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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 정길 蘭谷 鄭佶의 蘭谷遺稿

오언절구(五言絶句) 난곡 정길 蘭谷 鄭佶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3. 4.

 

 

 

시(詩)

 

오언절구(五言絶句)

 

문상경위천석상음(文祥卿 緯天 席上飮)

문상경 위천과 자리를 같이 하고 마시다.

 

백주산중숙(白酒山中熟) 산 속에서 익어 빚은 술

수배간락화(數盃看落花) 여러잔 들이키고 떨아지는 꽃잎을 바라보네

산창일기석(山窻日己夕) 산속 창가에서 날은 저물어

정수영교가(庭樹影交加) 뜰 앞의 나무 그림자 교차하네

 

 

경화귀로증인원상인(京華歸路贈仁圓上人)

서울을 떠나면서 인원스님에게 드림

 

초경근래방(草逕勤來訪) 풀밭길을 부지런히 와서 보니

방지학골경(方知鶴骨輕) 비로소 학뼈가 가벼운지 알겠고

명조환작별(明朝還作別) 내일아침 헤어지려니

천리몽중정(千里夢中情) 머나먼 천리 길 잊을 수 없네.

 

 

 

 

 

 

증제선(贈諸禪) 여러 스님에게 줌

 

아시평종객(我是萍종客) 나 본시 뗘도는 나그네

금봉상외인(今逢象外人) 오늘 형상밖의 사람을 만났구나.

선담산일모(禪談山日暮) 선문답으로 날 저무니

번상탕무진(煩想盪無塵) 어지러운 생각 싹쓸어 번뇌가 사라지네

 

 

칠언절구(七言絶句)

 

차상경운(次祥卿韻) 二首 상경운(祥卿韻)에 차운(次韻함)

 

낙화여설산정중(落花如雪散庭中) 떨어지는 꽃잎은 정원에 흩어져

일임비비양류풍(一任飛飛楊柳風) 봄 바람에 날려 흩날리네

구십춘광과수리(九十春光過愁裏) 근심속에 봄빛은 삼개월이 지나가고

수성제조한무궁(數聲啼鳥恨無窮) 지저귀는 새 소리 한스럽기 그지없네

 

창애반험고기척(蒼崖盤險高幾尺) 푸른 절벽 험난하여 높이가 얼마인가

상유천년부장송(上有千年不長松) 위에는 천년 소나무 자라지 않네

아욕반라승절정(我欲攀蘿昇絶頂) 다래넝쿨 부여잡고 정상에 올라

추수선자섭운공(追隨仙子躡雲空) 신선을 따라서 하늘에 오르리라.

 

 

 

 

 

(1) 증김성혼(贈金聲渾) 김성혼에게 줌

 

불견용안지기춘(不見容顔知幾春) 얼굴을 못본지가 그 얼마인가

산중해후독심진(山中邂逅獨尋眞) 산 속에서 처음 만나 진실됨을 찾았네

종소설도상심사(終宵說道傷心事) 밤새도록 마음 상한 일 이야기 하고

미사여생아이인(未死餘生我二人) 죽지 못해 사는 인생 그대와 나 둘이네

 

 

 

(2) 방안사언방준우매계동(訪安士彦邦俊于梅溪洞)

안사언 방준을 매계동으로 찾아감

 

청사고주탁겸청(靑絲沽酒濁兼淸) 젊은이가 술을 사니 청주와 탁주인데

만리장천월색명(萬里長天月色明) 밤 하늘에 달 빛이 명랑하네

 

취후불금향사고(醉後不禁鄕思苦) 취한 뒤 고향생각 끊이지 않은 것은

 

지연위객한양성(只緣爲客漢陽城) 다만 인연있는 한양성의 나그네일 뿐이네

 

 

 

매계동(梅溪洞)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좌룡낙산(左龍駱山)에 있던 조위(曺偉)가 살던 집으로

매계동(梅溪洞)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안방준(安邦俊)이 살게 되어 蘭谷께서 벗이었던 사언(士彦) 안문강공(安文康公)을 매계동으로 찾아가 지은 시(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방준

[ 安邦俊 ]

 

이칭별칭
 사언(士彦),  은봉(隱峰), 우산(牛山), 시호 문강(文康)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73년 ~ 1654년
성격
학자
출신지
보성
성별
본관
죽산(竹山)
관련사건
임진왜란, 인조반정
대표관직(경력)
지평, 공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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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의
  2. 개설
  3.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1573(선조 6)∼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빙호(氷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이며, 처는 경주 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 지방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벼슬에 등용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선비)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대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 : 기를 숭상함)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으로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 李大源傳≫·≪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삼원기사 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방준 [安邦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