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徐京德)의 문인(門人)들
서화담(徐花潭)은 결국 리수(理數)의 학문으로 소강절(邵康節)을 뒤따랐으므로 퇴계(退溪)와 율곡(栗谷)등제선생의 학설과 차이가 있다.그 문인인 민행촌(閔杏村) 순(純), 이토정(李土亭)지함(芝含), 박수암(朴守庵)지화(枝華), 박정산(朴鼎山)동(洞), 정곤재(鄭困齋)개청(介淸), 박사암(朴思庵)순(淳), 및 기타 제공들의 문학과 명절(名絶)로 이름이 나타난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오직 토정(土亭)과 수암(守庵)은 수학(數學)으로 이름이 났다.
민순(閔純)
민순(閔純)의 자(字)는 경초(景初)요, 호(號)는 행촌(杏村)이니 려강(麗江)사람이다.화담(花潭)보다 31세가 적다.소년시절 뜻을 학문에 두었으나 그 요령을 알지 못하였다.처음에는 신락봉(申駱峰)광한(光漢)을 좇아 배워 문장을 다스렸고 뒤에는 화담(花潭)을 뵙고 위기(爲己) 주정(主靜)의 학문을 듣고서 마음을 전일(全一)하게 갖고 강습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빗고 옷입고 관쓰고 한 방에 홀로 거쳐해서 옷 깃을 바로하고 마치 진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이 단정히 무릅을 꿇고 앉았다.도(道)를 지키는데 힘써 벼슬하지 않고 분수를 지켜 빈한한데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욕심을 적게 하였으므로 학자들이 존경하였다.성묘조(成廟朝)에 지평(持平)을 배명(拜命)하여 인순왕후(仁淳王后)국상(國喪)에 백모삼년(白帽三年)의 제도를 개정하였다.
주정(主靜)주염계(周濂溪)의 말로서 심(心)의 정허(靜虛)한 것을 말한다.
다만 불교의 진정(眞靜)과는 구별 되어야 한다 하나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의 문제인데 구별하기 어렵다.
이지함(李芝含)
이지함의 자(字)는 형중(馨仲)이며 한산(韓山)이 본관이다.주거하는 집을 흙으로 덮었으므로 호(號)를 토정(土亭)이라고 하였다.화담(花潭)보다 29세가 적었다. 타고난 기질과 도량이 보통보다 특이하였으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것이 남보다 특출하였다.평생에 독서하는 일이 드무나 책을 폈다 하면 해가 지고 밤이 밝았으며 성현(聖賢)의 경전(經傳)과 제자(諸子 ;노자 장자등)와 사서(史書)를 관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붓을 들면 글을 만들어 내려가는 것이 샘물이 솟아나듯 하였다.평생에 욕심이 적어 물질에 대하여 인색하여 막히는 것이 없었으며 능히 한서(寒暑)와 기갈(飢渴)에 견디어 겨울철 추운 날씨에도 알 몸으로 모진 바람속에 앉았거나 열흘동안 음식을 끊어도 태연하였으며 자기의 빛을 감추어 속류(俗流)들에 섞였어도 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학문됨이 주경(主敬) 궁리(窮理)와 실천이행하는 것이 독실하게 하는 것으로 선무(先務)로 삼았으며 의리를 논하여 시비를 분별하는 것에 광명정대하고 통달하였으며 사물을 인용하여 분석하는 것이 아주 세밀하였다.늦게 나라에서 부르시는 명에 응하여 포천(抱川)과 아산(牙山)두 현(縣)의 원이 되었다.나이 62세에 별세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였고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고 내렸다.
제가(諸家0들의 술수(術數)에 통달하여 개닫지 못한 것이 없었다.조그만 배를 타고 네귀퉁이에 큰 박을 매달고서 세번이나 제주(濟州)를 드나들었으며 철관(鐵冠)을 만들어 썼는데 벗어가지고 밥을 지어먹고 닦아서 다시 썼으므로 스스로 철관자(鐵冠子)라고 호(號)하였다.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삼성문화문고 59에서
삼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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