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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 정길 蘭谷 鄭佶의 蘭谷遺稿

성균생원난곡선생정공유장비(成均生員蘭谷先生鄭公遺庄碑)

by 성천하지미미자 2023. 2. 21.

성균생원난곡선생정공유장비(成均生員蘭谷先生鄭公遺庄碑)

 

 

석호산(石虎山) 아래 정강(程江)의 물가에 마을이 있으니 안적촌(安迪村)이라고 한다

 

아늑하고 깊숙하여 집터가 그윽하고 형세가 막히어 산에 가서 나물캐고

 

강에 나가 낚시질하며 가히 숨어서 살만하다.

 

옛날 宣祖 辛丑년 서기 1601년무렵에 난곡선생 鄭公께서 감절동(甘節洞)으로부터

 

이 고요한 것을 취하여 집터를 잡아 이사와 살면서 그가 거처하는 문 위에

 

蘭谷이라는 현판을 달고 글을 지어 그 뜻을 나타내기를

 

어렵게 살면서 초야에 뭍인지 36년이다

 

이름도 드러나지 않고 몸도 고을에 나다니지 않았으며

 

못에서 난초를 캐어 九원이나 되는 밭에다 심어 가꾸어 벗과 더블어 말 할 때에는

 

그 향기를 사모하고 시대에 나타나지 않는 그 그윽한 것을 사모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가히 그분의 가슴에 품고 있는 맑고 높은 지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先祖는 河東人이니 휘(諱)는 길(佶)이요 자(字)는 자정(子正)이며

 

高麗때에 좌정승을 태자첨사를 지낸 응(膺)의 후손으로

 

조선조때에 숭록대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하원군(河原君)에 봉군(封君)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인 수충(守忠)의 5세손이요

 

첨중추부사를 지낸 유일(惟一)의 제4子이다

 

그윽히 생각해보건데 공은 여러대를 이어온 벼슬집안의 후손으로

 

영특하고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 마땅히 출세하여 할 일이 있었을 터인데도

 

일찍이 출세의 길을 사양하고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

 

나의 先祖이신 문강공(文康公)죽천선생(朴竹川先生)의 문하에 취정(就正)하여

 

성현의 참된 깨달음을 얻어 듣고 깊이 기뻐하여 따르게 되었으며

 

또 우산안문강공(牛山安文康公)과는 좋은 벗이 되어 道義를 서로 연마하여

 

어진 스승과 친구사이에 훈도하고 침관하여 비연히 성장(成章)하였으며

 

효제(孝悌)의 행실은 가정에 독실하였고 경술(經術)의 칭송은 고을에 나타나

 

살아계실 때에는 정채(精彩)가 산천에까지 나타나고

 

돌아가셔서는 풍운이 후세에가지 미치었다.순조(純祖)丁卯년 1807년에

 

고을의 선비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고을의 육현(六賢)을 제사 지내게 되었는데

 

公도 거기에 배향(配享)하였으니 가히 공의 덕이 사람들에게 깊이 믿어지게 되었고

 

공의(公議)가 마침내 없어지지 아니한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충효는 공의 바른말로 壬辰年 (선조25년 서기1592년) 섬나라 오랑캐들이

 

옳지 못한 세력으로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난 亂을 당하여 우리선조 朴竹川先生을 따라

 

능히 몸을 적개(敵愾) 도적놈들에 대한 분개심을 떨치어 군사(君師)의 의로움을 폈으며

 

우리선조 박죽천선생께서 돌아가신 뒤로 안문강공(安文康公)과 같이 서원(書院)을

 

용산(龍山)아래 창건하시어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정성을 다하여 한결같이 섬기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난리를 겪은 뒤에는 수 많은 책의 경적(經籍)이 불에 타 없어져버려

 

선비들이 글을 배우려 하나 자료가 없으므로 우리선조박죽천선생의 장자인

 

만포공 근효(晩圃公 朴根孝)와 같이 경전을 빠른시일 내에 간행하여 널리 전하고

 

후학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끼쳐 크게 유교에 공헌하였다.

 

丙午年(선조39년 서기 1606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 임금께서 친히 큰 난리를 겪어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몸소 시험장에 나오시어 대책을 물음에 공이 폐단을 구하고 학문을 일으킬 방안을 조심스럽게

 

진술하니 물이 성하게 흐르듯이 막힘이 없는 수천언(數千言)이 당시 시대상황에

 

잘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자기 의견을 내세워 말하는 사람들이 가슴속에 쌓인

 

포부의 무게를 칭찬하였으며 태학(성균관 : 成均館)에 있을 때에

 

여러 생도들과 상소하여 오현(五賢)을 공자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회재(晦齋)의 을사년 사건을 가지고 허락하지 아니하니

 

공이 김선(金宣)등과 같이 상소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의 기세가 불꽃처럼 일어날 때를 당하여 이무(李무)와 오전(吳전)등

 

수백인과 같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죄를 상소하여 배척하니 광해주가 되려

 

성을 내어 상소를 주도한 유생을 금고(禁錮)를 내렸으나 大臣의 신구(伸救)를 힘입어

 

면하게 되었으니 그 어진이를 존경하는 성의와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엄중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행동을 단속한 것이 심히 고상하였으며 더욱이 가정에 독실하였고

 

나이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는 것이 옆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으며

 

모친께서 눈이 어두워 폐인이 되어 자리에 누워계시는데 붙들어 간호하고 정성을 다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귀와 눈 손발노릇을 대신하여 십수년을 하루같이 하셨으며

 

모친상을 당하여 정유재란을 만나 신주를 모시고 제형(諸兄)을 따라 천봉산(天鳳山)중으로

 

도적놈들을 피해서 갔는데 비록 분주하게 도망 다니는 가운데에서도 아침 저녁 상식을

 

올리는 데에 그 법도를 잃지 않으니 사람들은 진실하고 독실한 효행을 칭찬하였으며

 

여러 형들을 섬기되 얼굴에 화평한 기운이 넘쳐 조금도 다른 마음이 없었으며

 

선영을 받들기를 정성을 다하여 작은 아들이라 하여도 조금도 게을르지 않았고

 

나라의 국상(國喪)을 당해서도 또한 석달간을 소식하여 예절을 표했으며

 

손님이나 벗을 맞아 들임에 정성스럽고 흡족함이 두루 지극하였고 그분들이 떠날 때는

 

반드시 마을 밖까지 전송하고 성품은 편안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지켜 항상 방안에 단정하게 앉아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경서(經書)나 예기(禮記)의 뜻을 궁리하여 잠잠하게 수행하는데 힘썼으며

 

이치를 궁리한 방법으로 그 덕성을 쌓아 기르고 그 자신을 닦아 가정을 돌봄에 순수하여

 

한결같이 올바르게  나왔으며 여러 자식들을 훈계하고 가르침에 효도와 공손한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평상시에도 거듭 일러주어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가슴에 새겨 따르게 하므로 후손들이 이어받아

 

모범적으로 독실하게 지켜 폐지하는 것이 없으니 이제까지 수백년이 되어도 오히려 분수를

 

편안히 하고 유교를 실행하여 효도하고 삼가하는 마음으로 풍속을 이루었으니

 

그 후손 석남공의현(石南公毅鉉)같은 분은 효학(孝學)과 행의(行義)로 순곤(純坤)의 날에

 

잔선(殘線)을 붙들어 크게 세상 살아가는데 보템이 있었으니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아 ! 공의 일생의 자취는 비록 표표하게 나타난 업적은 없으나 그 그윽하게 홀로 수련한

 

사실이 바로 그윽한 난초가 자연히 향기로운 듯하며 오래 계시지 못하고 그 향기를

 

펴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다

 

끼친 향기가 상자 안에 있은지 오래 되어 벌레나 쥐의 배만 채우다가 삼백년이 지난 뒤에야

 

먼 맏손자 노백공해영(老栢公海榮)이 비로소 주워 모아 인쇄하게 되었고

 

동강김령공 영한(東江金令公 영漢)이 서문을 쓰기를 공은 천분(天分)이 초매(超邁)하고

 

문예(文藝)가 숙무(夙茂)하여 잠깐사이에 수천언을 파도가 출렁이듯 쏟아내니

 

상자속에 아무리 감추워져 있더라도 반드시 적요(寂寥)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거늘

 

촌주척벽(寸珠尺璧)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아  !  진실로 가히 애석할 뿐이다

 

비록 그러나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 진미(眞味)가 있고 고기(古氣)가 있으니

 

산적 한 점으로 온 솥 안의 고기맛을 알것이요

 

또 이르기를 대현(大賢)에게 교훈을 받아 그 나아갈 방향을 정하였고

 

도덕으로 절차탁마하여 그 기초를 세웠으니 한마디 말과 한가지 행동이 오직 충과 효니

 

이에 가히 지론(至論)이라 이를 것이요

 

가히 백세토록 증험할 것이라 하였다.

 

공께서 明宗 丙寅년 서기 1566년에 출생하시어 54년 뒤 己未년 광해군 11 서기 1619년에

 

卒하시니 보성군 노동면 파라치 亥坐의 언덕에 葬하였고 그 配나 嗣子는 前例대로

 

반드시 갖추어 쓰지 아니한다.

 

요사이 後孫 希賢이 여러 일가들과 마을 어귀에다 遺莊碑를 세우기로 의논하고

 

나고 들면서 우러러 보고 선조의 사모하는 정을 붙이자고 의논하여 그 일가의 어른인

 

하현(河鉉)과 해옥(海玉)이 그 일을 주관하면서 七鉉 淳植 海勳 判來 槿采 등이

 

연속 같이 와서 내게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니 돌아보건데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여

 

비록 감당할 수 없으나 이에 先世의 情誼가 중하니 어찌할 것인가 ?

 

드디어 병을 참고 견디면서 右와 같이 서술한다 따라서 노래하노니

 

虎산은 높고 높으며   程江은 넓고 넓도다

 

오직 공의 명성도  저 江山과 함께 오래 하리라.

 

 

 

公沒後七丁丑夏至節

 

 

 

珍原     朴 廈 柱     謹述