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양 이원선 靑陽 李源善 先生

참고할 만한 글이 있어 올려봅니다. 불타는 道 - 54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4. 11.

참고할 만한 글이 있어 올려봅니다.


불타는 道 - 54

 


<입력/2005-11-27>

Q : 나는 오래전부터 명산대찰을 순회하며 기도하고 마음공부를 하였습니다. 불자이면서 단전호흡 등 몸과 정신건강에 좋고 팔자를 고친다는 수련은 거의 경험하여 한때는 깨달음을 얻은 줄로 믿어 그런대로 잘 살았지만 지금은 몸도 망가지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당시 나를 지도해주던 스승은 물론 세상에 온갖 도사, 의사, 신의를 찾아다녔지만 호전은커녕 병명조차 모르는 병세는 날로 악화되기만 합니다. 누가 숨구멍을 막는 것도 아닌데 숨이 자연스럽게 쉬어지지 않는 원인은 무엇 때문이며 어떻게 하면 말 그대로 단전호흡이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신병이고 상기병이라고 말합니다. 정신력으로 한번뿐인 인생을 잘살아 보려고 최선을 다하여 온갖 심신수련을 하였지만 지금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생지옥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몸이 아픕니까?

A : 심안으로 보면 처처가 佛입니다. 명산대찰을 염두에 두고 마음공부를 하였다면 아니함만 못합니다. 순간을 놓치면 틈이 생기고 잠시라도 머물면 퇴보하는 것이 삶의 이치인데 일신의 안위를 수도(修道)로 삼았기 때문에 생지옥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선행이 손자 밑거름이라는 격언은 옛말입니다. 지금은 당대에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과보를 받는 초스피드 인과윤회시대입니다. 종교를 빙자한 구원과 미신행위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며 이미 끝물입니다. 참선으로 대변되는 심신수행의 효력은 과학보다 앞서 현대인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지만 동업중생에 대한 헌신의무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도(邪道)는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사술로서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심신을 갈고 닦아 자비보살이 될 서원을 세우지 않고 즐거움에 맛 들이고 행복을 선점하려는 목적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살아서 생각 생각이 불타는 화탕지옥을 겪는 것입니다. 현생은 전생의 거울입니다. 심신수련으로 고를 여의고 팔자를 고치려는 본능에 앞서 바라밀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도를 닦는 것만큼이 죄업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시방세계에 보시공덕 없이 단생에 안팎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며, 잠시나마 좋은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삿된 타력에너지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몸에 두 주인이 살게 되면 처음 얼마동안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기상으로 앓던 병도 없어지고 해괴한 힘을 발휘하지만 3년 이내로 환상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성현으로의 환골탈태가 수도의 목적이기에 애타게 무심인연을 찾지만 중생의 눈에 들어오는 선지식은 진정한 스승이 아닙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가 처음 보는 사람을 어미로 알고 따르듯 마음밖에 세움이 있고 구원을 말하는 영혼의 스승은 대부분 신(神)의 몸종입니다. 진리의 참 맛을 모르면 오백생을 내리 닦아도 흑과 백이 흐릿한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만물이 생명의 근원이며 위없는 진실상이고 단전입니다. 사마외도들이 말하는 단전은 배꼽아래 어디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구성하는 우주대자연 즉, 연기의 실상과 회통하는 생물체의 호흡과 의식입니다. 생멸하는 대우주자연의 섭리와 어긋나지 않는 순수의식이 되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호흡이 깊어지고 지혜가 밝으며, 단전호흡이 일상인 그야말로 무심도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학문과 기술은 노력으로 발전이 가능하지만 생명의 끈인 호흡에도 묶이지 않는 무심경지는 삼신불(三身佛) 인연으로서 만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敎)는 도(道)를 이루는 보조수단이며, 호흡을 초월하지 못한 깨우침은 없습니다. 죽기 보다 더 힘든 경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만이 중생상이 떨어지고 생명의 끈인 호흡마저 자유스러워집니다. 수증(修增)으로 이치가 터득되는 영역만큼 호흡이 깊어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점수(漸修)이고 그만큼의 극락이고 해탈이지만 들숨날숨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으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성불(成佛)입니다.

불을 건너지 못하는 목불(木佛)이 아니어야 생명의 끈인 호흡마저 초월하게 되며 따라서 숙업이 쉬어집니다. 호흡을 버리기 위하여 올바른 호흡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숨을 들여 마시고 멈추고 내쉬고 하는 기술적인 방법으로는 의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 단전호흡의 참뜻과 계합하지 못합니다. 호흡이 깊어진 정도만큼이 고요이고 지혜입니다. 세간의 삿된 호흡 수련은 육근에 맛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단박은 후련하지만 결국 호흡에 묶여 헐떡거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초래합니다. 생각이 호흡에 달라붙어 숨을 쉴 때마다 죽었다 살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 심병입니다. 그 원인은 뜻을 잘못세운 것이 첫째이고, 그릇된 행실이 둘째이며, 들숨날숨을 잘못 한 것이 셋째입니다. 무심씨앗을 얻지 못하면 마음을 다스릴수록 호흡에 생각이 묶여 무기에 떨어지고 병마의 침해를 받습니다. 깨달음이 종교와 느낌, 사유가 아니라 호흡지간인 것은 만고불변이지만 세간의 엉터리호흡법에 빠지면 해탈지혜는커녕 자기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생지옥에 빠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끈인 호흡마저 초월할 때 용천이 됩니다. 숨 쉬는 기술로 삿된 정신력을 키워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세상을 헤집고 다닌 업은 반드시 단명이나 생지옥의 과보를 받습니다. 몸 없이 받는 저승과보는 어쩔 수 없지만 육근에 기반을 둔 산 목숨이 지옥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는 형벌인 도병의 고통은 필설이 부족합니다. 약나무 아래서 약초를 찾는 것이 업보중생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보살도 육체의 고통은 있기 마련입니다. 거울이 맑으면 사물이 뚜렷하듯 보살의 아픔은 더욱 진하지만 정화능력이 탁월하고 잔재가 남지 않는 것이 중생과 다릅니다. 만일 ‘나는 깨달았기 때문에 육신의 아픔이 없어졌다’라고 한다면 그는 외도이며 말하는 송장입니다.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에 대왕이 나아가세나 존자에게 묻기를, 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사람도 괴로움이 있습니까? 라고 말하자 나아가세나 존자는
『어떤 괴로움은 느끼고, 어떤 괴로움은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대왕이시여, 육체적인 고통은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육체적인 고통의 인(因)과 연(緣)은 계속되기 때문에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의 인과 연은 끝났기 때문에 느끼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해탈하면 한 가지 괴로움 즉, 육체적인 괴로움만을 느끼지만 정신적인 괴로움은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육체적인 괴로움만을 느끼는 해탈한 사람은 왜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지 않습니까?』『대왕이시여, 아라한에게는 사랑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익지 않은 과일나무를 흔들어 억지로 과일을 떨어뜨리지 않고 기다립니다. 사리불장로는 이렇게 읊었습니다.』나는 죽음을 환영하지도 않으며 삶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다가 올 때를 기다린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으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바로 알고(正知) 바로 생각하며(正念) 때를 기다릴 뿐이다.
<우곡선원 펀 글> http://zen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