서 한 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는 연꽃을 들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저 연꽃은 아마도 신통력이 있는 꽃인가 보다. 부처님은 연꽃만 보고 계시지 않은가?" 그때 마하가섭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전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경전에 나와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를 불러서 그 연꽃을 전해 주면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연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향기와 빛을, 나의 침묵을 그대에게 전하노라. 이제 나의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니 이 연꽃은 그것의 상징이다." 이것이 선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마하가섭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거기에 있었고,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꽃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부처님의 발을 만졌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로 되돌아와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경전에는 마하가섭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대들은 나의 스승님께 가서 물어 보라. 그가 살아 계시는 한 나는 어떤 대답도 할 권리가 없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의 시작이다. 내 모든 경험들은 이제부터 말없는 가운데 전해질 것이다. 그것을 전해 받는 사람은 완전히 수용적으로 되어야 한다. 마하가섭은 그의 미소로써 자신의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대들은 왜 그가 웃었는지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그는 한 사람의 부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의 상징으로 그에게 연꽃을 주었다. 나는 그가 깨달았음을 인정한다." 바로 이 사람 마하가섭이 선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마하가섭과 석가모니 부처와의 그런 관계에서부터 선이라는 큰 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달마는 너무나 뛰어나서 거의 선의 창시자처럼 되어 버렸다. 마하가섭 이후로 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해질 수 없는 말을 너무나 정확하게 말했다. 그는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아무것도 전해 받은 것이 없다. 스승은 제자에게 마지막 인정 외에는 그 무엇도 해줄 것이 없다. 제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그대는 단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모든 명상이 바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그대를 인정해 줄 것이다. 또 경에 일렀으되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는 거기에 있다. 거기에는 그대 외에 다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둘러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무심)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예배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부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예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가르침은 매우 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이다.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말이다. 거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잠들어 있는 사람도 곧 깨어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예배하겠는가?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에는 예배나 기도 의식이 들어 있지 않다.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달마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이라도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는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정말 깨어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은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가 '숭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할 때에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은 하나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를 예배할 의무는 그대에게 없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 전체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그대는 부처를 그저 존경하게 된다. 부처는 그대의 미래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그대는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그는 그대의 미래를 생각나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는 그대가 가야 할 목표를 나타내 준다. 그래서 존경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존경에 대한 감정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마하가섭조차도 석가모니 부처의 발을 만졌다. 그것은 무슨 의무 사항이 아니다. 달마조차도 매일 부처 앞에 고개를 숙여 절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니란자나(Niranjana) 강둑의 작은 마을 붓다가야(Bodhgaya)는 중국에서 보면 서쪽이 된다. 달마는 매일 서쪽을 향해 절을 한 것이다. 그는 중국 땅에서 지도를 펴곤 했다. 거기서 인도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숭배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서쪽을 향해 절을 했다. 절을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존경심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리고 그 존경심은 진정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도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진실에서 나온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이 무심은 비어 있으며 어떤 형상도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그대에게 신이나 악마에 대해서 숭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신이나 악마가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신이나 악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은 악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악마 역시 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한 가지 일에 참여하는 동반자이다. 그래서 달마가 '마귀'라는 말을 상용할 때는 단지 그것이 어둠이란 뜻이다. 그것은 어둠에 대한 인격화인 것이다. 악마는 한 개체가 아니며 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어둠이며 신성일 뿐 인간처럼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 살며 어둠의 생명력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에게 무엇하러 예배하겠는가? 그것에 예배하는 자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자신 속에 부처가 들어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사원이나 회당이나 모스크나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어둠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에 예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의 예배이다. 그들은 교회나 사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들은 24시간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예배이다. 그들의 삶은 기도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자비심과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모든 동작 하나 하나가 자신들의 깨달음을 드러낸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말을 명심하라.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무심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무심에 어디 그런 것들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심 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에는 오직 환상뿐이다. 크리슈나를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도 있다. 또 유령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환상을 보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깨비이다. 그것들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무심은 본래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오직 이 한 가지는 기억하라. 그대의 기본적인 본성은 절대적인 침묵이다. 거의 그것은 무(無)와 같은 것이며 하나의 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부처의 본성인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그리고 그 고통과 번민 속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것은 그대를 영원한 축복, 환희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어록은 그대의 오락 시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깨달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단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수백만 번의 삶을 그대는 잠든 채로 살아왔다. 얼마나 더 잠을 자기 원하는가?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다. 사실 그대는 잠을 너무 많이 잤다. 이제 그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의미에서 잠에서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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