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동천산방 현일자님 홈피에서 야후 블로그로 옮겼으나
야후가 철수 하므로 다음과 네이버로 옮겼다
수행기중에는 독특하고 기이한 느낌을 많이 받은 글로 1970년대 포일자님의수행기이다
나의 智異山 靑鶴洞 수행기 --- 1편 --- 포일자
앞으로 쓰려고 하는 글의 내용은
나의 학창 시절의 한 추억이에요.
내가 몇 달 전 하이텔을 처음 할 때에는
무엇을 써서 올린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무심히 이 사람 저 사람들의 글을 읽다보니
나도 한편 올려보자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장난 끼도 들더라구요.
그리고 막상 무엇을 한편 올려볼까 생각했더니,
아 나도 쓸 것은 많이 있더구만요.
시간이 많지 않고 타이핑도 늦어서
한번에 많이 씩은 올리지 못하고 야금야금 올리겠어요.
내가 智異山 靑鶴洞에서 소위 수도를 한답시고
入山했던것은 내 대학 2학년 때였어요.
당시 풍수지리와 동양철학 계의 거두였던
제 은사님이 강의 중에
"금강산에는 자고로 高僧이 많이 나고
지리산에는 자고로 神仙(도인)이 많이 나니
금강산은 佛道를 닦기에 좋고 지리산은 仙道를 닦기에 좋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디 한번 도인을 찾아보자 생각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여름방학때 지리산으로 입산하였지요.
어이구 그런데 큰 고생했어요.
...........................................................................................................................................................................................
....
나의 지리산 靑鶴洞 수련기 -- 2편 --
...............................................................................................................................................................
오늘은 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2편이 되겠군요.
그런데 어느 동호인께서
제 메일을 통하여 궁금하니
빨리 속히 좀 쓰시라는 주문을 보내셨어요.
그런데 이거 뭐 제가 글을 위하여
글만 쓰려고 이 짓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짬짬이 생각 날 때 심심풀이 겸
타이핑 연습할 겸해서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쓰지는 못하거든요.
시간도 많지 않고 타이핑도 느리고 하니 말이죠.
그러니 뜸하게 올리더라도 봐주세요.
그리고 또 한꺼번에 쓰면 밑천이 다 떨어지잖아요.
여하간에 제 글을 읽어준다니 굉장히 고맙군요.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靑鶴洞 이야기가 나오려면
한 10편쯤 가야 될 것 같은데, 이거 어쩌죠?
그렇다고 중간과정들 빼고 글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76학번이니까 77년도 군요.
지리산 신선 내지 도사를 만나려고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배낭에 온갖 살림살이를 다 싸가지고
전라도 구례행 열차에 올라탔지요.
난전에는 등산이나 여행 같은 건 해보지를 않아서
지리산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걸어야되는지
전혀 감도 잡지 않은 채
철모르는 시골처녀 서울구경 가듯이
(뭐 요새는 시골처녀가 따로 없지요.
다들 발랑 까져서..)
서울을 떠나 전라도 구례엘 도착했지요.
거기 여관방 어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구례 화엄사 뒷길로 하여 노고단엘 올라갔지요.
아이고 얼마나 힘드는지...
내 평생 그런 고생하기는 처음이에요.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9킬로미터인데
아주 경사도가 가팔랐어요.
빨리 걷는 사람은 3-4시간이면 올라간다고 합디다만
나는 아침 8시경에 출발해서 오후 5시경에야 겨우 도착했지요.
한 10분 올라가다 20분 쉬고
또 한 10분 정도 올라가다 한 30분 쉬고 하며 갔으니 까요.
(사실 그때 배낭도 온갖 살림 다 들고 와서 무척 무거웠지요)
노고단은 해발 1600미터 정도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雲海가 끝내주더군요.
지리산의 능선은 굉장히 장엄하여
지리산 등산의 묘미는 긴 능선을 종주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神仙이 있다면 한 번 만나
道術이라도 한번 배워 보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리산의 노고단 끝에서부터 한 45키로 쯤 되는 천왕봉까지
산 속을 뒤져보려고 생각하고 노고단을 출발했지요.
(어휴 그놈의 산 어찌나 크고 가도가도 끝도 없던지..
.................................배낭은 무겁고 발은 아프고)
당시에는 여름에도 지금처럼 등산객 없었어요.
또 그때는 여름도 이른 시기였고
혼자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그 크고 큰 산중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지요.
물론 밤에는 텐트를 치고요.
어떤 때는 한 일주일간을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혼자서 산중을 쏘다니며,
깊은 산중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있어도
무서운 생각은 안들더라구요.
(아니 사실은 쪼금 무서운 생각도 들긴 하더군요.
근데 바로 익숙해지다라구요)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상한 분을 만나게 됐어요.
하루는 산중을 헤매다 날이 어두워져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잤는데,
그 다음날 기절초풍하였지요.
아이고 맙소사 텐트를 바로
낭떠러지 벼랑 위에다 친거 아니겠어요.
간담이 서늘하더라구요.
간밤에 바람도 아주 세었었는데 말이에요.
이제 거기서 밥을 지어먹기 위해서
물이 있는 계곡을 향하여 내려왔지요.
아 그런데 내려오다 보니
굴 같은 게 보이잖아요.
그래 다가갔지요.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지리산 반야봉 밑의
금강굴이란 데이었어요.
(*금세기의 걸출한 도인이었던
靑陽 李源善 道士가
여기서 아라한과를 얻었다더군요)
.................................................................
<*註: 현일자 ---
이는 사실과 다르며
1750년대 개운조사가
문경 봉암사 환적암에서 불공삼장을 만나
능엄경과 함께 대승밀법의 도법을 전수받고
도장산 심원사에서 아라한과를 얻은 후에
이곳 지리산 반야봉의 금강굴로
(펌) 포일자님 지리산 청학동 수행기 2
가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청양 선생이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것은
내가 아는 한에는
사실과 다르다고 이해한다.
청양 선생 또한 양성 스님과의 인연으로
개운조사를 흠모하고 산 것은 사실로서
청양선생은 개운스님이 주해를 해놓은
불공삼장의 능엄경을 강의 하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청양선생은
고 양성 스님께서 편찬하신
선불과 진수어록을 강의하였으며
청양선생은 그밖에 금선증론, 혜명경 등
중국 伍柳派의 仙家 서적들을 가지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대중적인 강의를 한 것은
한국의 도학이 저변에 뿌리내리게 한
그 공로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세상에는 양성스님을 필두로 해서
계룡산 신도안에 사시면서 수행을 하시던
白衣도인 이나 김선생 기타 문봉스님을 비롯한
다수의 스님들이 仙佛合宗的인 수련을 하였다.
이들은 대개가
개운스님과 사상적으로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분들로서
당시 사주 명리학의 대가였던
박제산 선생 또한 이들과 교분이 있었다.
이분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는
도인으로 인정되기도 하였지만
이분들이 아라한 과를 얻었다는
확증 할만한 근거가 불분명 하다.
따라서 이분들에 대한
수행의 證果에 대해서는
論外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현일자->
................................................................
저는 그때는 금강굴이란 것은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이지요.
거기 굴 입구 가까이에
한 분이 坐定하고 계셨어요.
옷은 승복 가사 같은데 머리털도 길고
수염도 길고해서 승려 같지는 않고
나이는 한 오십쯤 되어 보이는 것 같고
좌우간 나는 한 보름도 더 되어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니 굉장히 반갑더라구요.
아, 그래서 큰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막하다가 멈칫했지요.
그분이 너무 엄숙하게 앉아있어서요.
그래서 굴 밖으로 살살 나가
그 분이 나오면 인사드리려고 기다렸지요.
아이고 그런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이 양반이 나와야지.
그래 할 수없이 먼저 밥을 지어먹고
다시 몰래 숨을 죽이고
그 굴속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함부로 했으나
이번에는 완전히 고양이 걸음으로
빠끔히 얼굴 먼저 해서 들어가 봤지요.
어이구 그대로 앉아 계시더라구요.
한 4시간도 더 지났는데
그래 어디 보자 생각하고 굴 밖에서 죽쳤지요.
근데 그 당시에 저는 그분이
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들었어요.
뭐 옷도 남루하고 헤지고 얼굴도 꿰째째한 것 같고
그런데 저녁때가 지나도 이 분이 나오지 않고
그대로 앉아만 계신 거였어요.
나는 그제야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거기서 저녁밥을 지어먹고
일단 텐트를 그 굴 부근에 치고
그 날 거기서 잠을 잤지요.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그 굴로 가려다가 멈칫했어요.
만약 그 분이 거기 계속 앉아 있다면
후레쉬 불빛을 비추면 안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잘됐다싶어 날이 밝을 때까지
텐트 속에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지요.
드디어 날이 밝고 아침을 해먹고
한 9시쯤 해서 다시 가봤지요.
아이고 頭야! 그대로더라구요.
(이제 잠을 자야하니 다음에 다시.....)
..................................................................................
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 3편 --
.......................................................................................
오늘은 제 지리산 수행기 3편이 되는군요.
오늘서 좀 시간과 마음이 한가로와 저서요.
그러니까 그때 금강굴에서
그 도인께서 나오시길 기다렸는데도
나오시지 않았어요.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지요.
초면에 산중에서, 그것도 굴속에서
엄숙히 앉아 계시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어요?
더구나 이분이 진짜 도인이나
신선 같은 분이라면
큰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 하루종일
이 분이 수련을 끝내시고
나오시기를 기다렸지만
이분은 끝내 나오시지 않았죠.
그래서 나는 저녁 무렵쯤 해서
다시 굴 입구로 다가가 보았어요.
혹시 내가 점심 지어먹고 있을 때나
혹은 제가 잠시 소변보러 저 만치쯤 갔었을 때
혹시 굴밖으로 나가셨나해서요.
(어이구 頭야)
그대로 앉아 계신 거였어요.
내가 여기 온 후로부터 따져도
하루 반은 훨씬 넘었는데 말에요.
나는 혹시 그 분이 죽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가
이내 그 생각을 떨쳐버리게 했지요.
나는 그제서야 이분이 틀림없이 무슨 도사이거나
신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드디어 신선 도사를 만나게 됐다는 생각에
너무나 좋아 아주 흥분이 됐었죠.
속으로 "이제 됐다" 생각하고
그 분이 굴 밖으로 나오면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펌) 포일자님 지리산 청학동 수행기 2
2009년10월03일 오후 7시43분모두조회수 0 1
가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청양 선생이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것은
내가 아는 한에는
사실과 다르다고 이해한다.
청양 선생 또한 양성 스님과의 인연으로
개운조사를 흠모하고 산 것은 사실로서
청양선생은 개운스님이 주해를 해놓은
불공삼장의 능엄경을 강의 하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청양선생은
고 양성 스님께서 편찬하신
선불과 진수어록을 강의하였으며
청양선생은 그밖에 금선증론, 혜명경 등
중국 伍柳派의 仙家 서적들을 가지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대중적인 강의를 한 것은
한국의 도학이 저변에 뿌리내리게 한
그 공로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세상에는 양성스님을 필두로 해서
계룡산 신도안에 사시면서 수행을 하시던
白衣도인 이나 김선생 기타 문봉스님을 비롯한
다수의 스님들이 仙佛合宗的인 수련을 하였다.
이들은 대개가
개운스님과 사상적으로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분들로서
당시 사주 명리학의 대가였던
박제산 선생 또한 이들과 교분이 있었다.
이분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는
도인으로 인정되기도 하였지만
이분들이 아라한 과를 얻었다는
확증 할만한 근거가 불분명 하다.
따라서 이분들에 대한
수행의 證果에 대해서는
論外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현일자->
................................................................
저는 그때는 금강굴이란 것은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이지요.
거기 굴 입구 가까이에
한 분이 坐定하고 계셨어요.
옷은 승복 가사 같은데 머리털도 길고
수염도 길고해서 승려 같지는 않고
나이는 한 오십쯤 되어 보이는 것 같고
좌우간 나는 한 보름도 더 되어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니 굉장히 반갑더라구요.
아, 그래서 큰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막하다가 멈칫했지요.
그분이 너무 엄숙하게 앉아있어서요.
그래서 굴 밖으로 살살 나가
그 분이 나오면 인사드리려고 기다렸지요.
아이고 그런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이 양반이 나와야지.
그래 할 수없이 먼저 밥을 지어먹고
다시 몰래 숨을 죽이고
그 굴속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함부로 했으나
이번에는 완전히 고양이 걸음으로
빠끔히 얼굴 먼저 해서 들어가 봤지요.
어이구 그대로 앉아 계시더라구요.
한 4시간도 더 지났는데
그래 어디 보자 생각하고 굴 밖에서 죽쳤지요.
근데 그 당시에 저는 그분이
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들었어요.
뭐 옷도 남루하고 헤지고 얼굴도 꿰째째한 것 같고
그런데 저녁때가 지나도 이 분이 나오지 않고
그대로 앉아만 계신 거였어요.
나는 그제야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거기서 저녁밥을 지어먹고
일단 텐트를 그 굴 부근에 치고
그 날 거기서 잠을 잤지요.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그 굴로 가려다가 멈칫했어요.
만약 그 분이 거기 계속 앉아 있다면
후레쉬 불빛을 비추면 안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잘됐다싶어 날이 밝을 때까지
텐트 속에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지요.
드디어 날이 밝고 아침을 해먹고
한 9시쯤 해서 다시 가봤지요.
아이고 頭야! 그대로더라구요.
(이제 잠을 자야하니 다음에 다시.....)
..................................................................................
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 3편 --
.......................................................................................
오늘은 제 지리산 수행기 3편이 되는군요.
오늘서 좀 시간과 마음이 한가로와 저서요.
그러니까 그때 금강굴에서
그 도인께서 나오시길 기다렸는데도
나오시지 않았어요.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지요.
초면에 산중에서, 그것도 굴속에서
엄숙히 앉아 계시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어요?
더구나 이분이 진짜 도인이나
신선 같은 분이라면
큰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 하루종일
이 분이 수련을 끝내시고
나오시기를 기다렸지만
이분은 끝내 나오시지 않았죠.
그래서 나는 저녁 무렵쯤 해서
다시 굴 입구로 다가가 보았어요.
혹시 내가 점심 지어먹고 있을 때나
혹은 제가 잠시 소변보러 저 만치쯤 갔었을 때
혹시 굴밖으로 나가셨나해서요.
(어이구 頭야)
그대로 앉아 계신 거였어요.
내가 여기 온 후로부터 따져도
하루 반은 훨씬 넘었는데 말에요.
나는 혹시 그 분이 죽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가
이내 그 생각을 떨쳐버리게 했지요.
나는 그제서야 이분이 틀림없이 무슨 도사이거나
신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혹시라도 그 분이 수행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텐트를 좀 멀찌감치 다시 치고는 거기서 죽쳤지요.
다시 하룻밤을 잤어요.
다음날은 일어나서
새벽같이 거기에 가지는 않았어요.
석유버너에 아침 해먹고
해가 충분히 올라온 다음에
다시 굴로 가보았지요.
그러나 계속 그대로
조금도 위치와 자세가
변하지 않고 앉아 계시더라구요.
나는 살살 후퇴하여
다시 텐트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점심 해 먹고
또 저녁 지어먹고
저녁때는 가보지 않았어요.
내가 계속 굴을 향하여 앉아
혼자서 책도 보고 놀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몇 번 소변보러 간 사이에
그분이 없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날 저녁도 그대로 지나가 버렸지요.
또 하룻밤 자고 난 다음날 한 10시쯤이 지나서
굴로 가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앉아 계셨어요.
아. 그거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아예 일단 그 분을 면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텐트 친 자리에서 이번 여름방학 죽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래 한 3일째부터인가는 나 혼자서 책도 읽고
남? 뭐라는 사람이 쓴 무슨 달마 역근경,
내공법이라든가 하는 책을 보며 연습도 해보고,
당시 시중에 유행하던 무슨 청산거산가 하는 사람이 쓴
밝돌법인지 단전호홉인지를 해보기도 했지요.
달마 내공이란 것은
배에 숨을 한가득 터질 정도로 집어넣고
배에 꽉 하니 힘을 준 다음 숨을 참고
강하게 자기 배를 두 손으로 강타하는 것인데
정말 무식하더구만요.
(*내가 이 짓을 많이 했더니만
나중에는 기절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더구만요.
재미 삼아 기절하고 싶으면
방에서 이불을 두텁게 깔아놓고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
단전에 힘을 '욱'하니 준 다음 숨을 참고
두 주먹으로 한 일백 번이나 이백 번쯤 두드리고
숨을 내쉴 때 힘을 빼면서 상체를 이완시키면
즉시 기절이 되더구만요.
깨어보면 내가 이불 위에 누워있는 거에요.
근데 이거 나처럼 하면 진짜 몸 망치는 거예요.
내가 차력을 한답시고 이 짓을 중학교 때부터 했던 건데,
모르건대 속으로 엄청 골병들었을 거예요.
{인산 김일훈 옹 말대로 호흡을 그만큼 멈추었으니
피가 돌지 않고 그만큼 썩었을 거예요}
대신 그 짓을 많이 했더니만
내 고등학교 때 태권도 5단이라는 사람이
내 배와 몸을 강타해도 끄떡은 없더군요.
야구방망이로 쳐도 끄떡은 없고
오히려 방망이가 튀어나가더군요.
근데 이거 골병드는 거예요.)
아 이거 얘기가 딴 데로 샜네...
아 그렇게 이 짓 저 짓하면서
어쩌다 계속 그 분이 계신가 가보고 하는 식으로 하여서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한 열흘이 흘러버렸어요.
어이구 근데 우습게도
큰 문제가 생겼어요.
뭐냐고요?
아이쿠 쌀이 다 떨어져버렸잖아요.
뭐 반찬이야 고추장하고 멸치하고 미역 정도밖에 없었지만
신경 쓸건 없고 근데 쌀이 없으면 안되잖아요.
입산할 때 쌀은 한 보름치 정도밖에 가져오지 못했거든요.
무거워서이지요.
그러잖아도 그 온갖 살림살이 다 넣은 배낭 짊어지고
산을 헤메이는 건 엄청 고역이더군요.
그래 할 수 없이 저기 등산로로 나가
등산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요.
한참을 기다려야 등산객
한 팀이 지나가곤 하였지요.
등산객이 지나가면 나는
"죄송하지만 쌀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먹을 것 좀 있으면 파십시오?"했지요
어떤 때는 지나던 등산객이
놀래서 기겁을 하기도 했고요.
보름이 넘게 면도를 안 했기 때문이어서
얼굴도 텁수룩한데다 어떤 때는 안개가 가득 끼어서
앞을 분간하기도 힘든 상태의 인적도 없던 산중에서
갑자기 괴한이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나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니 안 놀고 배기겠어요?
산에서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해져서인지
대부분 통조림 하나라도 놓고 가더군요.
물론 돈을 줘도 안 받지요.
(*근데 이것은 내 경험인데,
정말 쐬빠지게 낑낑대며
그놈의 지리산을 오르내릴락 할라치면
진짜 배낭이고 신발이고 식량이고 무거워서
다 내버리고 싶더구만.
나한테 쌀을 준 등산객들도 ,
자기들 짐이 그만큼 가벼워지니까 일단은 좋아했을걸..)
이런 식으로 지내기를 한 열흘쯤 지났을까?
내가 이 장소로 온지 한 이십 여일 만에
그 분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어요.
하루는 근처 나무 그늘 아래서
멍청하게(명하니) 앉아 있다가
우연히 고개를 든 것 같았는데,
아! 아니! 바로 그 분이 거기 서 계시던 거에요!
나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어나
"안녕하시온지요?" 하고
인사를 하며 그 분을 바라보았어요.
옷은 남루하고 키는 자그마하시고
머리칼과 수염이 길고 얼굴은
좀 거무튀튀하고 몸집은 보통이신 데
옛날 사람 같기도 하고
현대인 같기도 한 기분이 순간 들더군요.
나는 인사를 하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는데,
아니 그 분도 허리를 조금 굽혀 답례를 해 주시더라고요.
그 분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시고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서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시는 것 같았어요.
아,! 그 순간 ,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어요
허공에 누런 황금색의 글자 같은 게 출현했어요!
***지리산 청학동 수행기 예정 목차
....................................................................................................................................................................
아이고,
이거 후속 편들을 못 올려서 죄송합니다.
변변찮은 글이나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고,
독촉까지 받으니 제 게으름에 대하여
좀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허나, 공부는 비록 실패했지만,
지리산, 청량산, 금지산, 계룡산,
속리산, 청화산, 도장산 등에서
神仙 처럼 高高히 지내던 제가,
이 사바세계에 내려와 장사해 먹고산답시고,
청계천 바닥에서 영업하랴 납품하랴 수금하랴
경리하랴 뛰어다니고 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게다가 타자 속도는 거북이 걸음만큼이나 느리지..
근데 거 이상한 것은,
참,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 깊고 깊은 산중에서
티없이 맑은 물과 공기 속에서
무공해로 지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공기 나쁜
이 청계천 바닥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됐는지 원...
그래서 앞으로 제가 써 내려갈
목차와 내용을 간략히 올릴게요.
1. 일중 선생과의 헤어짐
2. 재 입산하여 지리산에서 수련
3. 김 노인과 유 노인과의 만남-->
연희전문대학 수물과를 나왔다는 김 노인의 괴력과
도선 국사 친서 비기 중의 청학동에 같이 들어감.
통나무집을 짓고 황정경을 암송하며 정좌 수행을 함.
4. 道를 통한 것으로 착각함-->
격물투시, 예지력, 천안통 등
끝없는 힘을 얻고 몸이 변화함
5. 智異山 雪峰의 홍여인-->
이건 뭐 산중의 낭만이라 해야하나, 연애라 말해야하나.
숙명여대를 나왔다는 홍 여인은 남자친구와의 이별 뒤
여승이 되려고 지리산에 들어왔다가
한 할머니를 만나 비결을 얻어
영하 2,30 도의 엄동설한에
지리산 상봉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홍여인을 만났는데,
어떻게 하다가 그녀와 절벽 위 은밀한 곳에서
서로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서
그녀의 손을 만져보게 되었다.
6. 마천면 실덕에 산다는,
약초 캐러 왔다는 구릿빛 얼굴의 妖女와 慾情의 폭발-->
나는 여기서 人生을 ... (비속어로) 조짐.
7. 廢人이 됨 -->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은 물론이고 폐인이 됨
8. 죽으려고 다시 지리산에 입산
9. 천우신조로 一中 선생을 다시 뵘-->
一中 선생의 응급비법과 산중에서 용광로를 설치하여
구리(銅)를 제련하여 복용하고
도롱용 삼 백 육십 마리를 잡아먹고 몸이 회복됨.
10. 계룡산 연천봉의 일중 선생과 三火放光 -->
一中 선생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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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靑鶴洞 수련기 -- 4편 --
그분이 허공에 대고 무엇인가 쓰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 순간 황금색의 굵은 글씨가 허공에 나타났어요.
나는 처음에 깜짝 놀래서 어리둥절하다가
장신을 좀 가다듬어 바라보니
바로 한자로 '一'과 '中'이란 글씨였어요.
그분하고의 거리가 한 6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글씨는 바로 그분의 1미터쯤 인가에서 세로로 펼쳐졌었지요.
글씨는 어디 절간이나 건축물 같은데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것으로
굵은 붓으로 쓴 것 같은 형상이었어요.
글자 하나가 가로 세로 한 30센티미터 정도였고요.
그 一'과 '中'이라는 글자는
신비스런 누런 황금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듯 했어요.
생전 이런 현상을 처음 당해본 나는 몹시 놀라고 두려웠어요.
땅바닥에서 일어나다가 당한 상황이라
허리를 엉거주춤 구부린 채
휘둥그런 눈으로 허공에 매달린
글체의 광선에 눈이 팔렸는데,
순간 그 분이 눈앞에서 사라지셨어요.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당시 너무도 놀랐지요.
잠시 후 쿵쿵거리는 가슴으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바라보았는데,
위로부터 '一 中'의 글자였어요.
잠시후 한 30초쯤 흘렀을까
나는 용기를 내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허공에 매달려 빛나고 있던
그 '一 中'의 글자로 다가갔어요.
바로 1미터 정도 앞까지 전진했지요.
흡사 '一'과 '中'자를 목각하여 금칠을 한데에
속에다 형광등을 넣어 빛나고 있는 것과 흡사했어요.
약간 다르다면 형광등처럼
그렇게 요란하게 밝은 게 아니라
은은한 황금 광채가 비치는 점뿐이었어요.
나는 취한 듯 바로 앞에서 '一' '中'자를 觀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뻗어 글체를 만져보았어요.
아, 그런데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어요.
나는 더욱 괴이히 여겨 손을 휘저어 글체를 만져보려 했으나,
허공 중에서 떠있던 글체는 잡히지 않았어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너무나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그 글체를 손으로 휘저을 때
내 손바닥이 그 글체의 바깥쪽을 휘저었는데도
손이 비쳐 보이더군요.
마치 그 글체가 투명하게
허공에 매달려 금빛 광채만을
내뿜듯이 말이에요.
나는 그때 정신팔린 사람 마냥 그 글체를 바라보며,
한 삼분쯤 흘렀을까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랐는지
그 글체의 뒤편으로 가서 글체를 바라다보았는데,
아니 이런 그 글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어요.
나는 다시 재빠른 동작으로
그 글체가 있던 앞쪽으로 후닥닥 몸을 이동하니
다시 그 글체가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제야 마음에 뭔가 느껴져
그 글체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였어요.
절을 두 번을 하고 다시 글체를 올려다봤을 때
그 황금색의 글체는 서서히 빛이 감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어요.
사라진 시간은 한 십여초 정도 된 것 같고,
그 도인이 허공에 글자를 만든 후로부터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한 5분 정도 걸린 것 같았어요.
나는 허공에 매달린 글씨에 정신이 팔려
그 도인이 없어진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요.
글체가 사라진 후에야
아, 이분이 어디 갔나 하고 생각했지요.
한참동안이나 흥분에 들떠 제정신이 아니던 나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있으면서
글체가 있던 곳을 향하여 절을 몇 번이나 하면서
혼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괴성을 지르고 좋아 어쩔 줄 몰라했어요.
드디어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神仙님을 만나게 됐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분을 스승 삼아
神仙工夫를 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그 神仙께서는 오시지 않았지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하는 수 없이
밥을 지어먹고 잠을 청했지요.
물론 잠이 올 리 없었지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한 나는
다음날도 그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거기서 그 神仙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으나
그분은 그 날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나는 식량이 떨어지면 등산로 상에
나아가 등산객들로부터
약간의 쌀과 부식을 얻는 식으로
거기서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말까지 죽쳤지요.
도저히 난생처음 기적을 경험한
그 장소에서 이동할 수 없더군요.
개학이 다가와 할 수 없이 하산을 하였지만,
그 날 이후로 그 道人과 '一中' 의 글체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지요.
그리고 그 도인인가 신선 님을
'一中 道人'이라 암암리에 부르며 되뇌었지요.
(*나는 이후 수년간을 지리산을 무시로 출입하면서
김 노인이라는 분을 만나
그 분 밑에서 제법 공부를 하다가,
그 이후 큰 병을 얻어서 지리산에서 죽음을 맞으려고
다시 입산을 하였다가 天佑神助로
다시 一中道人을 뵙게되었지요)
나는 개학을 하자마자 내 지도교수를 찾아가
산중에서 겪었던 사건들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고했지요.
교수님은 감개무량하면서 자신이 함양(경상남도)의 산중에서
어느 道僧의 도움으로 風水地理에 神通開眼하게된 전말과
四柱 大家 이 석영의 자신에 대한 예견 등을 말하면서
나에게 청양 이원선 道士를 만나 보라 하더군요.
다음편 예고 : 저는 이후로 지리산에 미친놈이 되었는데,
(그 즐거운 봄 신촌 백양로의 축제기간에도 며칠의 여유만 나면
무엇에 홀린 놈처럼 보따리 싸들고 구례 행 열차에 몸을 실었죠.
아, 그래서 미팅한번 못했다는 거 아닙니까? 억울하게... )
혼자 수련한답시고 지리산에서
한 보름을 단식하다 은어 회와 막걸리를 먹고
그 맑고 푸른 섬진 강변을 향하여
열차 난간에 매달려 토해 내던 일
그리고 김 노인을 만나
智異山 靈神峰 靈神臺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던 얘기를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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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 5편 --
***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 5편 --
5. 李源善 선생과의 조우
대학의 학부에서야 지도 교수 제라는 것이 없지만
배 교수님과는 막역하게 친했으므로
그냥 나의 지도교수라고 스스로 부른다.
靑陽 도사와 배 교수님과는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배 교수의 고향은 함양이고 청양 도사는 산청이었는데,
함양이나 산청이나 다 지리산 옆 동네다.
청양 도사는 공부의 경지가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는데
배 교수가 나에게 청양 도사를 추천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청양 도사가 바로 지리산에서 수도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靑陽道士를 봉천동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청양은 거기서 일반 대중 혹은 승려 등을 대상으로
金剛經, 법화경, 혜명경, 금선증론,
선불합종, 天仙正理, 능엄경 등의
불경과 도경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청양 도사의 외모는 좀 기괴하였다.
한쪽 눈은 찌그러지고 얼굴은
장난 끼가 그득한 양반이었다.
소위 나라의 내로라 하는 큰스님들도
청양의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는 청양이 능엄경을 들어서
승려들의 공부의 허구를 맹렬히 통박했기 때문이었다.
청양 앞에서 소위 큰스님들이라는 분들의 공부 수준이
빤히 드러났기 때문에 꼼짝을 못하였다.
지금이야 각종의 선도 경전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당시에는 (1977년도) 정통의 선도 경전은
한 권도 번역된 것이 없었다.
요즘 많은 훌륭한 지사들이
주옥같은 丹經들을 많이 번역해내고 있는데,
그래도 이 당시 청양 같은
이들이 그 씨앗을 뿌린 결과이리라.
*청양은 본디 승려였다.
청양은 만년에 지리산 七佛庵의
신도회장을 하면서 소일하였는데
항상 한국불교의 話頭禪이 부처님의
본래 공부법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다니며
참선 공부한다는 승려들의 껍질을 벗기고 다녔기 때문에
승려들이 청양을 멀리하고 두려워 하였다.
청양의 불경과 도장경의 강의는
그가 직접 체험한 경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학인들의 질문에 막히는 바가 절대 없었다.
특이한 것은 청양이 본래 중이었는데도
도장경을 불경 못지 않게 숭상하고
단군 황조의 영정을 집안에 모시고 있는 점이다.
나는 당시까지만 해도 단군설에 대하여
전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상히 여겨 질문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어찌하여 불상도 아니고
단군상을 걸어놓으셨는지요?"
"대황조로 부터 공부가 유래되었으니...
인류의 대 스승이라.
佛祖의 공부도
이 백산의 황궁호법이 건내 준 것이니
어찌 始源을 숭상치 않겠는가?
단기가 4천 몇 년이라는데,
그건 틀리네 일 만년은 족히 되지"
나는 청양선생과 친숙해진 후에
내가 지리산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청양선생은
시종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분이 혹시 누구 신지
아느냐고 청양 선생에게 물었다.
청양 선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분이 지리산파의 방주이신
金陽 선생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지리산파가 무어냐고
청양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청양은 우리 나라에 있는
여러 공부의 집단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분은 바로 청양 선생의 사부인
삼부 도인의 사숙 뻘이라고 말하였다.
金陽선생의 경지는 老. 佛과 다름없는 분인데
산중에서 그분을 만나 '一中'의 현시를 받은 것만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하였다.
나는 청양선생에게 순수하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무슨 무슨 파를 나누냐고 물어보았고,
나중에 金陽선생께서 나에게 현시한
'一 中'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청양 선생은 웃으면서,
"一 이란 萬有千無의 근원이니
모든 있는 것, 없는 것, 되는 것,
아니 되는 것들의 근본자리네.
그것은 분명한 자리이나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으니 '一'이라 하네.
모든 문자가 한 一의 변형으로 이루어지듯이.
그것은 無極 과 太極의 근본이요
'中'이란 그 一의 자리이니,
만물의 모습이고, 공부하는 모양이네.
大宇宙의 中과 소우주의 中과
작게는 太陽행성계의 中과
지구의 中과 인간의 中이
그 '하나'로써 관통되고 있으니
一로써 中을 꿰뚫으면 나로부터
저 멀리 天地의 바깥에까지
통하지 않는 바가 없으리니
이를 道通이라 하지.
金陽子께서 자네에게 一中을 보이신 것은
공부의 법을 나타내 보이신 거지"
나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멍히 있다가(뭔가 알아들은 척 하면서)
"예, 그렇군요.
그러면 그 一中을 體現하는
구체적 공부방법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하고 질문하였다.
청양 선생은 공부법이란
그 사람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편적 방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나무상자 안에서
오래된 한문경전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게 공부하는 법이야"하였다.
그 그림을 보니
한사람이 정좌한 모습인데
머리와 등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공부란 똑바로 앉아서 허리를 쭉 펴고 머리를 똑바로 하여
정수리로부터 회음까지 수직이 되도록 정좌하고 하는 것으로
고정관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청양 선생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자 청양n 선생은,
"바로 이것이 부처와 단군 황조께서 공부하시던 모습이네,
靜坐를 하고 손을 배꼽 밑에서 가지런히 포개고 등과 머리를 숙여
배꼽 밑 생명의 根源處를 心眼과 肉眼으로 동시에 觀하는 것이지,
그리고 呼吸을 조작하지 말어.
자연히 돌아가게 내버려두어.
自然 閉氣 胎息이 돼지.
孟子에 勿忘勿助長이라하고
호흡은 집착하여 잡으면 놓치고
또 놓아서 잊어 버려도 안돼.
이게 입문하는 법이네.
지금 중들 참선한다고 뻣뻣하게 앉아서
저기 멀리 1~2미터 앞을 주시하고있는데,
그거 100년 가도 안돼. "
나는 청양 선생댁에 수차 출입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제자들은 청양 선생이 자기들한테는 불 퉁명한데
손님인 나에게 이야기를 잘해준다고 좀 질시를 하였다.
이건 좀 내자랑 같은 이야긴데
(뭐, 자랑이랄 것도 없지 현재 이 모양 이 꼴인걸 ...),
한 번은 그 제자들과 내가 둘러앉은 자리에서,
청양선생이 한 사람 한 사람 양미간을 觀하면서
'너는 안되겠다.' '음 너는 내생에나 되겠다'
'너도 안되겠다' 이런 식으로
한사람 한사람씩 둘러보다가
나를 보고는 '음 張君은 공부 잘하겠네' 하더군.
나는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뻤지만,
'아마 손님 입장이니까 체면상
그렇게 말을 했나보다'하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청양 선생은 괴짜였다.
내가 청양 선생의 신통력을
처음 본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강원도 오대산에서 수도한다는 어떤 스님이
자기 스승의 사리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사리는 직경 5미리 정도의
오색 영롱한 원형이었다.
청양선생은 그것을 손으로 집어 들여다 보더니
'음 ~ 진사리로군.
선사께서는 지극한 도인이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서 한 삼 십 분이 지나도록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도저히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분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던 터라
나는 마음을 크게 먹고 질문하였다.
"사리라는 것은 수도의 결정체라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진짜 사리가 있고 가짜 사리가 있습니까?" 하니,
청양 선생은 "그럼, 眞사리와 假사리가 있지.
사리가 나왔다고 다 道人이 아니네.
가사리는 一心으로 몰두하면 자연 생성되지.
도둑질에 평생 몰두하면 몸 안에 賊사리가 생기고,
평생 色情을 밝히면 色사리가 생성되지.
수도한 진 사리는 관해 보면
그 안에 그 주인공의 평시 정좌한 상이 박혀있네."
하면서 사리를 집어 나에게 들여다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사리를 받아
정신을 집중해서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하고
꺼벙하게 대답하자 두 분이 껄껄 웃는다.
청양선생은
"내가 보이게 해주지, 잘 보게"하면서
다시 사리를 집어 내 눈앞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상태에서
사리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 같으면서
그 안에 사람이 정좌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예! 보입니다. 보여요." 하고 소리친 일이 있다.
나는 청양 선생과 칠갑산 보광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청양 선생은 바로 그 암자가 자신이 천 팔백 년 전에
수도한 자리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사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光反照를 한다고 해도 어찌 천팔백년 전이나...
前前生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청양선생은 후에 경남 하동 위쪽한
경치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리산 자락
끄트머리의 岳陽洞에 은거를 하였다.
하여간 나는 청양선생과는 인연이 없었나보다.
나는 청양선생이 하도 괴짜라서
그 당시에는 그리 크게 신임하지 않았는데
후에 우리 나라 단학계의 高手에게서
청양 선생이 道가 아주 높으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대단한 道人들이
無名으로 평생을 지내다가 돌아가는 일이 많다.
무슨 메스콤이나 타든지 신통력이나 보여야지
세상에 이름이 나니, 참으로
도인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여하간에 내가 '一中'의 혜택을
확실하게 본 것은 딱 한 번이다.
존경하던 배교수님이 정년퇴직을 한 관계로
동양철학으로 유명하던 타대학 석사과정시험을 치렀는데,
시험 문제가 "周子의 誠神機論에 대하여"였는데,
문제를 처음 대했을 때 어려워서 머릿속이 깜깜 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一中이 떠올라서 誠神機를
一과 中으로 요리하여 써냈더니 수석합격이란다.
타대학 출신들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一中設에 대하여 채점교수들이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래서 일년간 학비를 면제받았다.
평상시 일과 중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물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었을 것은 뻔하다.
(*이구 손가락이야. 내일 6편으로
'지리산 겨울 산행의 구사일생'을 올릴게요.
그것도 장장 6시간에 걸쳐 거의 타이핑을 치긴 했는데,
조끔 더 남았거든요.
지금 손가락이 마비 됐어요.
타이핑을 자주 해야 실력이 늘텐데
잊을 만 하면 치니, 원!)
.....................................................................................
***나의 智里山 청학동 수련기 -- 6편 --
(어휴 이제야 키보드 앞에 앉아보네.
어디까지 타이핑했더라.
아 그렇지 靑陽先生.
그러니까 내가 청양 같은 도인을 보고도
그에게서 도를 구하지 않음은
당시 나의 뿌리깊은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나의 생각은 도인과 신선 등은 깊고 깊은 산중에서
이슬과 안개 같은 天氣를 마시면서 사는 것이지,
뭘 먹더라도 최소한 솔잎 같은 거나 먹어야지,
세간에서 보통사람들처럼 밥 먹고 오줌 똥 싸고 하면서
평범하게 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지리산에서
金陽子를 뵈면서 굳어져 버렸다.
그러하니 이러한 나에게 세간에서
평범하게 살고있던 청양 선생이
대단하게 비칠 리 없었다.
나의 이러한 착각이 없어진 것은
그 후 오랜 기간이 지나서였다.
오히려 대 도인들이 세간 시중에서
절륜의 혜광과 도덕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아이쿠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청양이나 금양 선생이나 배 교수님이나
다 실명을 숨기고 가명으로 하려했는데,
이거 글을 쓰다보니 다 튀어나와 버리네.
이왕 내친 김이니 다 까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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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리산 겨울산행의 구사일생
77년도 가을은 청양 선생댁을 방문하며 지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당장 배낭을 챙겨
구례행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야간 열차를 타는 이유는
그래야 아침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하게되면 저녁에 도착하게 되므로
필경 구례의 여관방 같은데서 묵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리산 등반을 한 오십 번도 넘게 하였었는데
등산 코스는 거의 일정하게 화개 위
하동 쌍계사 방면의 코스였다.
물론 지리산을 오르는 수십 개의 코스가 있다.
노고단 뱀사골 피아골 벽소령 칠선 계곡
한신 계곡 중산리 법계사코스 백무동계곡 등등
그 속에 춘하추동으로 온갖 비경과 절경을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의 등반코스들은
생각만 해도 각각이 다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런데 내가 지리산 등반에서 한 7,8할 정도는
쌍계사 방향을 타게 된 데는 화엄사코스로 등산을 하다가
낙반하여 발목을 삐게 됨으로서 인연이 되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쌍계 계곡 위의 의신리 대성리 산골 마을과 인연이 닿게됐고
또 그로 말미암아 세석평전의 산장에서 산장지기를 하던 중
김노인을 만나서靈神峰 靈神臺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때가 77년도 12월 말경이었는데,
새벽에 구례 역에서 내린 나는
근처의 국밥 집에서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한 후에 버스를 타고 화엄사에 도착하였다.
노고단을 향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상당히 안 좋았다.
바람도 몹시 강하게 불고 추웠다.
물론 등산객은 전혀 없었다.
나는 온갖 살림 들어있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가파른 길을 외롭게 올라가는데,
한시간 정도 올라갔을까,
매서운 눈보라는 들이치지 짐은 무겁지
앞은 잘 안보이지, 죽겠더구만!
아이쿠 그러다가 바람에
몸이 날려 실족해서 다리를 뼜다.
갈 길은 멀고 발목이 아파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하산을 하는데 발목이 어찌나 아픈지
올라갈 때보다도 내려갈 때가 더 괴롭더군.
겨우 겨우 내려와 구례의 여관방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자꾸 마음속에 지리산이 그리워져서 여관방에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왕 발목을 치료하고 요양할 바에야
지리산 밑의 산속 마을에서 민박이나 하며
쉬자 생각하여 우연히 지도를 보다가,
산골 버스를 타고 쌍계사 쪽의
의신리 마을의 민가에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 보름인가를 요양하였다.
발목이 다 나아 배낭을 챙겨 산을 오르려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이런 엄동설한에 산에 오르다가
필경 얼어죽는다고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그런다고 나의 결연한 용기가 꺽일리 없었다.
목숨을 걸고 구도를 하여야 산신이 도와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금양 선생이 지리산에 계시지 않는가?
동네 사람들이 산에 미쳤다고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한 두어 시간 정도 열심히 산을 타고 있었는데,
이건 정말 으악 바람은 실로 뼈를 깎아내는 듯이
매섭고 도저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기가 힘든데,
발목 정도에 차던 눈은 계곡을 오르면서
점차 무릎까지 차는 것이었다.
그러치 않아도 느린 걸음은
더욱 속도가 더디어져 굼벵이 걸음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걸었는데
걷다보니 방향을 잃어버렸다.
암만 가도 이정표는 없고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눈보라 몰아치는 깊은 산중에서
홀로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자 몹시 당황되었다.
지금쯤 대성리 마을이 나타나야되는데 이상하였다.
제대로 왔다면 두 가구만이 살고 있는
대성리를 통과해야하는데. 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무릎과 허리에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이리도 가보고 저쪽 능성이도 올라가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백설보다 하얀 눈으로 둘러싸인 백색천지였다.
그때 길을 헤매며 찾느라고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정말 천하의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나는 본래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자연의 경관을 아주 즐기기 좋아했으므로
그 생사의 와중에서도 그만한 감상의 여유는 있었다.
인간은 커녕 미물도 자취를 감춘 나홀로 상태에서
온 천지가 백색으로 뒤덮인 산맥 봉우리
계곡 설화들을 조망하는 감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계속 길을 헤매자
배는 고프던 것이 갑자기 허기가 지고,
춥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순간적으로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팍팍 스쳐가더구만.
밑으로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구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실수였다.
관악산이나 북한산 같은 작은 산에서는
길을 잃어도 무조건 내려가기만 하면
한 두시간 안에 하산할 수 있지만,
지리산 같이
몇 번이나 산 넘고 골 넘어야 하는 곳은,
내려간다는 것이 오히려 더 깊고 먼
골짜기로 빠져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더욱 길을 잘못 들여놓고 말았다.
여기서 한 다섯 시간 정도를 헤맸는데,
하도 배가 고프고 지쳐 다리가 후들거려
배낭을 내리고 추위에
얼은 손으로 라면을 꺼내서 씹어먹으며
이대로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되뇌었다.
물을 마시려고 물통을 꺼내니,
젠장 물이 얼어버렸다.
할 수 없었다.
라면만 두 개 더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배낭을 내던져 버렸다.
여간해서 내가 뭘 버리거나 하는
성미가 아니지만 별 도리 없었다.
눈이 허벅지까지 차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배꼽 위 허리까지 차는데
배낭은 몸을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배낭도 자빠지고 하는데는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가파른 산 눈위에 자빠져 구르면
배낭 때문에 오히려 덜 구르기도 하고
또 눈 속의 뾰족한 물체로부터도 보호가 되었다.
배낭을 집어던지고는
아래쪽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나아갔다.
몇 시간이나 내려갔을까. 몸이 마비되고
다리에 힘이 빠져 몇 걸음 가다 자빠지고
또 몇 걸음 가다 자빠지고 하는데,
자꾸만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과
어머님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였다.
기운이 탈진돼 나무 등걸 옆에
한 십여 분간인가 쓰러져 있다가
어머님께 보내는 유서라도 써야지
하는 생각을 희미하게 한 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뜩 났다. 정신을 집중했다.
어이구, 하느님!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아!
살았다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더군.
개 짖는 소리를 들으니 힘이 갑자기 생기더군
.
아니,
그런데 개 짖는 소리는
아래쪽 방향이 아니라
좀 위쪽 방향이네.
아이구야~ ~ ~
아래쪽으로는 내려갈 기운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위쪽으로 올라갈 힘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살려면 할 수 없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하여 눈보라를 헤치며
수없이 눈 위에서 구르며 기어서 산등성이를 넘었다.
요 등성이만 넘으면
될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또 등성이 넘어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개 짓는 소리도 더욱 크게 들렸다.
필사적으로 또 등성이를 기어오르니,
아 ~ 드디어 마을이 보였다.
마을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참 이상하게도 그 당시 기억 중에
지금도 생생한 것이 바로 이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
얼어붙은 뺨의 뜨거운 감각이다.
여기가 바로 민가 두 채의 대성리였다.
나는 이번 겨울 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여기의 대성 부락에서 지냈다.
그리고 여기서 이 골짜기 안의 산둥 어딘가에
도인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마을 노인으로부터 듣고
내년에 여기에 다시 와서 도인을 찾아뵈리라 마음을 먹었다.
(*다음 편은 지리산 세석평전의 황홀한 철쭉 속에서
김노인을 만나 청학동으로 들어간 얘깁니다.)
..............................................................................
*** 나의 지리산 청학동 수련기 -- 7편 --
지리산 교통편과 화개벗꽃 섬진강의 아름다움.
어느 분이 내가 지난번 올린 지리산 쌍계사와
의신 대성 등의 산골 마을이 구체적으로
지리산의 어디쯤 속하고
또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셔서
잠깐 교통편을 올릴까 합니다.
지리산은 그 넓이가 방대하여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삼개도에 걸쳐 펼쳐져 있습니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코스는
대충 세 가지 방향이 됩니다.
남원 쪽에서 올라가는 방법과
구례방향에서 올라가는 방법
그리고 진주 하동 쪽에서 올라가는 방법,
아, 또 하나 저기 중산리 방향으로 하여
천왕봉으로 직접 올라가는 방법 등등이지요.
중산리 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가는 길목에
남명 조식이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도를 닦던 德川書院이 있는데 風光이 아주 끝내줘요.
앞쪽으로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르고,
서원의 주위 풍광과 그곳에 서려있는 地氣가
아주 祥瑞로와 과연 도인이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걸 삼척동자도 느낌이 오지요.
쌍계사는 지리산의 남쪽 중앙쯤에 있는데,
쌍계사의 한 3,4키로 앞이 바로
유행가에도 나오던 화개장터이지요.
아 근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화개 장터부터 쌍계사 입구까지
한 3,4키로의 벚꽃 터널이에요.
도로의 양쪽에 쭉 심어져 있는 벗꽃들이
만개하면 그 경치가 기가 막히더군요.
그 대학시절에 혼자 큰 배낭 짊어지고
산중수련을 한답시고 버스에
몸을 싣고 화사한 봄에
쌍계사의 벚꽃 터널 도로를 지나가기란,
참 뭐라 표현해야 될까.
티없이 맑은 순수한 마음의 소년 소녀가
천상의 수도터로 가는 꽃길이라 해야 할까.
아주 환상적이지요.
아,
그리고 쌍계의 벗꽃 못지 않게
끝내주는 경치가 또 있지요.
거, 전라선 열차를 타고 남원 구례 쪽으로 내려갈 때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섬진강의 푸르름과 하얀 백사장.
구례에서 쌍계사 갈 때
오른쪽 창밖에 펼쳐지는 섬진강의 깨끗함.
옆산의 푸르름을 강물에 비춰 실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과 햐얀 백사장.
그 위의 맑디맑은 푸른 하늘. 참 경치 끝내주었지요.
내가 지리산에 내려 가본지가
어언 십 여년도 넘었지만
신문이나 방송 같은 데서
지리산이나 섬진강이 언급되기만 하면
항상 그 시절 산중 생활의 추억과 더불어
꼭 화개의 벗꽃과 섬진강의 푸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군요.
아 교통편. 서울에서 구레까지야 고속버스도 있고
호남 전라선 열차도 있으니 그걸 타고 가면 되고
구례에서 화엄사까지도 수시로 왕복하는 버스도 있고
시간도 아마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30여분 정도도 안 걸리니 찾아가기 쉽고,
쌍계사까지 가는 방법은 저쪽 남해 쪽에서야
하동을 거쳐 화개장터로 들어오면 되고,
구례에서 쌍계사로 갈려면 버스정류장에서
하동방향이나 쌍계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
쌍계사 입구에서 쌍계사로 들어가지 말고
계속 버스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 3키로 쯤 앞에
칠불암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신흥이라는 마을이다.
신흥에서 한 4키로 쯤 계속 올라가면
의신이라는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 의신에서 길을 따랄 곧장 올라가면
벽소령이라는 데로 올라가게 되기 때문에,
그리로 올라가면 안되고, 여기서부터 본격 산을 타야한다.
여기서 약간 오른편으로 하여서
오솔길 같은 산길을 타고
한 3-4키로 정도 올라가면
바로 대성리라는 곳이 나온다.
당시 대성리에는 김씨 집과 임씨 집의
두 가구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군,
아마 틀임 없이 등산 관광객 이 많아지니
무슨 구멍가게 같은 것이나 하면서 먹고살고 있겠군.
이제는 옛날의 소박함이 없어지고 자본주의 정신이 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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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석평전 철죽밭의 김노인
내가 작년에 지리산 설봉 사이에서 길을 잃어 죽을 고생을 하고,
그 해 겨울은 대성리의 민가에서 지내고 방학이 끝나 서울로 돌아왔다.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도 지리산에 맛들인 나의 머릿속에는
항상 언제 또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가득하였다.
그래서 일단 지리산 등반을 좀 많이 여러 코스로 등반을 하여
지리산의 지리와 개념을 좀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4월 5월 6월에 걸쳐서 칠선 계곡 백무동계곡 대성리계곡을 통하여
지리산 의 능선 종주 등반을 하였다.
작년 겨울 방학 때의 처절했던 경험때문에
지리산의 지리를 잘 익혀놓기 위함이었다.
한 일주일 정도의 여정으로 등반을 했다.
뭐 대학의 수업과 학사일정 들이야 느슨해서
중간에 휴일과 공휴일 휴강일 등을 이용해
일정을 짜면 한 일주일 정도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녀석에게 대리출석도 부탁도하고.
배낭에는 침낭과 텐트를 지고 등반을 하면서
어디 도인이 있을만한 곳을 살피며 다녔다.
그때가 언제 이었던가?
늦은 봄 배낭을 걸머지고 남원으로 하여서
칠선 계곡을 통하여 천왕봉에 올랐다.
으아, 지독히 난코스더군.
지리산 등반코스 중에 제일 험하다고 하여서
혹시 도인 신선들이 거기에 숨어있나
해서 그리로 올라간 것이었는데,
정말 너무 힘든 코스였다.
내 생각에는 아마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 가더구만.
근데 칠선 계곡의 중간 중간의 이름 모를
완전 무공해의 각종 沼와 폭포 등은
정말 비경 중의 비경이더구만.
등산하다 더우면 팬티까지 벗고
폭포에 뛰어들었으니까.
완전히 얼음물이었지.
물론 등산객이 없으니
벌거벗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중간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며 천왕봉엘 올랐다.
천왕봉 부근에 텐트를 치고
혹시 도인이 있나 주변을 수색해 보았다.
날이 어두워 라면을 끓여먹고
다음날 일어나 天王峰에 올라가 봤다.
마침 해가 뜨기 직전이었는데
경치가 기가 막히더군.
물론 사람이라곤 나 혼자 밖에 없었고
하기야 지리산 들어와서 며칠 되도록 한
다섯 사람밖에 못봤으니까.
天王峰이 1,950미터가 넘어서
그런지 천왕봉엘 올라서니
주변의 모든 봉우리와 계곡 등이
모두 내 발아래 깔려 있는데,
그때 바람도 없어,
무한한 고요함 속에서,
멀리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萬壑千峰 사이사이에는 하얀 구름이
고요히 드리워져 있어 더욱이 신비감을 더했다.
점차 붉은 태양이 올라오자
온 천지가 붉고 흰 광선으로 충만하기 시작했다.
황홀하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이때 나는 스스로 도취되고
감명 받아 무아지경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엄청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이 天王峰의 일출 광경은
아무리 필설을 다하여도 표현하지 못하리라.
나는 아직까지도 이만한 장관을 보지 못하였다.
물론 백두산 천지도 직접 올라가 보고하였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천왕봉 일출만큼의 감격은 없었다.
(이거 근데 그만큼 내가 순수함이 사라지고
늙었다는 말이 아닐라나?)
천왕봉 일출의 감격과 흥분을 뒤로하고
다시 신선 도사를 찾으러 길을 떠났다.
거기서 한 2,3키로 쯤 덜어진
장터목 산장이란 곳에 도착하여
산장에서 좀 군것질을 하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물건값은 되게 비싸게 받더군.
하기야 그 물품들을 사람이
다 지게로 지어 올린다니 비쌀 수밖에...
거기서 그 부근의 제석단이란 곳엘 갔는데
(제석단이던가? 좀 가물가물 한데),
그 부근을 좀 살펴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장터목이라는 곳에서 능선 길로 한 6키로 쯤 가서
어느 봉우리를 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천상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경관이었다.
나는 내가 길을 잘못 들어 혹시 그 전설상의
무릉도원이라는 데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커다란 목장과 같이
아주 넓고 펑퍼짐한 대지 위에 빈틈없이
똑같은 색깔들의 꽃나무들이 꽃이 만발한 채
온 산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높은 산에 이렇게 넓고 평평한 땅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이런 기화요초가 온 땅을 뒤덮고 있을 줄이야.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철쭉의 군락이었다.
그곳의 지명은 세석평전이었다.
뭐 신라의 화랑들이 여기서 무술을 닦았다나.
거, 멀리 높이까지 와서 무술을 다 닦는군.
무슬이 아니라 도를 닦았겠지.
철쭉들이 만발한 지리산의 세석평전은
정말 仙境과 다름없는 곳이다.
고산지대이니 더욱 짙은 연 분홍빛 철쭉과 푸른 하늘과
그 사이의 하얗디하얀 뭉게구름의 삼색조화는 바로 선경이었다.
신선 도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선경을 두고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나는 부근에 탠트를 치고
거기서 단식 수행을 하면서
단전호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무슨 청산거사가 만들었다는
국선도 도장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단식 수행을 하면서 국선도 단전호흡을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15일 정도 단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내 사고방식으로는 단식을 하면
무언가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식은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좋은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석평전의 황홀한 철쭉 속에서 밥굶기가 시작된 것이다.
제길, 할 짓이 따로 있지 그 절경 속에서 억지로 밥을 굶다니...
단식 전에 장을 깨끗이 청소해야한다니
피마자기름을 먹고 설사를 한 다음 단식에 들어갔다.
내가 중학교 때 남 뭐라는 사람이 쓴 달마내공 역근경 수련이란 책을 보니
오직 단식 정진을 통해서만 내가 진기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여서,
단식을 하면서 국선도도 하고 달마역근경도 수련하기로 한 것이다.
단식을 시작한지 한 사흘 정도는
무지무지하게 배가 고팠는데,
그 후로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단 힘이 없어서 단전호흡하기가 힘든 것뿐이었다.
물론 달마역근경의 숨 멈추고 두 주먹으로
아랫배 수백번씩 강타하기는 힘이 빠져서 이틀만에 포기하였다.
그래도 국선도 단전호흡은 녹음기를 틀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꼬박 하였다.
그런데 단식을 하니까 어찌나 춥던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낮에는 그래도 따사로운 햇볕이 있었으나
밤이 되면 온도가 내려가 몹시 추웠다.
도를 닦는답시고 정신이 헷가닥 했으니
견뎌냈지 어찌 일반인이 그런 심산에서
그런 짓들을 해내겠나?
그래 단식 시작한지 한 일주일쯤 지나니
국선도 단전호흡도 힘이 없어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되었다.
한 팔일 째던가 겨우 텐트에서 일어나
샘터에 나가 물통에 물을 채워 비실비실 올라오는데
갑자기 윗쪽에서 큰소리로 '껄껄' 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랄 힘도 없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향했다.
어떤 양반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이쪽을 보고 웃고있었다.
나이는 한 사십 정도 돼 보이고
덩치는 크지 않고 얼굴은 아주 깨끗한 분이었다.
검은 수염이 좀 나고.
나는 인사할 힘도 없어,
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겨우 인사하며 지나치려했다.
단식 전 같으면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반가워
혹시 지리산에서 신선이나
도사가 사는 곳을 아느냐고
필사적으로 물어 봤을텐데,
그때는 팔일간이나 굶어서 그런지
그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 분을 지나치는데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드려왔다.
"神仙道士 非有仙이니
積精樓氣 以爲眞 이라 ! "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후에 알고 보니 위와 같은 말이었다.
여하간에 뭐라고 하는지 모르는 중에도
'신선 도사' 어쩌구 하는 것은 분명히 귀에 들어왔다.
나는 좀 놀래서 뒤돌아보았다.
그 분은 나를 쳐다보며 계속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분은 "한밤중에 녹음기를 틀은게 너였구나.
고요한 산중에서 그걸 틀고 뭐하고 있었느냐." 하면서
다시 껄껄대고 웃는다.
나는 깜짝 놀래고 또 좀 화가났다.
아니 그 조그만 녹음기 소리에 잠이 깰 정도면
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 부근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아니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말을 막 해대냐?
여하간에 그래도 나는 자랑스럽게
"그건 단전호흡하는 구령소리에요.
그런데 여기서 사시는 가요?"
하고 말하였다.
그분은 "으허허허..
단전호흡하는데 무슨 구령을 하면서 하느냐?
허허허허....""
나는 기분이 좀 상하기도 했지만
이 분에 대해서 갑자기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팔일 간이나 굶었지만 어디선지
새로운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모처럼 산중에서 단전호흡이라는
단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
"저는 국선도라는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데,
국선도는 우리민족 고유의 정통 수련법이란 겁니다."
그 분은 눈을 크게 뜨고,
"뭐! 국선도! 민족정통 ! 으허허허허// "
좀 있다가 "그래 네가 매일 하던
기괴한 행동들이 그거하던 거구나" 하면서 또 웃는 거였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해버렸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음악에 맞추어
수십 가지의 단전호흡 동작을
취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 음악소리가 나오니까
그 소리를 듣고 몰래 와서 훔쳐본 모양이구나?'
그 분은, "거 국선도라는 것이
누가 우리 민족의 공부법이라고 하드냐?"
나는 분명한 논조로,
"공부가 아니고 수련이라고요.
수도요.
그리고 그건 책에 실려있구요,
그리고 계속 전해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의 계통도 있구요."
그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허, 아직도 세상에 법이 나오려면
몇 년 더 있어야겠구나." 하시면서
먼 산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근데 혹시 이 부근에서 텐트를 치셨나요?
언제 제 텐트에 오셨었나요?"
하고, 이상하게 궁금하던 질문을 하였다.
그 분은 나를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저기에 사네.
저기 봉우리 밑에 靑鶴洞에 .."
나는 좀 놀랬다. '산다니'
그럼 등산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예? 산꼭대기요. 산꼭대기에서 사세요? "
그 분은, "산봉우리에서 어떻게 살아.
그 밑에, 봉우리가 세 번 솟구친 데에 ....
(잠시 후) 밥을 굶으면 기운이 상하지. ..... . . ."
나는 또 놀랬다.
내가 단전호흡 음악을 틀고
단전호흡 동작을 취한 거야 몰래 와서 봤을 수도 있겠지만,
단식 중인걸 어떻게 알고 하는 얘긴가?
이것도 내가 힘이 없어 비실비실 걸으니 눈치로 말하는 것인가?
나는 그래서, "단식수행을 해야지만
內功의 眞氣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달마대사 소림내공 역근경에도
나와 있습니다"하고 의젓하게 대답하였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웃으면서,
"어허, 책이 사람 망치는구나."하면서,
아까와 같이 길게 타령을 하였다.
"人階食穀與五米 獨食太和陰陽氣라 "
(당시에는 발음도 잘 몰랐지만
나중에 황정경을 암송하면서 알게됐다.)
그 분은, "우리 仙家의 단식은
그렇지가 않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분의 말 중에
'선가' 어쩌구 하는 말이 있는지라 속으로 깜짝 놀랬다.
이 분이 혹시 내가 찾던 도사가 아닐까? 그
렇지만 일단 탐색을 해봐야지.
"아니 선가라면 바로 仙道를 말하는 것일텐데요,
단식을 어떻게 하나요. 며칠 간 정도 단식을 하나요?
단식의 전에 감식을 하고,
본 단식이 끝나고 며칠 간 정도 보식을 하나요?"
나는 단식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좀 궁금하였다.
그분은 옆에 활짝 핀 철쭉을 바라보면서,
"며칠? 감식?
며칠이 어딨어...
한 번 들어가면 몇 달이지. 몇 년도 똑같지.
달이나 년이나 같아. 필요에 따르는 것이지. . ."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허풍을 치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또 물어보았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씩 단식을 하면 몸무게가 얼마나 빠지나요?
그리고 끝난 다음에 묽은 죽을 며칠이나 먹나요?"
그러자 그 분은 재미있다는 듯이 빤히 나를 쳐다보면서,
"仙家의 단식은 몇 달 몇 년을 해도
몸무게가 하나도 안 줄어 정진이 끝나고
바로 찹쌀떡도 먹고 고기도 먹고 술도 먹지. "
에이, 저런 거짓말. 나는 완전히 실망했다.
'선가' 어쩌고저쩌고 해서 가졌던 호기심도
이 말을 듣고 싹 가셔버렸다.
여기서 이분하고 한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힘이 쏙 빠져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수행하는 것이 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면서 자리를 뜨려했다.
그분은, "다음에 오면 내가 집을 지어주지." 하였다.
나는 그분이 어디다 어떻게 집을 지어준다는 것인지
생각하기도 싫어서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인사하고 내 텐트로 돌아왔다.
텐트로 돌아와서는 다시 나의 단식 일과로 돌아왔다.
그런데 샘터 위에서 이분을 만나고 나서부터
고요하던 마음 속에 자꾸만 잡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가 소형 녹음기를 틀고
여러 가지의 단전호흡 동작을 하는 것을 알았을까?
또 어찌 내가 단식으로 소림 달마 역근경의
내공 진기를 수련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여기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도 아니고
또 설령 누가 텐트 옆에만 와도
금방 알아차리게 되어 있지 않은가?
여기 세 방향이 막혀 있으니까. 아니라면,
여기서 그 분이 산다는 그 봉우리까지
적게 잡아도 한 3키로는 되는데,
거기서 어찌 알 리가 없고.
아니 그리고 그 분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이런 산중에서 사는 것일까?
혹시 天眼通과 天耳通이 있는 도사가 아닐까?
근데 도사같이 생기지는 않았고 여하간에
나는 오만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단식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말 보다도 "仙家의 단식은 . ..."
어쩌구 하는 말통에 그래서 단식 시작한지 11일 만에 끝내게 되었다.
한 이틀간 죽을 묽게 해서 끓여먹으니 좀 힘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혹시 요괴의 술수에 빠져
내공 수련을 실패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단식 정진을 통해서 내공의 진기를 닦게되자
그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요괴가 도인인척 둔갑하여
나의 단식 수행을 중간에서 망치게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거기 그 분이 살고있다던
청학동이라는 데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포기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바로 다시 와서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왜냐면 당시 몸이 너무나 탈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된 죽을 끓여 하루 더 보식을 한 다음
배낭을 챙겨 하산을 하였다.
다리에 힘이 없어 내려오면서 배낭 따라
몸이 휘청휘청하다가 수없이 넘어졌다.
죽을 먹기 시작하니 갑자기 왜 이리 허기가 지는지.
겨우겨우 내려와 구례역에서 열차표를 끊고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아! 그런데 구례역전의 식당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하는데 죽여주더군.
본시 단식의 효과란 단식 자체보다는
단식 후의 보식이 더 중요하다.
보식을 잘하면 단식의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보식을 잘못하게 되면 오히려 몸을 망친다.
그리고 단식 후의 보식기간에는
그동안 참아왔던 식욕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엄청난 식욕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식당 앞으로 가 있었다.
식당 안에서 사람들이 은어회와 막걸리를 먹고 있었다.
나는 단식 11일을 하고 죽을 먹은 지 3일 밖에 안되어 있으니
은어회와 막걸리를 먹으면 절대로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고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들어가 은어회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을 시켜서
꿀꺽해 버리게 됐다.
어찌나 맛이 좋던지 단박에 술에 취해버렸다.
겨우 열차에는 올라탔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다.
십여 분도 안되어 구역질이 마구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틀 비틀 열차 난간으로 나가 달리는 열차의
난간을 양손으로 붙들고 토하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혀 올라오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마구 토했다.
아,
그런데 달리는 열차의 난간을 붙들고 토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보면 아름다운 푸르디푸른 섬진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푸른 섬진강은
초록색 산과 하얀 백사장사이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별일도 아닌데 여기 기술하는 이유는,
십 여년도 더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함에서다.
(이제 바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다시 지리산으로 향했다.
과연 영신봉 밑 청학동에 김노인이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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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리산 청학동수련기 -- 8편 --
8. 靈神臺에 들어감
서울에 돌아와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그때 세석평전에서의 일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이상한 분이 나에게 비아냥거리듯이 하던 말들도
한마디도 빠짐없이 나의 뇌리에서 맴돌고있었다.
달마 역근경도 우습게 보고
국선도도 유치원애들 수준으로나 여기고
仙家의 단식이 어쩌네 하는 이야기들이 하도 궁금해서,
배낭을 단단히 챙겨놓고는 오로지 기말고사가
끝나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구례행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잠깐,
그런데 내가 영신대에 들어가서부터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해도 될라나 하고 망설였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공개를 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지금이야 '丹'이니 '道'니 '仙'이니
하는 말들이 많이 선전돼서
그리 거부감 없이 들리지만
그 당시 17, 8년전만 해도
아주 생소하고 괴상한것으로들 생각했지요.
심지어 老子 莊子등의 道學을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수련,
수행적인 면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거부하고있었지요.
또 내가 당시에 침묵을 지켰야 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내가 처음 금양자로부터
'一中'의 현시를 받고
존경하던 교수님께 이야기했을 때,
교수님께서도 무척 감개무량하셨습니다만,
그 흥분되는 큰 사건을 집에 와서 부모님들에게
자랑스레 고하였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만 보셨는데,
어머님은 깜짝 놀라셨지요.
어머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어요.
"어이구, 내 아들 산에 미쳐 돌아다니더니.
어이구, 마귀에 홀렸구나 !
주여! 주여 !!
믿습니다 !"
그 날로 어머니는 우리교회 목사를 데려와
나에게 안수기도를 받게 하시고 야단법석을 떠셨는데,
아이쿠, 지금 생각하면 아주 우습지요.
그래도 지금은 내가 워낙 이해를 시켜놔서 안 그렇지만 . ... . .
아마 그때 아버님도 아무 말도 인하시고
물끄러미 쳐다보시기만 했지만
아마 속마음은 어머님과 마찬가지였을거에요.
그래서 나는 그때 생각하기를
'이거 아무한테나 얘기하면 안되겠구나.
잘못하면 정신병원 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靈神臺에 조그만 초옥을 김선배와 함께 짓고,
그 후에 같은 과 친구 녀석들을 데리고
몇 번 지리산 등반을 하여 자랑삼아 거기에 데려간 적이 있어요.
내가 하도 미친놈처럼 지리산에 달려가니까
이녀석들이 궁금하여 따라온 것이지요.
지금 충남대에 김모 교수 연세대에 이모교수
모 신학대학의 박모교수등이 그때 나를 따라
영신대의 나의 별장을 가 본 녀석들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녀석들한테도 내가 목격했던
여러 사건들을 얘기하지 않았지요.
암만 친한 녀석들이긴 해도 그런 얘기들을 했을 때,
자신과 사고방식이 다를 땐,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혹 나를 이상하게
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우리 어머니한테 호되게 당했으니까.
하 하 하.....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그때 이후 최초로 발설하는 것이지요. ))
영신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석평전을 거쳐야하기 때문에,
지도에서 세석평전의 직통코스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세석산장으로 올라갔다.
구례 역에 새벽에 도착한 나는
버스를 타고 곧장 섬진강을 따라
화개에 도착하여 내린 후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시골버스로 雙鷄寺입구에서 내렸다.
여기서 등산로 입구인 의신부락까지는 8키로 인데
버스가 뜸하기 때문에 걸어서 의신까지 들어갔다.
물론 중간에서 막걸리 몇 사발을 사먹고
산을 오르는 중에 날이 너무 덥고 땀이 비오듯했으므로
중간에 계곡에서 점심을 해먹고
폭포 속에 풍덩 들어가기도 하였다.
계곡의 물이 아주 차가웠다.
한참을 물 속에서 놀다가 나와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등산객은 거의가 아니라 전혀 없었으므로 팬티만 입고 놀아도 무방하였다.
(사실은 벗고 놀았어요)
배낭에 온갖 살림살이가 다 들어있어 지고 올라가기도 힘이 들어서
등산하는 도중에 계곡 옆에 텐트를 치고 다음날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계곡 옆에 반반하게 탠트칠 장소가 있어서
거기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먹었다.
단전호흡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 잠이 들었다.
곤히 잠이 들었었는데 기분이 이상한 것 같아 잠을 깼다.
아니, 이런 텐트에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발쪽은 이미 물에 잠겼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이지경이 되도록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니
후닥닥 일어나 아무렇게나 배낭을 챙기고 텐트를 걷었다.
비를 홀딱 맞으면서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운데
이 상황에서 어디로 갈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조금 위쪽으로 피신하여
배낭이 비에 젖지 않게 텐트로 감싸주고
나는 판초를 뒤집어쓴 채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날을 지새웠다.
판초를 뒤집어썼어도
그 와중에 홀딱 비에 젖었지...
에이그 ~ 텐트 좀 위쪽으로 제대로 칠걸 ....
텐트 하나 좀 잘못 쳤다기로서니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 생각하니,
어느 등산 안내 책자에선가'
산에서 비가 오면 갑자기 계곡의 수량이 불어나 위험하니
계곡 옆에 텐트를 칠 때는 조심하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하기야 내가 더 늦게 잠을 깼더라면
텐트와 함께 떠내려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비는 멈추고 날이 서서히 밝아와 비에 젖은
잡동사니들을 챙겨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에휴~, 등산화는 물에 흠뻑 젖어 질퍽거리고....
혼자 이게 무슨 꼴이람. 시커멓게 비를 퍼붓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새파랗게 맑게 개어있었다.
이렇게 날씨와 공기가 청량할 수가.
개울이 나타났다.
배낭을 맨 채 나는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이 개울이 보통 때는
개울 속의 드문드문 나와있는 바위들을
개울 속의 드문드문 나와있는 바위들을
밝고 건너가면 되는 것인데
이날은 비가 많이 와서 바위들이 물에 잠겨있었다.
그래도 개울 깊이는 무릎 정도밖에 안될 것 같고
어차피 등산화나 옷도 젖은 상태이므로 개의치 않고 건너갔다.
근데 발걸음을 서너번 정도 내밀었을 때 기분이 심상치 않았다.
생각보다 물살이 센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간 쯤 왔는데,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당황이 되었다.
당황을 하니 더욱 중심잡기가 어려웠다.
아니 이럴 수가,
무릎 정도밖에 안되는 수량이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비틀거렸다. 약간 몸을 기울여 겨우 중심을 잡았다.
이때서야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산중에서 비가 와서 계곡 물이 불었을 땐,
조금 기다리면 계곡 물이 낮아지니 그때 건너라고.
아래로 흐르는 계곡 물은 의외로 물살이 강하여 위험하다라고'
여기서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면 내 몸뚱이는 계곡 물에 휩쓸려
바위와 나무 등걸에 부딪히고 찢기며 시체가 되어
저 하류 쪽으로 떠내려 갈 것이다.
산에서 개울 건너다가 조난 당했다는 것이
이래서 그렇게 되는 거구나.
순간적인 생각이 들자 정신을 가다듬어 한 발 한 발
보폭을 조금 씩 조금 씩 하여 겨우 계곡을 건넜다.
으아, 이거 산중에서 비명횡사해도 아무도 모르겠군.
여하간 이리저리해서 해발 1,600미터가 넘는 세석평전에 올랐고,
곧장 그 분이 가리켰던 영신봉을 향해서 걸었다.
영신봉은 세석평전에서 한 2키로 정도인가 떨어져 있었다.
영신봉에 올라서서 둘러보았다.
어디로 내려갈까.
봉우리가 세 번 솟구쳤다고 했지?
내 기분에 남쪽 같았다.
북쪽은 둘러봐도 뭐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산사태가 나 있는 남쪽을 향하여
한 십여분 어슬렁거리며 내려가니
오른편쪽으로 반반한 터가 나타났다.
분명히 무슨 집터 같고
사람이 거주하는 듯이
잘 정리되고 닦여 있었다.
그 터에 내려서니 저 남쪽으로
툭 터진 게 경치가 장관이었다.
모든 산봉우리와 계곡들이
첩첩이 쌓여 발아래 펼쳐져 있고
산봉우리 밑으로는 아주 하얀 뭉게구름이
걸쳐 쳐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였으며,
멀리 아스란히 화개 방면의 섬진강인가
하얀 모래밭인가가 아스란히 보이는 천하의 절경이었다.
야 ~ 아 ~ 하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가 문득 위를 보니
진짜로 봉우리가 세 번 솟구쳐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출근하고부터 타이핑해서 점심도 못 먹고,
지금 1시인데 다음에 올려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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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智里山청학동 수련기 -- 9편 --
9. 지리산의 核 靈神臺에 Log House를 짓다.
나는 靈神臺에 도착하여서 주위의 경치를
관망하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도인들이 사시는 곳이라면 경거망동하면 안되니까.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는데도 인기척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부근 여기저기를 슬슬 돌아보았다.
왼편쪽으로는 자그마한 폭포가 있고
오른편쪽으로는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靈神臺에 텐트를 치고
왼편의 물가로 가서 저녁밥을 지어먹었다.
밥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단 코펠에 밥을 할 때는
코펠 위에 돌멩이 같은걸 올려놓아야 한다.
해발 1600미터가 넘어가서 기압이
얕기 때문에 밥이 잘 안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저녁밥을 고추장에 맛있게 비벼
배불리 먹고 텐트 안에서 잠을 자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왜이리 마음이 편한 것일까?
그때 나에게 이리로 찾아오라고 하던
그 분이 있던 없던 이렇게 훌륭한 비경 속에서
홀로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침이 되었다.
텐트 안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는데,
아침의 경치는 더욱 장관이었다.
살아있는 한 폭의 동양화였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천지사방의 모든 산맥들이 발 앞에 조아리고,
봉우리 봉우리들에는 하얀 구름이 드리워진 채,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황홀하였다.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은 더욱 淸凉해졌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이대로 인생이 끝나도,
우주가 끝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문자 그대로 무아지경에 빠진 채
그냥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뭐, 神仙術을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이대로가 神仙이지
여기서 무엇을 더 보탤 것인가
마음속에선 충동과 감명이 복받쳐 올랐다.
눈물이 글썽거렸다.
천지사방의 경관과 분위기에 도취되어
한참을 無我境에 있었다.
아침을 해먹고,
그 날도 여기저기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혹시 내가 그 분이 가리키던 청학동에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도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여길 떠나 다시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삼일 째 되던 밤
사방이 고요한 중에 산 중 어딘 가에서
무슨 주문 외우는 것 같은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호기심이 일어났다.
소리의 크기로 봐서 아주 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이 한밤중에 찾아 가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려고
아침을 해먹고, 주위를 돌아다녀 보았다.
그러다가 靈神臺의 오른 편 쪽으로
한 백 여 미터 정도 내려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게, 우리 동지 여기 어째 살만하지..?"
나는 魂飛魄散하였다. 지리산 들어와서부터
사람 소리라고는 못 들어보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우렁 우렁하는 소리를 들으니 안 그렇겠는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옆에 높이 솟은 나무 위의 가지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사람 하나가 사뿐히 지상으로 날라 내려왔다.
높이는 한 4층 정도 되는 거리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새처럼 날라 온 것도 아니고, 뭐라 할까?.
뛰어내리되 지상에 닫는 모습이 전혀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쿵'소리도 안 나고.
나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반가웠다.
바로 그 분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저, 전에 세석평전에서 만났던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 자, 올라가지.."하면서 앞장서신다.
나는 뒤따라 텐트를 쳐놓은 靈神臺로 올라오면서
문득 고개를 돌려
이 분이 내려오던 나무를 휠끔 휠끔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나무 꼭대기에 사람이 앉을만하게
나뭇가지들을 엉기성기 걸쳐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제 그제 이쪽도 돌아다녀 보았었는데......
저런데 계셨으니 내가 못 보았지....
아니 그런데 저기 까지 어떻게 올라가지.
중간에 벋디딜 중간가지도 별 없고....
여하간에 저런 높은 나무를
쉽게 오르내릴 공력이 있으니
대단한 분이 틀림없었다.
영신대에서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 분은 성이 김씨이고 '연희전문대학'의
'수물과'(지금의 수학과 물리학과를
합친 것 같은 科라고 함)를 나온 후
철도청에 근무하시다가 퇴직을 하고
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네. 젊었을 때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소'선생 이라는 神仙 밑에서
묘향산의 토굴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仙道의 인연이 박하여 공부의 도중에
집안의 문제로 인하여 홀로 하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여 처자식도 두고 하면서도 수도의 길을 버리지 않고
밤잠을 자지 않고 수행에 전념해 오다가
퇴직을 하고 여기 지리산의 靈神臺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의 나이는 70이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많이 봐야 한 오십 정도 밖에는 안 보이는데.....
그리고 여기 靈神臺가 바로 청학동이라 한다.
(*후일, 김 선배는 도선 국사로부터
받았다는 親書와 지도를 내게 보여줬는데
거기에는 영신대 지명 밑에 청학동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김 선배가 도선 국사 운운할 때 속으로 굉장히 황당했다)
나는 그 분에게 청학동이란 것은
신문 잡지 같은데 나오는 바대로
그 상투 틀고 유불선 갱정지도를 한다는
지리산 묵계리 위의 마을이
청학동이 아닌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분은 거기는 진짜 청학동이 아니고
진주암이라는 마을이라 신다.
그렇다면 아마도 후에 관광회사 같은데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곳을 '靑鶴洞'이라 이름 붙인 모양이다.
나는 처음에 이분께 선도를 배울 목적으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을 하였었는데,
이분은 "자네와 난 사제의 인연이 아니니,
앞으로 나를 그냥 선배라 부르게.
우리 공부에서 기실 '선생'이란 없네.
공부에 끝이 없기 때문이지.
사실 '선배'라는 말도 불합리한 게,
후학이 앞서면 '선배'가 되는 것이니,
그 말이란 게 모두 편의에 따르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나보다 나이가
오십쯤이나 많은 분을 '선배'라 부르게 되었다.
김 선배님은 나에게,
"이곳 靈神臺 주변에는 모두 다섯 분이 공부를 하고 계시네.
그 공부터가 장막들이 쳐 있어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나,
자네는 우리 靈神臺 식구가 되었으니,
혹 이상한 것을 보아도 놀라지 말고,
入定 尸解 한 것을 보아도 간여치 말게... "
나는 '예'하며 그러마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내일부터
집을 지을 테니 오늘 잠을 푹 자두라고 하신다.
다음날 아침을 해먹고 있는데,
김선배님이 오셨다.
나는,"아침 진지 드셨는지요.
안 드셨으면 여기 바로 한 밥이 있는데,
제가 차려 드릴께요.
반찬은 없지만.... "
"아 그거 , 아주 맛있게 생겼구나.
오랜만에 한 번 먹어보자. "
나는 밥을 한 그릇 가득히
코펠에 떠드리면서, 여쭤보았다.
"여기서는 밥을 안 해드시나 보죠? "
"쌀을 매번 구하려면 번거러우니,
우리 공부꾼들이야...."
"아니, 그럼 뭘 잡수시는가요?"
"먹을 거야 많지.
"修道를 하려면 곡식을 끊고 酸穀을 하여야하지요?"
"무슨 산중에서 식량 구해놓고 공부하기가 여의치 않으니
할 수없이 솔잎도 먹고 朮도 캐먹고 黃精도 캐먹고 하는 것이지...
공부 꾼들이 돈이 없잖아.
거 일부러 산에 들어와 酸穀하는거
외도들이나 하는 짓이지 공부엔 그리 큰 도움되지 않아.
衣食住에 신경 안 쓰고 공부할 수 있으면 그리 해야지"
김선배님은 나를 데리고 집터를 구경시켜줬다.
영신대 왼편의 미니 폭포로 내려갔다.
폭포의 왼편쪽으로 조그만 동굴이 하나 보였다.
"저 동굴 안쪽에다 짓지" 하시면서
한 3미터쯤 되는 통나무를 동굴과 이쪽 바위 사이에 걸쳐놓았다.
통나무를 밝으며 손으로는 암벽을 의지한 채 조심스레 건너갔다.
굴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시야가 툭 터지면서
전망이 아주 멋이었다.
그 굴은 깊은 굴이 아니라
암벽과 암벽이 만나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 여기 좋지?
이 바위와 이 바위 사이에 집을 짓지.
여기다 구들도 하고 자네는 구들이 없으면
추워서 봄가을에도 여기 못살걸.
장기간 있으려면 안정되게 해야지"
이분의 말씀이 황당하기는 했지만
여하간에 재미있었고 호기심도 잔뜩 동했다.
'내가 언제 여기서 산다고 했나? 혼자서 이러쿵저러쿵....'
집짓기 첫날 김 선배님은 어디서 구했는지
녹슬은 톱과 삽 등을 가지고 오셨다.
나는 김 선배를 따라 갔다.
김 선배님은 나무들을 둘러보면서
적당한 굵기로 곧게 자란 나무들을 잘랐다.
그걸 나더러 영신대까지 운반하란다.
난 나무라는 게 그렇게 무거운 지는 처음 알았다.
한 이틀간은 통나무를 靈神臺로 운반하였다.
난생처음 해보는 노가다 였다.
일단 통나무 운반이 끝나자
이젠 바위 돌멩이 운반이 시작되었다.
"구들을 깔아야되니 어디 판판한 돌이 있나 봄세"
그런데 산중이라 구들 깔 만한 펀펀한 돌들이 쉽사리 눈에 띄지를 않았다.
여기저기 헤매면서 넓적한 돌을 몇 개를 발견하긴 했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운반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김 선배께 와서 이리저리 말을 고하자 같이 가 보잔다.
김 선배는, 나를 놀리는 말투로
"아니 젊은 사람이 이걸 못 들어? "
하면서 바위에 가까운 돌덩이를 번쩍 치켜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간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니, 나이가 칠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단한 기운이다!
道를 닦은 게 확실한 모양이다.
나무에서도 사뿐히 내려오고'
그런 식으로 무거운 돌들을
김 선배님이 손수 날라주었다.
통나무는 날라도 돌은 정말 못 나르겠구먼.
지게라도 있으면 몰라도 나는 좀 창피했다.
노인네보다도 힘이 없다니.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이 벌어졌다.
구들로 쓸 돌이 좀 크고 넓적한 것이 필요한데,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김 선배는, "땅속에 있는 돌들이라도 써야겠구나 "
하면서 땅을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땅을 한 참 둘러보던 김 선배는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면서
"음, 저만하면 됐다.
저기를 파보게" 하는 것이었다.
"예?
땅을 파라고요.. ?
"응, ."
나는 엉거주춤 삽을 들이대며,
김 선배를 힐끗 쳐다보았다.
김 선배는 표정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별 수 없었다.
하라는 대로 할 밖에...땅을 한 30센티쯤 팠다.
"좀 더 팔까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김 선배님은 물끄러미 파여진 땅을 쳐다보더니,
"거기서 반 자만 더 파 봐 "
김 선배가 나무에서 사뿐히 내려앉는 것과
바위를 드는 힘을 목격한 나인지라,
군말 없이 그대로 조금 더 파 내려갔다.
그러자 삽 끝에 딱딱한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역시 김 선배님은 대단하시다.
"여기 돌이 있는데요?"
"그거 파내서 사용하지"
김 선배님은 바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명상에 잠기셨고,
나는 그 돌을 파내느라 낑낑거렸다.
이놈의 돌이 깊이는
한 사오십 센티 정도밖에 안되지만
넓었기 때문에 그걸 파내려면
그 주위의 흙들을 모두 파내야만 했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였다.
구슬 같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위 땅을 모두 팠다.
손으로 바위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무거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땅은 다 팠는데요.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가 없어요"
김 선배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다시 들어 보라 하신다.
나는 공연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여 돌을 드는 시늉을 하였다.
근데 기분이 이상하였다.
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힘을 주니 돌이 버쩍 들린다.
단숨에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돌을 들고 靈神臺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걸 어찌 들고 가남.
그래도 명색이 내 집을 짓는 것인데,
내가 안 들고 갈 수도 없고 내 힘으로는
그걸 들긴 들어도 걸어갈 수가 없다.
나는 내심 김 선배님이 또
들어주시겠지 생각하면서
끙끙대며 돌을 드는 시늉을 하였다.
"이만 가세.
공부를 잘 하면 기운이 세지지!" 하면서
손수 돌을 들어 가슴에 안고 가신다.
나는 삽을 들고 뒤따랐다.
김 선배는 돌을 들고 가시면서도
이 얘기 저 얘기하시면서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다.
대단하게 여겨졌다.
나는 속으로 젊은 놈이 창피하게
노인장보다도 못하고... 할 수 없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집터에 도착해서 벌어졌다.
주변에서 흙을 파 가져와서
물에 이겨 아궁이를 만들고 주춧돌을 세우고,
구들 밑받침 돌들을 먼저 깔고 그 위에 구들을 놓았다.
그런데 그토록 힘겹게
구들장 돌들을 준비했건만
구들 돌 하나가 맞지를 않는다.
김 선배님과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주변 돌들과 짝이 맞지를 않았다.
잠시 후 김 선배는 "할 수 없구나. 잘라야겠다"
"예? 이걸 자른다구요"
나는 그래서 망치 같은걸 찾아보려고 하였는데,
김선배님은 그 돌을 앞에 놓더니,
흙을 물에 묽게 반죽을 하여 가져 오라 신다.
내가 흙을 묽게 반죽하여 갔다드렸더니,
김 선배님은 그것을 손가락에 찍어 돌에다 선을 그었다.
"황토로 해야 제격인데, 어쩔지 모르겠구나 "
그리고는 손으로 한쪽을 잡고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순간 돌이 '딱'하는 소리와 함께
흙으로 금을 근대로 그대로 부러졌다.
놀라운 솜씨였다.
"으 ~ 아 ~, 선배님, 부러졌네요 ! "
김 선배님은 그대로 돌을 구들 돌 사이에 올려놓았다.
"이젠 자네가 흙을 이겨 사이사이 잘 바르게 틈이 있으면
불을 땔 때 연기가 들어와서 고생하니 틈이 있나 없나 잘 보고,
나중에 불을 한 번 때 보아 검사를 해보게 "
나는 靈神臺에 처음 들어왔었을 때는 평소 습관대로
숨 멈추고 두 주먹으로 단전 두들기기와
이것저것 짬뽕한 단전호흡을 매일같이 하였는데,
김 선배님과 같이 집을 짓는 과정에서
그 짓을 아주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김 선배님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데다,
김 선배님의 초능력을 보고는
내 식의 수련을 도저히 할 마음이 나지를 않았다.
구들이 완성되고
김 선배님과 함께 통나무로 벽을 올리고
지붕을 올리고 안에다는 선반도 만들어 넣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새가 벌어지는 곳은
흙이나 나무 이끼들을 뭉쳐서 막았다.
김 선배님의 집 짓는 솜씨는 수준 급이었다.
김 선배님이 나무를 깎고 다듬고 하면
나는 그 옆에서 심부름만 하는 꼴이었다.
하기야 내가 생전에 이런 것을 해봤어야지.
내가 친구 녀석들을 여기에 데려왔을 때는 자랑스레
내가 지었다고 허풍을 떨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김 선배님의 작품이었다.
바야흐로 보름만에 나의 별장이 완성되었다.
크기는 두 평, 구들도 있고 지붕도 있고,
문도 있고 사방이 모두 통나무라.
전망 또한 좋고 ......
기분이 너무 좋았다.
玉 樓에서
抱 一 子 가
퍼온글] [펌]장경수님(=포일자) 그 후 이야기..|
-- 安 國 寺 의 충격 , 전라모임 참가 -- 장경수 (poilza ) 96/08/11 안국사 후기를 일찍 올릴려고 했는데, 게을러서니 이제사 올리게 됐군요. 8월 2일 , 이상윤거사님을 모시고 안국사에 들려 다음날 성수산 자연휴양림 에서 일박을 한다음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 여행은 제법 보는바도 느끼는바 도 만아 괜찮은 여행이 되었다. 무엇보다 안국사에서의 감회는 남다른바가 있어 자못 충격적이었다. 이번에 나로 하여금 南行을 하게 한것은 무엇보다 '智異山 安國寺'라는 단 어였다. 智異山은 나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기때문이었다. 나는 '지리산'이라는 말에 야릇한 흥미가 생겨 주위 분들한테 '安國寺'라는 절이 지리산의 어디쯤이냐고 물어보았다. 거기 가보셨던 회원께서 '안국사 '는 함양에서 이러저러하게 들어간다고 말씀하셔서 , 조금 실망하였다. 본 지리산이 아니라 그 방계 산줄기 어딘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거나 8월 2일 이상윤거사님과 더불어 논스톱으로 함양까지 들어갔다. 휴가철인데도 다행히 찻길이 밀리지않아 한 4시간 반 가량 걸린 것 같다. 실상사를 거쳐 두루두루 길을 물어 안국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아니 ! 그런데 보니 , 바로 지리산 백무동계곡하고 접해있는 것이 아닌가? 백무동계곡 ! 대학시절 진짜 뼈빠지게 오르내리던 백무동 계곡이 아닌가? 안국사가 백무동 계곡과 연해있자 호기심이 버쩍 일어났다. 차를 몰고 산으로 올라갔다. 한 10여분 오르자 안국사가 나타났다. 먼저 도착해있던 회원분들과 인사를 하고 , 찬 물에 세수를 하였다. 경내를 돌아보았다. 아주 아담하고 소담스럽게 잘 꾸며져있었다. 법당도 정결하였다. 법당의 안대는 그앞의 산으로서 조금은 막혀있었다. 마당을 돌아 성후 스님이 거처하는 별채에 이르렀다. 스님 방에 걸터앉아 주위를 조망하였다. 시야가 툭 터져 지리산과 멀리 기타의 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장쾌하였다. 멀리 智異山 天王峰 으로 부터 앞쪽으로는 토끼봉 맥까지... 아 이렇게 멋있을수가... 요사채와 법당에서 보이던 전망과는 새삼 달랐 다. 이런 ... , 스님이 최고 요지를 점하고 계시구만.... 스님 방의 문턱에 걸터앉아 장대한 지리산맥을 취한 듯 바라보고있었다. 하나 둘씩 엣 생각 , 추억이 되살아나며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였다. 옛 생각들을 하게 되자 도저히 스님 별채에서 발을... , 멀리 지리산 줄기로 부터 눈을 떼지 뭇했다. 나는 대학시절에 仙 . 佛 에 흥미가 많아 불교연구회라는 써클에 가입하여 여러 명찰들을 두루 돌아다니기도 하였으며 또, 神仙이 되려고 지리산에 들어가 생활하기도 하였다. 仙 과 佛은 공부의 심천이 다를뿐이지 그 공부가 다른 것은 아니다. 사찰에도 산신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학 2학년 때에, 神仙을 만나 神仙術을 배워 神仙이 되려고 지리산 에 입산하였었다. 그 후 수차 지리산을 방황하다가 神仙 과 다름없는 김선 배를 만나, 지리산 세석평전옆 靈神峰밑 靈神臺에서 수련생활을하였다. 그곳 에 통나무로 2평짜리 아담한 내 집을 짓고 구들장도 만들고하여.. 이후 한 10여년을 지리산을 왕래하며 산중생활에 푹 빠졌었다. 대학생활중 에도 며칠간의 여유만 있으면 지리산에 미친놈마냥 지리산 靈神臺로 치달 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일년간을 靈神臺에 칩거하며 하루 18시간의 靜坐수행을 히기도 하였다. 靈神臺는 해발 1600미터가 넘는 고지여서 좌청룡 우백호의 지리는 물론이고 그 경치가 말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仙境이었다. 萬壑千峰이 발 앞에 펼쳐져있고 아침에는 하얀 구름이 산 봉우리 봉우리만 남긴채 계곡에 고요히 깔려있는 모습이란 실로 바라보는 이의 영혼을 숨죽 이게 하는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나는 거기서 생활하며 어찌어찌하여 周天火候를 얻고 天眼通 등의 약간의 신통과 써도써도 다함이 없는 육체적 힘을 얻었었다. 그때 힘을 주체치 못 하여 등산로로 올라가 등산객들의 배낭을 대신 걸머지고 천왕봉과 노고단 사이 45키로의 능선길을 마구 뛰어다니기도 하였었다. 그때 난 내가 神仙이 거의 다된줄로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까불다가 어찌어찌하다가 공부가 폐쇄되고 도리어 火候의 폐해를 받아 폐인이 되어버렸었다. 사회에 다시나와 사회인으로서 새출발을 하려했으나 몸과 정신이 망가져버려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이, 노인네 보다도 못한 지경이 되버렸고, 정신은 마치 무슨 안개가 꽉 끼인것처럼 몽롱하였다. 특히 무슨 일을 하려거나 무 슨 생각을 할라치면 더욱 머릿속이 흐리멍텅해져버렸다. 수 천만원을 들여 갖은 보약을 다 해먹고 별짓을 다해도 정신과 몸이 조금 도 회복되지않았다. 내가 직접 동의보감을 처음부터 끝가지 수십차례 읽어 가며 내 몸을 고쳐보려했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결국은 죽음 밖에 없나보다 생각하여,지리산에서 죽음을 맞으려고 다시 입산을 하였다가 仙家 智異山派의 방주이신 金陽선생이란 분을 뵙고 산중에서 용광로를 설치하여 구리 와 철을 제련하여 먹고 몸과 정신이 起死回生을 하게 되었었다. 이 일련의 생활중에 여러 추억과 희한한 경험 그리고 고향 보다도 더욱 강 한 지리산에서의 향수가 있었다. 나는 이젠 신선이 되려는 공부는 포기하고, 이 사회에서 열심히 살기로 작 정했다. 나는 사회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이 지리산의 향수가 나를 아주 강하게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 나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지리산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수년간을 지리산 근처에 가지도 않고 지리산에 대한 무슨 기사나 내용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 이젠 사회생활이 안착되고,누가 금덩이를 줄테니 지리산에서 살으라고해도 싫다할 것이었다. 그래서 불동에서 '智異山 安國寺' 라는 것을 보고 자신있게 내려갔던것인데, 그래도 피는 못 속이는 법인가보다. 지리산에서의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향수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차~암~,, ,, 안국사.. 훌륭한 수도터다. 성후 스님도 소박 소탈하여 친근 하시고... 다음날 성수산 휴양림에 들어갔다. 전라 지역장 임영식님 의 헌신적인 노 력으로 첫날부터 너무 잘 먹고 , 다음날 죽림온천 까지 따라갔는데 수질이 아주 좋아서 다시 와야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오후에 金山寺엘 들렸다. 금산사는 처음이었다.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랬다. 아니 이 럴 수가 .. 뒤편의 모악산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산인데 이렇게 국판이 넓고 아늑하다니... 대단히 훌륭한 사찰이다.. 다음에 국신사에 들렸다.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천년고찰의 내음이 물씬 풍겼다. 아주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나무숲 평상 위에서 범현 스님의 일품 말차를 얻어마셨다. 그윽한 향기였다. 이번 여행에 무엇보다 큰 소득은 여러 불심깊고 점잖은 道友 들을 뵙게 된 것이리라.... 淸 溪 玉 樓에서 抱 一 子가 =================================================================================== =================================================================================== 흐린것은 맑음에 이르는 길이요 어둠이 오래면 밝음이 온다. 모양과 神이 함께 묘해야 道와 함께하고 眞에 합하게 되는것이다. 守中包一, 養性第一步工夫 중을 지키고 하나를 품는 것이 性을 기르는데 있어서 첫걸음이 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귀가 듣지를 아니하면 坎이라는 水가 안으로 맑아지고 눈을 보지를 아니하면 離하는 火가 안으로 다스려지며, 입이 말하지 아니하면 兌라는 金이 울지 않는다. 백 맥이 모두 갈아앉고 모양과 氣가 다잦아져서 ... 어둠이란 밝음의 터전이요 흐림은 맑음의 근원이니, 이러함에서부터 나아가사 원만하게 밝고 훤하게 비추며 ... 포일자(抱一子) |
1, 靈神臺에서의 生活
2, 金先輩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3, 金先輩에게 항의하다.
4,坐忘하기에 노력하다.
5, 靈神臺 南西壁 岩窟에서 미이라 仙人을 보았으며,
7, 神步術로 逃亡가는 노루를 붙잡는 이원도兄
8, , 80년 드디어 金先輩에게 仙道秘法을 전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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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妙香山으로부터 호랑이를 데려온 유사숙과 그의 제자,
13,유사숙과 그의 제자의 縮地術을 목격하다
14, 아들을 잡으러 지리산으로 들어 오신 아버님
15, 아버님과 담판 透視力을 보여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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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淑明女大를 나왔다는 智異山雪峰홍女人과 道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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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시 智異山入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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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오래전에 동천산방 현일자님 홈피에서 이글을 보았는데 신기한 글이었다.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으나 삭제 하려다가 올립니다.
관계 있으신 분들의 요청이 있으면 삭제 하겠습니다.
자료는 이것으로 다음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포일자님이 이정도로 내어 놓으신 것을 보면 아주 많이 누설 하였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둥바둥 살고있는 모습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대한민국에는나타나지 많은 이인들이 계신것으로 추리 할수 있으니 참으로 복된 나라 입니다.
저도 청양선생님을 한번 뵈온 기억이 있으나 특별히 사제간의 정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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